NEW MIND
달력의 마지막 장을 뜯어낼 땐 늘 희망보단 공허함이 차올랐다. 이제는 가벼이 새 달력의 첫 장을 펼쳐 보일 때다. 살아라, 웃어라, 부디 행복하게.
12월이 다시 1월이 될 때마다 세월은 나이를 먹는다는 애절함이 아니라 시간 자체의 의미로 육박해온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도시를 수놓는 연말연시. 남들은 죄다 덩실덩실 춤을 추듯 심야 택시를 불러 세우던데, 나는 낙천주의에 거절당한 딱한 얼굴로 길 위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지나온 1년을 돌아보니 아주 난감할 따름이었고, 나아갈 한 해를 미리 보고자 자라처럼 목을 길게 뽑아본들 뭐가 보일 리도 없었다. 아니 깜깜하기만 했다. 뭐 하나 제대로 매듭지어 놓은 것 없이 나이만 한 살 더 먹는 것 같아 오그라든 태아처럼 작아지기 일쑤였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행복한데 나만 우울한 것 같았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도시인의 외로움과 고독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림은 야심한 밤 뉴욕 맨해튼 거리에 있는 작은 식당의 풍경을 담고 있다. 삼각을 이루는 기다란 바 테이블에는 세 명의 손님이 앉아 있다. 한 공간에 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환한 조명 아래 뚝뚝 따로 떨어져 앉아서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고 있을 뿐이다. 20세기 미국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로 평가받는 호퍼는 대도시 뉴욕에 살면서, 뉴욕의 화려함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도시와 그곳을 살아가는 이들의 외로움과 우울함만을 뾰족하게 바라봤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1941년 12월부터 그리기 시작해 이듬해 1월에 완성했다. 연말연시의 우울감이 그림 전반에 걸쳐 바짝 깔려 있을 테다. 또한 시인 신경림은 자신의 시 ‘세밑’에 적었다. ‘저물녘 내게 몰아쳐온 이 바람 무엇인가 송두리째 나를 흔들어놓는 이 폭풍 이 바람은 무엇인가’. 그러게 말이다. 애써 긍정과 희망, 올해보다 나은 내년을 울부짖는 새해 첫머리에 마음 한쪽을 대차게 흔들어놓고 휙 떠나는 그 바람이란 대체 무엇인가.
12월과 1월 사이에 병원을 찾는 우울증 환자가 더 늘어난다고 한다. 크리스마스나 연말 분위기를 즐기는 이들을 보며 외로움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집에서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대뜸 찾아 들기 시작해, 종종 취재에 필요한 자문에 더해 온화한 조언의 말을 아낌없이 들려준 이택중 신경정신과의 이택중 전문의에게 “저 지금 가요”라는 대사를 당돌하게 남긴 채 흑임자 케이크 두 조각을 사 들고 진료실에 들어섰다. 진료가 끝난 이른 밤, 그는 여전히 종이 진료기록부에 만년필로 알아볼 수 없는 필기체를 잔뜩 적어 내려갔다. 마침 낮에는 인터뷰이와 마주 앉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한 참이다. “잡지는 한 달을 먼저 살아요”. 이하 생략. 지금이 올해인지 내년인지 분간이 안 되기 시작한 순간. 더는 날짜를 셈하지 않기로 자포자기하려던 찰나. “어쨌거나 마음이 작동하고 있다는 거네요. 좋은 거죠. 아직 젊다는 증거라고 생각해보자고요.” 지긋한 나이의 이택중 전문의가 운을 뗀다.
이번에 알게 된 건데 ‘홀리데이 블루스’라는 말이 있더군요.
‘연말연시 우울증’이라고 해요. ‘홀리데이 블루스’는 2011년 미국 심리학회에서 정식 심리학 용어로 채택한 용어예요. 연말연시의 긴 휴일 시즌에 형성되는 행복한 분위기와 자신의 상황을 비교하며 예민해지거나, 한 해 동안 자신의 실패한 일들을 떠올리며 생기는 우울감의 증상을 말해요. 홀리데이 블루스는 계절적 요인과 심리적 요인이 겹쳐 생긴다고 볼 수 있어요. 겨울이 되면 햇빛을 볼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잖아요. 춥고 귀찮으니 평소라면 뭐라도 좀 해보려던 운동도 손 놓게 되고요. 또 추운 날 밤에 먹으면 유난히 맛있는 음식들이 좀 많아요? 올해는 다들 조용히 지나갈 테지만 예년 같으면 무슨 무슨 ‘회’가 붙은 연말 모임도 잦고요. 살은 찌고 잠은 부족하니 피로가 쌓일 테고요. 우울해질 수밖에요.
하나의 감정, 하나의 마음으로 표현할 수 없어요. 우울감, 공허함, 불안이 다 공존해요. 어쩌면 단순한 찝찝함과 심란함 같기도 하고요.
다 맞아요. 기본적으로 홀리데이 블루스도 다른 우울증과 같다고 보면 돼요.잠을 잘 못 잔다거나, 몸살 기운이 느껴지기도 하고 무기력해지죠. 심해져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정도면 곤란하지만, 그게 아니면 지나치게 확대 해석할 필요 없어요. 12월, 1월에는 붕 뜬 것처럼 낯설고 불안하겠죠. 금방 2월 오고, 3월 돼요. 꽃 피는 봄이 온다고요. 매사에 너무 뾰족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
사회적 거리 두기처럼 마음과 거리를 두는 일도 필요한 것 같아요.
곤히 잘 자고 있는데 어디서 무서운 소리가 들릴 때 있잖아요. 뭘까 궁금해 미치겠는데 막상 가서 확인할 용기가 안 나요.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상처, 혹은 내면의 공포도 마찬가지예요. 직면할 마음을 먹기 쉽지 않지만 꺼내놓고 보면 늘 별게 아닐 때가 많아요.
마음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자존감의 문제일 수도 있겠네요.
연말연시에는 평소에 만나지 못하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잖아요.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났는데 친구들 연봉이 오르고 주식이 잘됐다고 자랑해봐요. 난 뭐 했나 싶죠.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여요. 남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상대적 박탈감이 엄청나겠죠. 직장인이라면 그맘때 실적 평가니 승진 심사니 평가와 보상이 따르는 시기니까 자신을 돌아보게 돼요. 자존감이 작아질 수 있어요.
자포자기하고 싶거나 도망가버리거나 숨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해요.
한 해를 돌아보니 남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한 무능함, 그걸 넘어서는 무가치함, 죄책감, 허무함, 미래에 대한 절망감에 빠질 수도 있어요. 앞으로 열심히 살아봤자 나아질 것 같지 않은데 그냥 다 포기해버릴까? 싶은 거죠. 허황한 욕심이 커서 그래요. 내가 딱 할 수 있는 만큼만 목표를 세우고 차근차근 그걸 이뤄나가는 연습을 하는 게 좋아요. 사소한 것도 상관없고요. 성취감은 꼭 중독 같아서 그 맛을 알아야 계속해낼 수 있거든요.
연말연시 우울증,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그냥 ‘오늘’을 살면 돼요. 특별한 날, 의미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순간이에요. 평소 슬픔에 잠겨 있거나 이미 정신 건강에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외로움이 심할 경우 그 파멸감은 증폭할 수 있어요.
올해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좀 다를 것 같은데 어떻게 보세요?
매일 상황이 달라지고 있지만, 바이러스 확산이 심각한 상태라는 걸 잊지 마세요. 어떤 사람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공황 상태에 빠질 수도 있어요. 연말연시에는 사람들과 모여 파티를 열고 즐겨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게 불가능하니까요. 오히려 외로울 수 있죠. 올해는 콘셉트를 완전히 새롭게 바꿔서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 건 어때요? 집에서 홈 트레이닝을 하거나 대청소를 하는 것도 좋겠네요. 느긋하게 낮잠을 좀 자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 것도 좋아요. 그러면서 새로운 한 해를 미리 그려보세요. 도움이 될 거예요. 모두에게 2020년은 끔찍한 시간이었지만 2021년에는 천천히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요.
여러모로 치유가 필요한 상황이네요.
충분히 사랑한 것은 떠나갑니다. 충분히 미워한 것도 그렇고요. 그러니 일부러 모질게 쳐내고 잘라낼 필요는 없어요. 내 안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봐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면, 그것들은 어느 순간 길 떠날 채비를 할 겁니다. 그때 잘 떠나보내 주세요. 멋있게 작별해요.
새해다. 달력은 일찌감치 그렇다고 일러주는데, 아직 내 마음은 준비가 덜 되었는지 영 기분이 나지 않은 채 며칠이 훌쩍 지날 참이다. 아무렴 어때, 희망의 업적은 경험을 이긴다. 아침에 제대로 깨어 있는 자들이 만드는 밝고 환하고 낙천적인 분위기를 닮고 싶다. 매일 아침의 깔끔한 빛, 지난밤 무슨 일을 겪었든 정직하게 다시 찾아오는 새로운 하루에 대해서도 새삼. 그러곤 며칠 늦었지만, 창문을 열고 선언하듯 외칠 것이다. “오늘부터 새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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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최지웅
- 포토그래퍼
- CHOI JI WO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