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PACIFIC / 잭 딜런 그레이저

잭 딜런 그레이저가 캘리포니아의 바다를 향해 내달리던 순간 서울에는 눈이 내렸다. 거기는 아직 수요일이었고, 여기는 이미 목요일이 저만큼 흐르던 시간.

바지는 골든구스(Golden Goose), 목걸이는 마린 코스텔로(Marrin Costello), 티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르자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용맹한 통보 이후 신작 <위 아 후 위 아>에서는 “널 뭐라고 부르면 돼?”라고 우선 묻는다. 스스로의 이름을 다시 쓰거나 고쳐 쓰거나 새로 쓸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는 건 <그것> 시리즈와 <샤잠!> 등을 통해 진작부터 관객을 만나온 배우 잭 딜런 그레이저다. LA 집과 동네와 해변을 뛰노는 그와 비대면으로 함께했다.

당신이 화보 촬영을 하던 순간 서울에는 모처럼 눈 같은 눈이 쏟아지고 있었어요. 꼭두새벽에 일어나 모니터를 통해 당신을 지켜봤죠. 석양 아래 텅 빈 바다로 돌진할 땐 묘한 해방감마저 들더군요.
서울보다 온화하지만 LA도 지금 겨울이에요. 물에 들어가는 건 엄마가 반대했지만 현장에서 허락하셨어요. 저 진짜 너무 추웠어요.(웃음)

LA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언제죠?
당연히 여름이죠. LA는 여름의 도시니까요.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과 아름다운 해변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아요.

‘잭 딜런 그레이저’라는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생각해요? 
어릴 땐 누군가 내 풀 네임을 호명하면 썩 달갑지 않은 상황일 때가 많았어요. 교실 스피커에서 이름이 흘러나오는 건 말썽을 일으킨 나를 교장실로 급히 소환하는 경우뿐이었으니까.(웃음) 배우로 사는 지금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됐죠.

LA 토박이인 동시에 라트비아, 러시아 유대인, 독일,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알아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해요?
듣고 보니 아주 이국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지네요.(웃음) 사실은 그렇지도 않은데 말이죠. 나는 스스로를 그냥 미국 사람이라고 규정해요. 미국에서 태어났고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영어니까요. 개인의 정체성을 논할 때 국적이나 민족성은 이제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건 ‘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인지에 관한 물음뿐이라고 생각해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만든 HBO의 8부작 시리즈 <위 아 후 위 아>에 출연했죠. 각종 매체에서 2020년을 대표하는 시리즈로 언급했고, 한국에서는 왓챠 플레이에서 독점 공개됐어요.
엄마와 극장에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본 날의 기분을 확실히 기억해요. 본능적인 감정을 아주 예민하고 탁월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곧장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에게 반해버렸어요. 언젠가 그와 꼭 작업하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그날이 빨리 왔죠. 촬영을 위해 머리를 하얗게 탈색하고 이탈리아에서 지냈어요. 꿈 같은 시간이었죠. 뻔하게 들리겠지만 모든 게 다 놀랍고 신기했어요.

두 작품은 어쩌면 하나로 이어지는지도 몰라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클래식이라면 <위 아 후 위 아>는 보다 동시대적이죠.
전적으로 동의해요. 그의 모든 작품에는 특유의 관점과 색깔이 묻어 있어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예술적이었다면, <위 아 후 위 아>는 리얼리즘적인 면이 더 강해요. 비로소 현실과 예술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신의 본능적인 감각을 힘껏 밀어붙이는 감독님의 자신감이 놀랍기도 하고.

내가 놀라운 건 당신이 연기한 ‘프레이저 윌슨’의 안절부절못하는 얼굴과 몸이에요. 자기감정을 어떻게 할 줄 모르는 듯 뚝뚝 끊어지는 태도, 눈빛, 말투 같은 것. 철저히 계산한 연기인가요?
그를 연기한다는 건 낯선 경험이자, 큰 도전이었어요. 프레이저를 ‘연기’하는 순간 다 망할 것 같았어요. 시리즈를 봤다면 알겠지만, 단순히 대사를 외우고 감정에 이입하는 정도로 그 소년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해요. 도무지 알 수 없는 행동을 일삼는 그의 마음, 아픔, 동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했어요. 그가 무얼 원하는지 끝없이 질문하면서 완전히 그로 변해야만 했죠.

루카 구아다니노가 배우와 캐릭터를 조종하고 장악하는 방식이 흥미로워요. 
감독님은 작품을 둘러싼 사소한 디테일 하나도 쉽게 흘려보내지 않고 모든 걸 직접 살피는 사람이죠. 배우에게는 늘 관대해요. 까다로운 연기 지도 같은 건 없었고, 스스로 실험하고 질문하고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풀어두는 식이었어요. “너라면 어떨 것 같니?”라는 물음으로 배우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생각하게 해요. 그 믿음이 늘 든든했죠.

티셔츠와 코트는 마르니(Marni), 목걸이는 마린 코스텔로와 생로랑 바이 안토니 바카렐로.

그의 작품에는 서사 대신 이미지와 정서가 있죠. 홀리고자 하면 끝도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리둥절해져요. 시리즈가 하고 싶은 말은 뭐라고 생각해요? 
인생은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문하는 과정의 시간인 것 같아요. 살아 있는 한 그 여정은 끝나지 않고, 완벽한 답도 찾기 어려워요. 우리는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새로운 나를 발견하면서 성장하고 변하고 나아가요.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유리잔에 끊임없이 물을 붓는 것처럼. 시리즈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분명해요. 인간은 누구나 흠이 있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작은 흠이 개개인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요.

프레이저의 방에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 기괴한 분장과 퍼포먼스로 유명한 뮤지션 클라우스 노미의 사진이 동시다발로 존재해요. 그는 또 오션 브엉과 윌리엄 버로스 같은 퀴어 작가의 글을 탐닉하죠. 이 소년의 심정을 누가 이해할까 싶어요.
아주 예민하고 영리한 친구죠. 저는 음악으로 프레이저를 이해하려고 했어요. 음악은 내게 큰 영감을 주거든요. 제 스포티파이 계정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플레이리스트가 존재해요. 블루스, 소울, 클래식 록과 펑크 록을 망라한 장르를 묶어두기도 하고, 출연한 작품과 캐릭터를 위해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기도 해요. 프레이저를 위한 플레이 리스트에는 클래식부터 힙합, 추상적인 재즈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담겨 있어요. 촬영 당시 그 음악을 들으며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어요. 실존주의와 희망, 운명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프레이저의 내면을 더 깊게 들여다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하나의 정답을 찾고 싶어 하죠. 그게 편리하니까. 근데 프레이저와 케이틀린은 모든 의미의 고정관념과 정답에 얽매이길 거부해요. 
둘 다 기존 사회적 규범에 저항하는 ‘안티 히어로’죠. 굳어진 관습을 향해 당돌하고 합리적인 의심을 품어요. 서로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이끌리고 위안이 되어주고요. 사랑이든 우정이든 다 떠나 진짜 아름다운 관계가 아닐까 싶어요.

그나저나 당신의 사춘기는 어땠어요? 
시련과 고난과 과소평가와 오해가 이어지는 나날이었죠. 지금 청소년은 기성세대와 비교할 수 없는 양의 정보를 습득할 수 있잖아요. 그 어느 때보다 청소년의 발언권이 강해졌지만, 맞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문제와 맞닥뜨릴 때도 있어요. 짜증 나는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고요.

티셔츠, 셔츠, 양말, 부츠는 디올맨(Dior Men), 바지는 생 로랑 바이 안토니 바카렐로(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목걸이는 마린 코스텔로와 생 로랑 바이 안토니 바카렐로.

LA의 청소년에게 스케이트보드는 필수인가요? 당신의 인스타그램 피드도 스케이트보드가 장악하고 있던데요. 
하하.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내 친구들은 스케이트보드를 좋아해요. 아직 경험이 없다면 한번 시도해보기를 추천해요. 맛을 들이면 헤어나올 수 없을 거예요. 영화 <미드90>의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처음 접했어요. 오디션에는 떨어졌지만 스케이트보드는 남았네요. 새로운 트릭을 습득하고 실력을 향상하면서 발전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게 좋아요. 친구들과 모여서 땀 흘리고 웃고 떠드는 시간은 제일 소중하고요. 집중력을 기르는 데도 좋답니다.(웃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의 북미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샤잠!>, <그것> 등 대중 영화 다음에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의 인디 영화를 택한 건 좀 외의예요.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오로지 시나리오예요. 각본과 연출을 맡은 알렉스 맥컬레이의 장편 데뷔작인데 특이하면서도 탄탄한 스토리에 반했어요.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에 출연한 핀 화이트헤드와 형제로 나와요.

영화 제목처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면?
비밀? 인스타그램을 보면 알겠지만 난 솔직해요. 500만 명에 가까운 팔로워가 지켜보고 있으니 입 조심을 하는 편이지만요. 지금 밝힐 수 있는 비밀은 요리사 출신 래퍼인 액션 브론슨의 광 팬이라는 것뿐.(웃음) 시시해도 어쩔 수 없어요.

언젠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과 이야기를 하는 것’에 똑같이 관심이 있다고 말했죠. 작가나 감독이 되고 싶어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네’라고 답할게요. 세상과 소통하는 건 내게 너무 중요한 일이에요. 배우를 넘어, 감독이나 작가로서 발언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지금도 몇 개의 시나리오와 단편 소설, 시를 쓰고 있어요.

점퍼는 미카엘 케일(Mikhael Kale), 목걸이는 마린 코스텔로와 생로랑 바이 안토니 바카렐로, 티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렇게 당차고 용감한 당신이 무서워하는 건 뭐죠?
좀 부끄럽지만 비둘기가 너무 무서워요. 농담 아니고 진심이에요.

쇼는 끝났지만 프레이저의 안부가 궁금해요. 그는 어떤 어른이 될까요? 
되게 흥미롭고 감동적인 질문이네요. 적어도 스스로를 확신할 수 있는 어른이 되지 않을까요? 몇 가지 문제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의 문을 닫은 상태로요.

당신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요? 이미 어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엄마의 바람처럼 진실한 어른이 되고 싶어요. 성공하고 싶지만 성실과 겸손을 간직한 예술가로 살고 싶고요. 매사에 즉흥적이고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재미를 추구하는 지금 모습은 간직한 채. 난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거든요.

    포토그래퍼
    Kwak Ki Gon
    에디터
    최지웅
    스타일리스트
    티파니 브리세노(Tiffany Briseno)
    헤어 & 메이크업
    소니아 리(Sonia Lee)
    프로덕션
    황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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