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대국
눈치는 필수인가. 과연 우리는 타인에 대한 평가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신뢰하는 것이 가능할까.
눈치 보는 한국인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대세 따르기를 중시한다. ‘분위기 파악 좀 해’, ‘눈치 챙겨’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까지 타인의 시선과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국민이 또 있을까? 작년 12월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 동향 2020’ 자료에 따르면 작년 6월 말 이후로 ‘확진될까 두렵다’보다 ’확진이라는 이유로 비난받고 피해 입을 것이 두렵다’고 응답한 이들이 더 많았다. 심지어 완치되지 못할까봐 두렵다는 응답보다도 확진자라는 낙인으로 손가락질당하는 것이 더 무섭다고 답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타인에 대한 평가가 두려운 걸까? 한국이 어쩌다 눈치대국이 된 것일까. 여기엔 첫째 역사적인 측면이 있다. 한국은 엄격한 신분 제도가 지배하는 유교 사회였다. 14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 조선 시대의 복잡한 위계 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연스레 상황을 살피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평가가 있다. 또 한반도는 외세의 침략이 잠잠했던 적이 없다. 역사상 800번 이상의 침략을 받아왔으며, 그에 따라 몽골, 만주, 일본에 둘러싸인 작은 한반도는 외압에 못 이겨 크고 작은 변화를 상황에 따라 수용해야만 했다. 일부 역사 관련 학자는 일제강점기 말 민족말살정책에 맞서서 한국적인 신념과 한글을 지켜낸 데는 선조들의 눈치 작전이 한몫했다고도 말한다. 이렇게 물려받은 눈치 DNA는 그 좋고 나쁨을 떠나 한민족 깊숙이 스며들게 되었다.
둘째, 우리 사회는 암묵적인 사회적 규범이 많고 ‘튀는’ 행동에 대한 관용도가 낮다. 차움 정신건강의학과 원은수 교수는 “옳다고 여기는 윤리와 상식이 조직의 의견과 충돌하는 경우가 있어요. ‘전체의 의견에 반해 개인의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는 것이 맞지 않다’고 교육을 받았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건 쉽지 않죠”라고 말한다. 우린 ‘모난 정이 두들겨맞는다’고 어려서부터 교육받았고 모난 정이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치력을 갈고닦는 것이다.
셋째, 자기신뢰가 부족하다. “우린 어려서부터 매 순간 평가받으며 살아왔어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위축된 사람은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죠. 그 마음이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지고 결국 자신의 결정과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불신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은 선택보다 남들 반응을 살피고,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 된다고 원은수 교수는 설명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부모의 과잉 보호 아래 자란 경우, 적절한 시도와 좌절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어요. 소위 말하는 ‘맷집’이 형성되지 못한 거죠. 누군가의 도움이 항상 전제되다 보면 성인이 되어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혼란스러운 거죠.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없으니 다른 사람들한테서 확인을 받으려 하고요. 타인의 의견이 너무 중요한 거예요.” 결국 스스로의 판단에 대해 자신감이 없고 자존감이 낮을수록, ‘나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고 전반적으로 괜찮은 결정과 행동을 해낼 수 있다’라는 믿음을 상실하게 된다.
물론 관계 속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타인의 평가와 반응에 필요 이상으로 반응해 소신을 잃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문제이니 헷갈리지 마시길.
스트레스와 질병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이 지속적으로 제약을 받게 되면 이는 결국 자율성 저하로 이어지게 된다. 자율성은 ‘선택한 목표와 가치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행동을 상황에 맞게 통제하고 조절하는 능력’으로 자존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율성이 없다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자기 존중감, 자기 가치감이 떨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부정적이게 된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우리 몸은 스트레스를 느낀다. 생존을 위해 뇌는 스트레스 상황을 감지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위협적인 상황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뇌의 일부 영역들은 스트레스 관련 호르몬과 신경전달 물질을 분비한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만 효과적이다. 오랜 기간 동안 스트레스 관련 호르몬과 신경전달 물질들이 지속적으로 분비되면 뇌와 몸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장기적으로는 우울증, 공황/사회불안장애, 섭식장애, 신체증상 장애 등 각종 정신건강의학과적 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마음 치료하기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마음 상태, 무의식,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 때문이기에 해결하는 방법도 개인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차이를 보인다. 먼저는 스스로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야’와 같은 생각을 마음속에 심어야 한다. 본인을 가치 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존감이 향상된 뒤에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기 때문. 안 교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인식’이라고 말한다. “내가 남들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해야 합니다. 그런 사실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거든요. 이런 인지 과정이 없으면 변화를 시도하기조차 어렵기 때문이죠.”
인식 단계 후에 자존감에 변화를 주는 방법은 개인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다. 책, 영상, 종교, 일상생활에서의 경험 등 특정 계기를 통해 의미 있는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상담 등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전문가에게 이 과정을 맡기면 한결 수월해진다. 법적인 문제를 변호사와 함께 풀어나가듯 말이다.
한편, 앞서 말한 것처럼 과도한 스트레스가 유발하는 우울증이나 불안 등의 정신건강의학과적 증상들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증상을 질병으로 규정하는 데는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는지에 따라 판단한다. 만약 무기력증으로 학교나 직장 생활을 하기 어렵거나, 대인 기피 증상 또는 분노 조절 어려움으로 대인관계가 힘들다면 빠른 시일 내 전문가와의 상담을 권한다. 이런 증상들이 동반되면 의미 있는 심리적인 변화 및 성장이 더욱 어렵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평소에 운동을 꾸준히 하거나 취미 생활을 하는 등 일상생활을 통해 스트레스를 완화할 수 있다. 특히 지속적인 운동은 비약물학적 치료 중에서 가장 효과 있는 방법 중 하나로 많은 연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외모 스트레스
타인으로부터 노출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 중 하나는 외모다. 우리는 내적 자존감이 떨어지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외적인 요소들로 대체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외적인 요소는 집, 차, 옷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외모에 신경 쓰며 살아간다. 사회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외모가 일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오히려 외모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간주된다). 이렇게 외모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결국 사회 생활, 이성과의 관계 등에 있어 본인 스스로 더욱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서다. ‘적당한’ 외모 가꾸기는 내 생활을 더 윤택하게 해주는 데 도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외모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건강에 해로울 정도의 무리한 다이어트를 지속한다든지, 지나친 성형 시술과 수술을 반복한다든지, 외모 평가에 대한 집착 때문에 외모를 가꾸는 것이 더 이상 나에게 행복을 주는 수단이 아니라 스트레스와 괴로움을 주는 대상이 되어버렸다면 문제가 된다. 만약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외모 관리를 지속하고 있다면, 이를 인지하고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심리적인 문제들로 인해서 자존감이 떨어졌거나 남의 시선과 평가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며 외모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어디까지 왔나?
달라진 것은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메이크업을 하지 않을 자유는 물론, 내 눈에만 예쁘면 상관없다는 듯 이전과는 다른 과감한 메이크업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또 젠더리스와 같은 트렌드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최근의 분위기는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 아닐까? 문화적인 변화, 즉 암묵적인 사회 규범들이 줄어들고 다름에 대한 관용의 폭이 넓어진다면 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개인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자율성이 커지는 것을 느끼면서 자존감과 자기 가치를 회복하는 데 직간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고, 나아가 세상을 자유롭게 바라보는 쪽으로 변화할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