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만지고, 바라보고 싶은 바이닐이지만 구해야만 내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음악을 소환하고 싶은 시대일수록, 갖고 싶은 건 따로 있다. 듣고, 만지고, 바라보고 싶은 바이닐이지만 구해야만 내 것이다.

<화양연화 OST>

왕가위 영화의 주제를 한 단어로만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마땅히 ‘기억’이 되어야 한다. 다소 멀리 돌아야 하는 <동사서독>, <일대종사>와 달리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라는 분명함이 있었던 <화양연화>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영화가 되었다. <일대종사>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데보라의 테마’를 사용하고, <중경삼림>에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사용하듯, 왕가위 감독이 기존 곡을 선곡하는 것을 오히려 선호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화양연화>의 대표적인 곡으로 1962년 홍콩 남녀의 망설임과 숨겨진 격정을 담은 듯한 ‘Yumeji’s Theme’ 역시 오리지널 스코어가 아닌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1991년작 영화 <유메지>를 위한 곡으로, 록밴드 EX의 리더로 백드 해체 후 영화 음악가로 활동 중인 일본 뮤지션 우메바야시 시게루가 작곡했다. 우메바야시는 이때의 인연으로 <2046>에서 메인 테마 등 여러 곡을 작곡했다. 극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며 영화의 제목이 되기도 한 주선의 ‘화양적연화’ 외에도 ‘Quizas, Quias, Quizas’를 비롯한 냇 킹 콜의 재즈 넘버가 흐른다. ‘Quizas’는 ‘만약에’라는 뜻으로, 배우자가 있는 서로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피날레를 장식한 바이올린과 첼로의 듀오곡인 ‘Angkor Wat Theme’는 마이클 갈라소가 영화를 위해 작곡했다. 바이닐은 출시만 했다하면 열화와 같은 성원 속에 품절되곤 한다.

<Survive> G. Yoko

요시모토 나라는 작년 12월 11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새로운 작품 하나를 올리면서 이렇게 적었다. ‘아직 제목 없음. 아마도 ‘분홍 물의 소녀’ 또는 ‘분홍 강’ 또는 ‘마가렛을 든 소녀’ 아니면… (No title yet. Maybe “Girl in Pink Water”or “~Pink River” or “Girl with a Margaret in Her Hand” or…)’ 추후에 밝혀진 바, 이 사랑스러운 작품은 평소 친분이 있었던 일본 뮤지션 지 요코(G. Yoko)의 앨범을 장식하게 된다. 지 요코는 일본에서도 이국적인 섬으로 유명한 오키나와현 이시가키섬 출신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를 쓰고, 기타를 치며, 곡을 만들기 시작한, 일본에서 주목하는 뮤지션이다. 어머니의 투병 생활을 곁에서 지켜보며 좋아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녀는 앨범의 제목을 ‘Survive’로 정했다. 이국의 섬이라는 인상처럼 밝고 안락하고 따뜻하며, 동시에 삶의 열망과 록 스피릿이 느껴지는 곡을 담은 이 바이닐은 김밥레코즈에서 특별 예약판매를 진행했고, 현재는 예약이 마감된 상태다.

<Di Doo Dah> 제인 버킨

버킨백의 주인공이 아닌, 영국인으로서 프렌치 팝의 대표적인 아이콘이 된 제인 버킨의 시작을 알린 데뷔 솔로 앨범. 라이너 노트에는 제인 버킨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영국의 신예 아티스트로 주목받던 제인 버킨은 1968년 세르주 갱스부르를 만나게 되고, 1969년 발표한 듀엣 앨범 <Je T’Aime… Moi Non Plus>는 침대에서 녹음을 했다는 식의 외설 논란을 낳을 정도로 센세이션이었다. 이후 <Di Doo Dah>는 제인 버킨의 솔로 앨범으로, 알 수 없는 감탄사인 ‘Di Doo Dah’가 계속 이어진다. 무슨 뜻이냐고? 제인 버킨에 따르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앨범 이후로도 제인 버킨은 더없이 열정적인 삶을 살았고, 2013년엔 한국에서 내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공연을 마칠 무렵 관객을 향해 그녀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돌봐야 한다며 당부했다. 나는 지금도 제인 버킨의 음악을 즐겨 듣는데, 그 목소리를 들을 때면 더없이 뜨거운 삶을 산 한 멋진 여성의 응원을 듣는 것만 같다.

<이문세> 4집

레코드숍에서 이 레코드를 봤을 때는 그야말로 전율이 흘렀다. 마치 홍차에 찍은 마들렌을 맛본 것처럼 시간은 구겨지며 나를 과거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귓가에 어린시절 일요일마다 들려온 노래가 울려 퍼졌다. ‘새처럼, 깊은 밤을 날아서…’ 이 앨범은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당신의 ‘전축’에 올려놓곤 했던 바로 그거였다. 이선희, 비틀스, 패티 김, 변진섭 사이에 있었던 노란 아저씨는 바로 이문세였던 것. 아버지가 고른 노래를 들으며 노래를 알았다. 그때는 앨범 제목이라는 것도 없었다. <이문세> 뒤에 숫자만 붙으면 되었다. 1987년 발매된 이문세 정규 4집은 3집과 이후의 5집과 함께 1980년대 최고 명반으로 꼽힌다. 특히 ‘콤비’라고 불릴 정도로 가수 이문세와 작곡가 이영훈의 조화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김광석이 기타리스트로 참여했고, 가사와 멜로디는 지금 들어도 너무나 세련되었다. ‘그女의 웃음소리뿐’이라는 제목이 ‘그녀의 웃음소리뿐’으로 변했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얼리어답터였던 아버지는 CD의 시대가 오면서 바이닐을 모두 버렸지만 바이닐의 시대는 다시 왔고, 좋은 노래의 생명력은 세대를 이어간다. 나는 우리 가족을 위해 다시 바이닐을 샀다.

    에디터
    허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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