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AFTER TIME / 고현정
견고한 시간을 지나 시대의 아름다움으로 채워진 배우 고현정. 그녀와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쇼파드가 함께한 12월을 위한 날. 그 호탕한 웃음과 명징한 몸짓과 선명한 눈빛을 함께 담았다.
새벽 1시, 비로소 고현정과 마주한 곳은 메이크업실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조금 전까지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도구가 가득했던 테이블은 어느새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지만 거울을 두른 동그란 전구들은 여전히 그를 밝히고 있었다. 더 조용하고 은밀한 공간도 있었지만 그는 이곳이 가장 편해 보였다. 어느 촬영장이든 그 시작은 배우가 메이크업실에 앉는 것으로 시작하기 마련이고 그때 메이크업실은 배우의 아늑한 셸터이다. 그렇기에 나는 고현정이 자신의 공간에 초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의자를 당겨 여느 셀러브리티보다 더 가깝게 나와 마주 앉았기에 눈동자까지 선명히 보였다. 인터뷰는 질문과 답으로 이루어지지만, 그녀는 마치 티타임을 가지듯 대화를 했고 자주 웃었다. 많은 일에 호기심을 나타냈고, 그럴 땐 오후 2시의 사람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세상 사람들은 고현정을 궁금해한다. 그가 어떤 작품을 선택했는지, 무엇을 먹는지, 바르는지…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고현정도 그렇다. 여전히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투성이다. 세상을 닮은 드라마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닮은 인물에 매번 푹 빠져 연기를 하는 이유다. 그것이 고현정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인 것 같았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를 건네며 그가 일어서자 아무도 없는 메이크업실의 고요한 공기가 그를 배웅했다 .
새벽 1시가 넘었는데도 별로 피곤해 보이지 않는 건, 정신력일까요?
약간 그런 것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힘들어하면 다 힘들어하니까.
주인공의 삶이 그런 것 같아요. 누구보다 힘을 내야 하죠.
이제는 주인공 비슷한 역할로 가고 있어요.(웃음) 예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저는 완벽하게 제가 주인공인 작품을 한 적은 없어요. <엄마의 바다>도 <모래시계>도 그렇고 미실도 주인공이 아니었고 <대물>이나 <히트>도 그랬고요.
기회가 닿는다면 이른바 ‘원톱 드라마’를 해보고 싶은가요?
지금은 좀 힘들어서 신 많은 거는 안 하고 싶어요. 주인공은 신이 많으니 별로 하고 싶지는 않은데, 예전에는 했을 법도 한데 없었던 것 같아요.
실제 주인공은 아니었을 수 있겠지만 모든 작품의 인상은 언제나 주인공이었어요. 어린 시절 본 <작별>의 장면도 여전히 강렬하거든요. <모래시계> 드라마를 TV로 본 세대죠, 저는. 요즘 Z세대는 유튜브로 보지만.
유튜브에 그 작품들이 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걸 봐요?
사람들이 원한다면 작품의 전부는 아니라도 클립은 다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봐도 당시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배우였음에도 정말 배우다웠어요.
제가 그랬어요? 배우였기에, 연기를 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싶어요.
배우는 현장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그런 것 같아요. 이제 배우는 현장에서 완성되는 것 같아요. 작품을 안 할 때의 저는 그냥 백수 같고, 특별히 제가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요. 촬영장 가서 의상 입고 분장 받고 그러면서 ‘액션!’ 하면 그때부터 배우가 되지요.
한 음절 한 음절이 귀를 뚫는 것 같은 명료한 발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아요. 요즘은 안 그런 배우도 많죠.
저는 리얼리티를 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말할 때 대사처럼 안 하잖아요. 그래서 연기할 때도 생활대사 같은 건 좀 그렇게 해야 하지 않나, 들리기만 하면 되지 하고 생각했는데 다음 작품 할 때는 아무래도 대중분들이 해주신 이야기를 귀담아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방송 중인 <너를 닮은 사람>에서는 희주를 연기하고 있죠. 희주는 나른하게 말하고 한 박자를 쉬어요. 본심을 숨기는 사람이니까요.
맞아요. 희주는 생각할 게 많아서, 지금 말하는 게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발목을 잡지는 않나 항상 생각해야 하는 인물이에요. 그걸 계산해서 연기했는데 잘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안 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서 아쉬워요.
희주는 일상생활에서 연기를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연기를 하는 희주를 또 연기를 하는 배우인 거죠.
그래서 ‘고현정 연기가 너무 인위적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잘하고 있는 건가 생각도 들었다가 왔다 갔다 해요.(웃음)
원작이 된 소설은 아주 짧아서 드라마는 많은 부분이 창작되었죠. 그러면서 창작의 여지가 더 많이 생긴 것 같아요. 작품의 어떤 면이 흥미를 끌었나요?
유보라 작가님의 글로 대본이랑 시놉시스를 받았어요. 임현욱 감독님도 입봉작이기 때문에 작가님의 대본만이 유일한 근거였죠. 대본이 드라마 대본 같지 않고 문학 작품 같았어요. 틈이 있었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뭔가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대본을 받았을 때 저는 자유롭고 싶은 때였어요. 또 다른 이유는, 복잡하지만 멜로잖아요. 멜로를 언제 또 해보겠나 했죠. 후회하기 전에 해보자,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극중에 해원(신현빈)의 시점이 많았던 것도 좋았어요.
그건 어떤 면에서 이유가 되었어요?
저는 이 드라마는 해원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해원의 시점이 많고 저는 해원의 행동에 리액션을 하는 장면이 많죠. 제 대사에는 큰 의미가 담기지 않아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뭐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는 대사를 하죠. 받쳐주는 역할이란 게 좋았어요. 그래서 저는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지금까지 없던 캐릭터이죠, 희주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거나, 뻔뻔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인물이에요. ‘사랑받지 못할 캐릭터’잖아요?
단번에 알았죠. 희주는 제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의 인물이에요. 임자 있는 사람을 막 건드리잖아요.
드라마 속 인물이더라도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앞서기 마련이에요. 왜 사랑받지 못할 사람을 선택했나요?
저는 그게 재미있었어요. 다 모호하잖아요. 그런데 살아보면 대부분 다 그렇지 않나요? 다들 애매하고 뭔가 확실하게 자기를 밝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재밌겠다, 사람들이 지독하게 싫어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왜냐하면 어쩌면 ‘저거 내 얘기네’라고 할 수 있죠. <너를 닮은 사람>은 선과 악이 확실히 구분된 것도 아니고 드라마적인 재미 요소가 많은 것도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애매하게 있거든요. 그러니 보는 분들도 답답하죠.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 의미를 두었나요?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혹시라도 ‘우리 모두 그렇지 않나?’라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것만으로도 다른 어떤 드라마보다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 드라마가 방송되면서 ‘왜 거기서 그렇게 행동하나? 구해원이 왜 나빠, 정희주가 나쁜 거지. 정희주가 뭐가 나빠, 구해원이 더 나쁜 것 같아’라며 별별 얘기가 다 나오는데,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죠. 이게 다 우리의 모습이라고요.
거울 같은 드라마네요. 실제 삶에서는 답을 내리기 어렵고 좋은 쪽과 나쁜 쪽도 명확하지 않죠. 그러고 보니 원래 원작소설의 제목이 ‘실수하는 인간’이었죠.
‘실수하는 인간’이 주제를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생기면 다 그렇게 종적을 남기지 않고 이렇게 숨지 않나요? 뻔하지 않은 드라마라는 게 좋았어요. 자신의 모습도 생각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렇게 시작했어요.
원작을 쓴 정소현 작가가 이렇게 말했어요. “고현정은 내가 본 배우 중 가장 섬세하게 인물을 그려내는 사람이다. 내가 소설에서 그려낸 인물이 그녀일 수밖에 없음을, 그녀 이외의 그 누구도 아님을 확신한다. 나는 소설에서 막 걸어 나온 그녀를 멀리서나마 만날 수 있어서, 내가 동시대에 그녀와 함께 살아 그녀의 연기를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감탄하며 이야기하더라고요.
어머, 그런 말씀을 하셨나요? 어떡해…정말 감사해요. 그 말을 들으니 이제 된 것 같아요. 저는 정말 많이 고민하고 엄청 신경을 쓰면서, 잔물결을 타듯이 연기를 했어요. 원작자분이 그걸 봐주신 것 같아서 정말 감사해요. 뭉클하네요.
저 역시 정소현 작가의 말에 동의하는데, 고현정이라는 배우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즐거움이 있죠. 단순하게 말하면, 고현정이 나오는 작품은 다 보는 재미가 있어요.
이럴 때 정말 연기하는 보람을 느껴요. 좋다고 해주시는 분도 많은데…. 연기 오래 해야겠다….(웃음)
한 10년 전만 해도 여성 배우가 30대를 지나면 할 작품이 없다고 했죠.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40대에 전성기를 누리는 배우도 늘었죠.
이제 50대 초반이 애매하다고 그러더라고요. 예전보다 폭삭 늙지도 않아서 할머니 역할을 하기도 그렇고 커리어우먼 역할을 하기엔 좀 나이 먹었고요. 엄마 역할을 남편 역할을 정하기 어려워서 50대가 제일 어렵대요. 50대 중반이나 60대가 되면 더 편해질 거라고들 하시더라고요.
예전에 비해서 좀 흥미로운 작품이나 배역이 많이 늘어났나요?
저한테는 그렇지 않아요. 저는 ‘이런 것만 하고 싶어’라는 게 없어요. 어떤 작품이든 훌륭한 작품의 일원이 되고 싶거든요. 제 마음이 많이 알려지면 그 일원으로 좀 뽑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어요. 저를 두고 ‘이렇게 작은 역할을 하겠어?’라고 많이 생각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작은 작품의 큰 역할이 많이 들어와요. 그런데 작은 작품이든 큰 작품이든, 큰 역할이든 작은 역할이든 좋은 작품에 함께할 수 있다면 다 좋거든요. 그동안 실생활 연기를 많이 해서 장르적인 것도 많이 해보고 싶고, 특히 저는 미래의 이야기를 좋아해요. 그런 작품을 해보면 연기가 어떻게 다를까…그런 궁금증을 갖고 있는데, 못해봐서 하고 싶어요.
50대가 되면, 60대가 되면 또 어떤 역할을 할지를 기대할 수 있는 게 좋네요.
좋은 직업이라고 많이들 얘기하시는데 생각해보면 좋은 직업이 맞는 것 같아요. 자기 관리만 잘하고 건강 유지 잘하면. 아, 또 있네요. 사고 안 치면.(웃음) 그러면 계속 연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래 연기하고 싶다는 꿈을 꾸나요?
솔직히 말하면, 모르겠어요. 계속 하겠죠?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어요.(웃음)
여전히 대중은 고현정이라는 사람한테 관심이 많아요. 긍정적으로 보나요?
관심이 많다는 건 긍정적으로 봐야 할 부분인 것 같아요. 그게 좋은 관심이든 그렇지 않은 관심이든 이 직업을 택한 이상 그거는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소통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걸 보면 제가 많이 바뀌어야 되지 않나, 너무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반성도 해요.
적극적으로 소통해오지 않았나요? 인터뷰도 피하지 않고, 대중들이 궁금한 게 있으면 책을 써서 답을 해주기도 했고요.
인터뷰할 때도 그렇고 어디서든 저는 마음에 없는 말은 안 해요. 그러다 보니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거침없고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 상황에 변명을 하고 싶진 않아요. 다만 열심히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누군가 물어보는 분들이 있다면 답을 하고 그렇게 하죠.
소통에도 여러 방식을 취할 수 있는 시대죠. 어떤 방식을 선호해요?
저는 인터뷰만큼 좋은 소통이 없다고 생각해요. 클래식하죠, 인터뷰는. 제가 개인적으로 SNS에 하고 싶은 말을 쓸 수도 있지만 그런 것과 인터뷰는 결이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열심히 인터뷰해요. 이런 자리에서 진심으로 얘기하고, 그런 진심이 종이에 담기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요즘 잡지도 온라인으로 많이 본다고 하면 아쉽더라고요. 저는 뭐랄까, 지루한 게 싫거든요. 뭔가 말하려면 정확하고 확실하게 말하는 게 좋아요.
대중들이 항상 일거수일투족을 궁금하게 여기는 스타고 지금까지 온갖 물건이 ‘고현정 OO’라는 이름으로 바이럴이 되는데요. 사실이 아닌 것도 많죠?
하하! 몇 가지는 진짜예요. 나머지는 어디서 나오는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게 관심의 증거죠. 제 친구는 <고현정의 결>을 보고 차 안에서 10년째 히터를 안 틀어요.
그건 여러 가지로 좋아요! 저는 히터를 거의 안 틀고 겨울에는 집에서 내복 입고 있어요. <고현정의 결>에 나온 내용은 다 맞아요.
그래서 그런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그 대사가 엄청 좋았어요. “내 얘기 영화에 쓰지 마요” 하다가 맘대로 하라고, 다 상관없다고 하죠. 홍상수 감독은 배우들이 평소 하는 말을 시나리오에 쓰기로 유명한데, 당신이 한 말 아닌가요?
맞아요. 저도 그 대사 좋아했죠. 해변에서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다고도 얘기했거든요. 여러 버전으로 테이크를 갔는데 그게 제일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제목 들어가서 그렇죠?’ 그랬어요. 오랜만에 생각나네요. “마음대로 해.”(웃음) 제가 그런 걸 좋아해요. 그게 문제인 것 같기도 해요.(웃음) 나는 바꿀 수가 없잖아요.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노력을 해야 하나 생각하는 거죠.
2021년의 시간도 다 흘렀네요. 지금은 11월 중순이지만 잡지의 시간으로는 이미 12월이니, 2021년이 끝나가네요. 어떤 해였나요?
저는 11월을 제일 좋아하거든요. 정말 좋지 않나요? 날도 살짝 쌀쌀해지고요. 12월에 크리스마스도 연말도 있죠. 이제껏 12월호 표지는 해본 적 없어서 지금 아주 기뻐요. 너무 멋진 달이니까. 2017년부터 2020년까지는 좀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2021년에 일도 열심히 하고, 화보도 이렇게 열심히 많은 잡지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약속한 대로 다 하고 올해 정말 열심히 산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 시즌에 열심히 해온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 있어요?
없어요. 아, 딱 하나 있어요. 집에다 항상 트리를 장식해놓아요. 매해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작은 전구일 때도 있고 전나무일 때도 있지만 항상 해요. 그게 저를 위한 선물이에요. 제가 이 계절을 좋아하니까요.
*본 기사에는 협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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