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RLS ON THE GROUND
“왜 못해요? 하면 다 되죠. 안 해봐서 그렇죠. 그동안 자의로든 타의로든 운동을 즐길 기회가 없었던 여성이 다양한 체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다이어트가 아니라 즐거움을 위한 스포츠로서의 운동을요.”
작년 여름부터 <골 때리는 그녀들>에 푹 빠졌다. 과몰입이 특기인 나는 수요일 밤마다 누가 골을 넣기라도 하면 그들과 함께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여기에 2020 도쿄올림픽으로 넘어가는 흐름까지 더해졌으니 팀 스포츠에 대한 로망을 갖기에 충분한 계절이었다. 함께 땀 흘리고 투지를 불태우다가도 서로를 다독이는 여성들을 보며 난생처음으로, 누군가와 같이 운동을 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두 개의 심장은커녕 10분 남짓을 뛰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사람이었고 그에 앞서 학창시절 피구와 발야구 외에는 어떤 팀스포츠도 해본 적 없는 순수한 운동 무경력자였다. 이런 나도 팀스포츠를 할 수 있을까?
목마른 사람이 판 운동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1년 넘게 망설이는 분도 많아요. 하지만 한번 와보면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깨달으세요.” 위밋업스포츠 신혜미 공동대표의 말이다. 위밋업스포츠는 모든 강사와 참여자가 여성으로만 구성된 여성 전용 스포츠 플랫폼이다. 사이트에 들어가면 다양한 종목의 스포츠 수업을 신청할 수 있는데 가볍게 원데이로도 신청할 수 있고, 대부분 기초 체험이 주를 이루어 해당 스포츠 경험이 전무한 사람도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처음 경험하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수업이다. 축구, 배구, 농구, 주짓수, 럭비, 야구, 패들보드 등 팀스포츠뿐 아니라 여성이 접하기 어려웠던 운동 종목이 대다수다. “처음에는 우리가 하고 싶은 종목 위주로 개설했어요. 이 운동 해보면 정말 재미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잘 모르니까 이 재미를 우리만 알기 아까워서요. 요즘은 회원들의 요구로 열리는 수업도 많아요. 디엠이나 문자, 게시판으로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배구도 올림픽 예선 때부터 원하는 분들이 워낙 많아서 개설된 거예요. 수업이 열리고 10분도 안 돼서 마감될 정도였어요. 지금은 스노보드와 스키 수업 오픈을 앞두고 있어요.” 양수안나 공동대표의 설명이다. 하지만 왜 꼭 여성 전용일까? 위밋업스포츠는 은퇴한 여성 선수의 경력 단절과 일반 여성들의 스포츠 경험이 부족한 환경에 대한 고민이 만나며 시작된 플랫폼이기에 그 방향성이 명확하다. “강사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놀라는 건 여성들이 이렇게까지 스포츠 경험이 없는지 몰랐다는 거예요. 대부분 국가대표 출신, 지도자 경력을 가진 강사로서 공을 차본 적 없는 여성을 만나면 놀라운 거죠. 언젠가는 자신이 키가 작아서 수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분도 있었어요. 왜 못해요? 하면 다 되죠. 안 해봐서 그렇죠. 그동안 자의로든 타의로든 운동을 즐길 기회가 없었던 여성이 다양한 체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다이어트가 아니라 즐거움을 위한 스포츠로서의 운동을요.” 신혜미 공동대표는 여성끼리 운동할 때의 장점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명확하다며 이어 말했다. “주짓수처럼 몸을 밀착시키는 운동을 생각해보세요. 여전히 주짓수를 배우러 가면 남자 강사와 남자 회원들이 주를 이뤄요. 누군가에게는 분명 부담스러운 환경이지 않을까요? 운동을 배우고는 싶은데 환경적인 조건 때문에 포기하는 여성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같은 여성으로서 어떤 게 불편하고 두려운지 알고 그에 맞춰 가르치는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성별이 같기에 편한 부분도 있겠지만, 사실 더 나아가서는 성인지 감수성의 문제예요. 저희는 모든 강사님에게 관련 교육을 하고 있고 누구든 차별하지 않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서로를 배려하며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은 이런 환경에 기반하는 거죠.” 양수안나 공동대표가 덧붙였다. 위밋업스포츠의 누적 회원수는 3천여 명이 넘어가고 있고 이날 열린 야구 수업도 금세 매진됐다. 자신이 원하는 운동을, 원하는 환경에서 도전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이렇게나 많다. “위밋업스포츠가 시작한 2018년에는 여성 생활체육인이 운동할 수 있는 장소나 대회가 거의 없었어요. 없으면 우리가 만들자, 했던 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고요. 요즘은 여기저기 비슷한 플랫폼이 많이 생기는 게 보여요. 꼭 플랫폼을 통하지 않더라도 개인이 마음 맞는 사람을 모아서 강사를 직접 섭외하기도 하고요. 저희 쪽에 강사 파견을 요청하는 분들도 있는데, 여건이 맞으면 최대한 진행하려고 해요. 벌써 몇 팀은 그런 식으로 정규 축구 수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양수안나 공동대표의 말이다.
그라운드 위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퇴근 후 마천 풋살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회당 3만원, 한번 해볼 만한 가격이라 충동적으로 신청했다. 신청 다음 날 뭘 입고 뭘 신고 갈지 갈피도 잡지 못하는 내 마음을 훤히 아는 듯한 안내문자가 왔다. 풋살화나 축구화가 있다면 신고 오는 게 좋지만 일반 운동화라도 상관없고, 복장은 운동하기 편하면 다 괜찮다는 것. 개인 물을 지참하라는 것. 수업시간인 7시가 다가올수록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 긴장 뒤에는 자꾸 잘하고 싶어 하는 내가 있다는 걸 알고 조금 웃겼다. 축구공을 제대로 차는 것도 처음이면서 뭘 그렇게 하려고 하는 걸까. 못하면 어떻고 잘하면 뭐하나? 그렇게 생각하니 울렁이던 가슴도 이내 잠잠해졌다. 그날은 나를 포함해 총 11명이 참가했다. 비슷한 나이대로 대부분 혼자 온 사람들이라 서로 데면데면하게 인사를 나눴다. 반은 공을 한두 번 정도 차봤고, 나머지 반은 아예 축구가 처음이라고 해 내심 안심이 됐다. 준비운동을 하고 드리블, 인사이드와 아웃사이드, 패스, 슈팅까지 차례로 공과 친해지는 시간이 이어졌다. 처음 차보는 공은 생각보다 민감해 조금만 힘을 주어도 저 멀리 도망갔고, 발끝까지 쭉 펴서 발등으로 공을 차는 슈팅 자세는 써본 적 없는 근육을 자극해 종아리가 땡땡하게 당겼다. 강사인 양수안나 공동대표는 거듭 크게 움직일 것을 강조했다. “틀려도 되니까 뻥! 차보세요. 제 눈치 보지 마세요. 이건 평가나 시합이 아니잖아요. 못하는 게 당연해요. 그래야 제가 벌어먹고 살죠!” 농담 섞인 강사의 말에 웃음이 터졌고, 우리의 몸짓은 한결 과감해졌다. 첫날이지만 팀을 나눠 미니 게임까지 진행했다. 그렇게 숨이 차도록 뛰고 정신없이 부딪히고 소리지르며 달린 것은 어린 시절의 ‘얼음땡’ 이후 처음이었다. 공 하나를 두고 11명의 다 큰 여자들이 30분을 신나게 놀았다. 처음 맛본 공의 맛, 팀의 맛, 스포츠의 맛이었다. 심장 박동이 190bpm에서 좀체 내려가지 않는 흥분상태에서 두 시간 전의 어색한 인사는 다 잊고 서로 얼싸안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실제로 이곳에서 만나 친구가 되어 스포츠 경기를 직관하러 가거나 자체적으로 팀을 이루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0℃의 추운 겨울밤이었지만 겉옷 없이 30분을 걸어도 멀쩡했다. 집에 도착해서야 시큰한 정강이가 느껴졌다. 한눈에 봐도 시퍼렇게 멍이 번져 있었다. 언제 차인 것인지도 모를 멍을 훈장이라도 되는 듯 쓰다듬었다. 여자애 다리가 그게 뭐니, 흉이라도 지면 어떡하니, 크게 움직이고 몸에 상처가 생길 때마다 덫처럼 마음에 걸렸던 말들이 이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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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정지원
- 포토그래퍼
- KIM MYUNG J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