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순간 / 고은성
뮤지컬 배우 고은성은 무대에서 매일 다른 순간을 마주하고, 매번 다른 자신이 된다.
오는 길에 보니 꽃이 벌써 다 피었어요. 꽃구경 좀 했어요?
제대로 구경 하지는 못했어요. 가끔 차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보는 정도예요. 그래도 이제 공연에 들어가서 연습 때보다는 여유로워진 편이죠. 공연 없는 날은 여가를 보내거나 오늘처럼 다른 일정을 보죠.
지난주 뮤지컬 <데스노트>가 개막했어요. 야가미 라이토 역에 새로운 캐스트로 합류했죠.
초연 때부터 이어진 파워가 있는 작품이에요. 참여하게 된 게 감사하죠. 막상 첫 무대에 서니 생각해야 할 게 진짜 많았어요. 무대가 경사가 있어서 그냥 왔다 갔다 하는 동선도 사실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테니스도 해야 하고요. 아직은 익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계속 긴장을 놓지 않으려고요.
고은성의 라이토는 어떤 사람인가요?
간단히 말하자면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을 법한 소시오패스적인 면을 부각시키려고 했어요. 철저히 가면을 쓰고 추악하게 벗는 순간을 중심으로요. 주변 사람들은 라이토가 올바르고 반듯한 사람이라고 말해요. 그런데 완벽해 보이는 인물일수록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부족한 면이 있기 때문에 그걸 숨기며 일부러 더 완벽한 모습인 척하는 거죠. 욕망과 필요에 따라 가면을 쓰고 벗을 때, 그 갭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원작이 유명한 만화잖아요. 원작의 라이토와는 좀 다른가요?
원래의 긴 이야기와 무대 위에서 두 시간 동안 보여지는 이야기는 다를 수밖에 없거든요. 원작에서는 상대역인 엘이 서사의 과정일 뿐이에요.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엘이 과정이 아닌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라이토는 엘을 없애는 걸 목표로 삼고 달려가야 해요. 그 욕망이 무대에서 강하게 보여지길 원했어요. 무대에서는 욕망이 커질수록 재밌잖아요.
인물을 무척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것 같아요. 연기할 때 어떤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하나의 방법을 정해놓고 방법론적으로 분석하진 않고, 이것저것 되는 대로 다 해보는 것 같아요. 하지만 결국 배우는 행동하는 사람이거든요. 분석하고 해석하는 게 연기의 전부라면 공부 잘한 사람들이 연기를 제일 잘해야겠죠. 무대에 서는 사람은 생각하고 분석한 걸 몸으로 표현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최대한 다양한 생각을 갖고 연습실에서 직접 해보고 조금씩 조금씩 그 행동들을 모으는 게 중요해요.
행동이란 말이 주는 일시적인, 순간의 이미지가 재밌네요.
무대가 그래서 재밌어요. 그날그날 이 사람, 저 사람이 주는 호흡이 다 다르거든요. 그것들에 따라 나도 또 달라지고 그래요.
상대역인 엘과의 호흡이 중요한 극이에요. 김준수 배우와 김성철 배우의 엘은 확실히 다른가요?
각각 다른 모습은 맞지만 ‘준수 형은 이렇고, 성철이는 이렇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어요. 같은 사람과 무대 위에서 부딪혀도 흥미롭고 새로운 순간이 많이 벌어져요. 무대에 오를 때 전 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요. 엘이 어떤 인물인지 제가 알 필요도 없고, 얘가 어떻게 나에게 다가올지 몰라도 돼요. 왜냐하면 몰라야 재밌거든요. 그게 진짜 라이토의 모습일 거니까. 모르기 때문에 알아가고 싶어서 만나게 되는 순간들. 그 순간을 목격하기 위해 극장을 찾아주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동료로서 두 사람은 어떤가요?
준수 형은 <내일은 국민가수>에서 먼저 만난 적 있는데, 제가 오랜 팬이었어요. 아이돌이 아니더라도 뮤지컬 배우 김준수로서 하나의 아이콘이잖아요. 저는 사실 그거 진짜 어마어마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연습실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진짜 충격적이었어요. 공연장에서는 더더욱 그렇고요. 보고 많이 배워요. 성철이랑은 20대 초반부터 친했는데 같이 공연하는 건 처음이에요. 오랫동안 안 만큼 눈만 봐도 서로 알 수 있는 호흡이 있어요. 둘 다 뉴캐스트라서 같이 작품 얘기도 많이 하고 있어요.
본인이 데스노트를 줍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 같나요?
그냥 바로 뒷산에 묻을 거예요.
아주 단호하네요. 스스로를 믿는 편이에요?
그렇진 않아요. 항상 의심하고 지금 하고 있는 게 맞나, 더 다른 게 있나 계속 찾으려고 하는 타입인 것 같아요. 지금은 여러 경험을 해온 만큼 어느 정도 저에 대해 알게 됐고요.
뮤지컬 외의 다양한 방송 활동을 해온 것도 그런 이유였겠군요.
사실 도전을 안 할 수도 있었겠죠. 아무것도 안 하고 뮤지컬만 해도 지금 이 자리까지 왔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가 걸어온 삶이니까 도전에 대해서는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재밌었고 오히려 더 많은 기회를 얻기도 했고, 스킬도 배웠어요. 하지만 앞으로 그런 기회가 생길 때 또 해볼 거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에요.
단호하네요.
당분간은 뮤지컬 외에 다른 도전은 하지 않을 계획이에요. 제가 조금 아픈 때가 있었는데, 사람이 몸이 아프니까 결국 본질적인 걸로 돌아가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난 뭘 할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지? 전 뮤지컬 할 때가 제일 행복하더라고요. 그 뒤론 누가 뭐라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걸 하자 생각했어요.
뮤지컬의 어떤 점을 그렇게 사랑해요?
흔히 뮤지컬스럽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걸 너무 사랑해요. 뮤지컬이라는 장르, 뮤지컬 음악이 갖는 뮤지컬스러움이 있어요. 음악 안에 어떤 세상이 느껴지는, 방대한 이야기가 담긴 것 같은 느낌이요. 크로스오버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에요. 너무 좋은 거에는 이유가 없어요.
작년에는 솔로 앨범도 내고, 단독 콘서트도 했죠. 어떤 경험으로 남았어요?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계속할 생각이에요. 제 이야기를 담은 곡인 ‘스타트 오버’를 포함해서 솔로 앨범에 수록된 곡들도 다 뮤지컬 음악이에요. 이런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뮤지컬 배우도 앨범을 낼 수 있잖아요. 뮤지컬 배우인 만큼 내가 무대에서 겪은 것들을 토대로요. 누군가는 그 음악을 듣고 공연을 찾아올 수도 있겠죠? 계속 뮤지컬에 관한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어요.
전역 이후 쉬지 않고 무대에 올랐어요. 마음에 남는 작품이 있나요?
<데스노트>는 지금 하고 있으니 제외하고, <헤드윅>이요. 당시 회차가 적어서 한 회 한 회가 소중한 상황이었어요. 지방 마지막 공연 때 관객분들이 기립해서 박수를 쳐주셨는데 코로나 상황에서 너무 오랜만에 받아본 기립이라 감동적이었어요. 힘들었을 때라 더 기억에 남는 것도 있고요. 건강이 안 좋기도 했고, <헤드윅> 자체가 쉽지 않은 공연이어서 불안하고 고민이 많았어요. 거의 2시간 동안 혼자 나와 있는 시간이 많은 작품인데, 자칫 제 행동으로 캐릭터를 훼손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돌이켜보면 그 아슬아슬함이 작품과 맞아떨어지기도 했지만요. 고민이 많은 만큼 배운 것도 많았죠.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나요?
그런 거 없어요. 이제 진짜 없어요.
주어지는 대로, 할 수 있는 걸 할 건가요?
아뇨. 할 수 없는 걸 하고 싶어요. 너무 내가 할 것 같은 역할 말고요. 물론 저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있지만, 아닌 역할을 맡을 때 사실 더 재밌게 할 수 있는 게 많아요. 기존 작품에서 고른다면 왠지 너무 노림수가 될 것 같고.(웃음) 아직 우리나라에 안 들어온 작품 중에서는 슈렉을 하고 싶네요. 진짜 인형탈 안에 들어가서 분장하고 하거든요.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요즘 어떤 음악 들어요?
가사 없는 음악이요. 예를 들면 색소폰 연주라든지. 틀어드릴게요.
신나는 음악이었네요? 막연히 잔잔한 걸 생각했어요.
비트가 있는 걸로 운전할 때 들어요. 원래 뮤지컬 음악이나 팝송, 샹송 다양하게 듣는데 요즘은 이런 음악이 좋아요. 음악에 가사가 있으면 자꾸 가사를 따라가게 되잖아요. 그런데 가사가 없으니 내 상상력을 담을 수 있는 부분이 많아요. 그게 재밌어요.
촬영 중 순댓국밥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꽤나 진심인가 봐요.
인터뷰 끝나고 오늘도 먹으러 가려고요. 청담동 순도리. 거기 진짜 맛있어요.
최신기사
- 에디터
- 정지원
- 포토그래퍼
- CHA HYE KYUNG
- 스타일리스트
- 황모세, 김나영
- 헤어
- 배경화
- 메이크업
- 장소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