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래로 / 주니

한 걸음씩 차근차근. 제 속도로 걸어 오늘에 다다른 주니가 흥얼거린다. 몸에 꼭 맞는 노래를 입고.

프린트 티셔츠와 재킷, 팬츠, 슈즈는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카키 컬러 패딩 베스트와 재킷, 이너 톱은 모두 지방시(Givenchy).

레드 재킷과 셔츠, 팬츠, 타이는 모두 구찌(Gucci), 슈즈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블랙 니트 톱과 팬츠, 벨트, 네크리스는 모두 생 로랑 바이 안토니 바카렐로(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슈즈는 프라다.

올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 만났네요.
제가 해외 공연 일정 때문에 8월 말쯤 출국했다 엊그제 귀국했거든요? 그사이 갑자기 겨울이 된 것 같아 너무 당황스러워요, 지금.(웃음) 그래도 재밌었어요. 이렇게 스튜디오 밖에서 촬영하는 건 오랜만이거든요.

사진 촬영하는 내내 자신 있는 애티튜드를 보여주다가 영상 인터뷰가 시작되니 급격히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사진은 그래도 덜한데 영상은 여전히 쑥스러워요. 노래와 관련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불러달라고 할까 봐 긴장했는데 아니나 다를까….(웃음) ‘그래도 해내야지’ 하면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인터뷰하는 건 어때요?
인터뷰하는 건 정말 좋아해요. 어떻게 보면 처음 만난 사람과 나를 주제로 얘기하는 건데 딱히 거리낌이 없어요. 말이 많은 편인 데다 제 얘기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자꾸 다른 길로 새서 문제지만요.(웃음)

8월 첫 정규 앨범 발매에 이어 유럽 공연과 9월 초 미주 투어까지. 데뷔 후 처음 받은 선물 같은 일 덕분에 바빠도 기분은 엄청 좋았겠네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요?
다시 열심히 작업하고 있어요. 얼른 새로운 투어를 시작할 이유를 만들어야 하거든요. 데뷔하자마자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늘 카메라 앞에서만 노래를 불렀어요. 이렇게 팬들의 얼굴을 직접 보면서 환호와 사랑을 온몸으로 느낀 건 처음인 거죠. 무대 위에서 내 노래로 팬들과 만나는 게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 이제야 알게 됐어요. 황홀했고요.

꿈처럼 황홀한 시간 뒤에는 공허함이 남기도 하잖아요.
지난 두 달은 공연에 대한 갈증을 제대로 해소해준 시간이어서인지 다행히도 벅찬 행복감만 남아 있어요.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9월 중순 미주 투어를 끝내고, 2주 동안 가족이 머무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시간을 보냈거든요. 일 생각은 제쳐두고 최대한 가족과 함께하는 데 집중했더니 리프레시가 되더라고요.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가고, 날씨 좋을 때 산책하고, 같이 사진 찍는 거 있잖아요. 정말 소소한 건데 멀리 떨어져 있으면 절대 못하는 거. 오랜만에 자연스러운 일상을 가족과 함께해서 진심으로 행복했어요.

얘기하는 표정에도 행복이 묻어 있네요. 한국에 온 뒤로 이렇게 긴 시간 가족과 함께한 건 처음인가 봐요?
맞아요. 그래서 느끼는 바도 많았고요. 한국에 온 지 3년 반쯤 됐는데 그사이 제가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조금은 성숙해진 것 같고요. 대화의 주제도 달라진 데다 무엇보다 형들과 부모님이 하는 말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형들이랑 나이 차가 일곱 살, 열한 살씩 나거든요. 마냥 귀여움만 받던 막내였는데, 이제는 가족들도 저를 어엿한 어른으로 인정해주는 느낌이었어요.

무엇이 스스로를 변화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일차원적으로는 환경의 변화가 가장 크겠죠. 네 살부터 밴쿠버에서 살다 대학 졸업하고 혼자 한국에 온 거니까요. 자연스레 저한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확보했어요. 덕분에 음악적으로뿐 아니라 김형준이라는 사람의 삶과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의 기준을 확실히 알게 됐으니까 긍정적 변화라고 생각해요.

나다운 게 뭔지 알아가는 중인가요?
정확해요. 그런 점에서는 이번 정규 앨범 준비도 큰 역할을 했어요. 할 수 있는 것이 무한대인 상태에서 시작할 때의 막막함을 뚫고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뾰족한 콘셉트를 찾는 과정이었으니까요. 내가 어떤 장르를 만들 때 제일 행복한지, 어떤 스타일링을 할 때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넓고 깊게 고민한 결과를 담았어요. 길고 힘든 여정이었던 만큼 나라는 사람의 깊이가 더 깊어진 것 같아요.

그렇게 만들어낸 첫 번째 정규 앨범 <blanc>에는 주니의 20대 초중반의 이야기가 녹아 있죠. 자연스럽게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을 것 같은데 어땠어요?
울컥했어요.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정말 많은 사람의 수고 덕분임을 다시 한번 알게 됐거든요. 저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간의 시간을 차곡차곡 음악으로 기록했으니까요. 제 얘기를 순전히 말로만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음악이라는 수단을 쓰면 가족에게든,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든 하나의 예술로서 부끄러움 없이 솔직하게 전달할 수 있죠.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마음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에 와서 꾸준히 음악을 해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한 것 같아요.

서두르거나 늦지 않게, 제 속도를 잘 지키며 온 것 같아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걸 보니 지금의 속도도 좋은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조급함은 쉽게 생기지만 그럴 때일수록 기억할 마인드 셋이 있어요. 차근차근. 스텝 바이 스텝. 할 수 있는 걸 조금씩 꾸준히 하는 게 저한테 맞는 방식 같아요.

블랙 점프슈트는 릭 오웬스(Rick Owens), 이너로 입은 풀오버와 아우터, 부츠는 모두 프라다(Prada).

브라운 코트와 이너로 입은 재킷은 보테가 베네타, 네크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크림 컬러 풀오버는 펜디(Fendi), 이너로 입은 스트라이프 패턴 톱과 데님 팬츠는 로에베(Loewe), 슈즈는 에르메스(Hermes).

작곡가로서, 그리고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아티스트로서의 활동에 균형을 이룬 덕에 갖게 된 여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 그런 것 같아요. 균형이 주는 안정감이 있으니까요. 작년까지만 해도 제 음악보다 다른 아티스트와 작업을 많이 했어요. 정말 즐거웠던 동시에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사실 제 음악으로 팬들과 교감하고 퍼포밍하는 일이 주는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죠. 그런 점에서 올해 아티스트로서 보여준 제 행보가 에너지를 충전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한국에서는 아이유, NCT 등 다양한 뮤지션과 협업한 작곡가로 주니의 이름을 알게 된 이들도 적지 않아요. 이런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런 루트로 저를 알게 되었다는 건 제가 만든 노래가 마음에 들어서 굳이 크레딧을 찾아봤다는 얘기잖아요. 실제로 그렇게 제 음악을 찾아 듣고 팬이 되었다는 분들도 봤고요. 신기하고 감사하죠. 다른 아티스트의 곡 작업을 했는데, 그 아티스트의 팬 사이에서 반응이 좋을 때. 그게 그렇게 흐뭇하더라고요?

작업물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찾아보는 편이에요?
한 번씩 궁금할 때요. 요즘엔 리스너들이 음악을 똑똑하게 즐기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함께 작업하는 스태프까지도 궁금해하면서 아티스트로서 그 사람이 지닌 자질과 환경을 폭넓게 이해하려 하죠. 아티스트의 행보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이고 응원해주는 한국의 팬덤 문화가 참 좋아요.

노래방 애창곡으로 고른 곡이 의외던데요? 김범수의 ‘보고싶다’, 휘성의 ‘안되나요’ 같은 2000년대 초반 한국 발라드를 꼽을 줄은 몰랐거든요.
어릴 적부터 들은 음악의 힘이 세더라고요. 형들이 한국 가요를 많이 들려줬거든요. 내면 깊숙한 어딘가에 그때의 감성이 남아 있어요.(웃음) 그렇게 한국 가요를 들으며 자란 시간이 지금 음악 작업을 하는 데도 도움이 많이 돼요. 케이팝이라는 장르도 결국 한국 가요를 기반으로 변화해온 거니까요. 형들 덕에 제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어진 셈이죠.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뭐예요?
지금의 긍정적 마인드와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거요. 대중에게 저를 어떻게 어필할 수 있을지를 늘 고민해요. 아티스트로서 파급력이 있고 아이코닉한 존재가 되는 건 단순히 유명해진다고 될 일이 아니니까요. 늘 골똘히 고민하며 방향을 찾아갈 문제죠.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어떤 미래를 그렸어요?
이건 제 성격인데 애초에 먼 미래를 내다보려고 하지 않아요. ‘뮤직비디오 찍기’처럼 비교적 실현 가능성이 높은 가까운 목표만 세우는 편이죠. 역시 차근차근 마인드를 되새기면서요. 그러면 작은 성취감일지라도 지속적으로 맛볼 수 있을 거고, 그렇게 해야 끈기 있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최근 목표는 해외 투어였는데,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이뤘네요.

그럼 단기적 목표를 물어볼게요. 2022년이 이제 100일도 안 남았어요. 연말까지 어떻게 보내고 싶어요?
일단 2022년은 제게 너무 만족스러운 해였어요. 돌아보니 제 곁에 있어줘서 감사한 사람들과 뿌듯한 작업을 많이 했더라고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고요. 함께 힘써준 친구들, 회사 스태프들이 너무 자랑스러워요.

방금 연말 시상식에서 들을 법한 수상 소감같았어요.(웃음)
하하. 근데 다 진심이에요. 보통 새해에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면서 파이팅을 외치잖아요. 저는 올 연말이 오기 전부터 파이팅 넘쳐버려서 큰일이네요. 여기서 의욕이 더 생겼다가는 너무 과해질 것 같아서.(웃음) 지금의 긍정적 에너지를 유지하기만 해도 좋겠어요.

한 해의 마무리, 혹은 새해의 시작에 의미를 두는 편이에요?
다른 날에는 크게 요동하지 않는데, 크리스마스는 예외예요. 다른 휴일, 생일 다 필요 없고 크리스마스가 제일 좋거든요. 올해 크리스마스도 벌써부터 기대돼요.

계획이 있어요?
가족을 볼 수 없으니 아마 친구들과 보내지 않을까요? 계획 없다는 말을 돌려서 해봤습니다.(웃음) 거창한 계획을 세워서 좋은 게 아니라 정말 이유 없이 설레고 기다려지는 날 같아요.

그럼 오늘의 추위가 반갑겠어요.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니 그렇네요. 오늘부터 캐럴 들어야겠어요.

    에디터
    레이몬드 채, 고영진(인터뷰 에디터)
    포토그래퍼
    JUNG JI EUN
    스타일리스트
    김현민
    헤어
    마준호
    메이크업
    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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