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낡은 서랍 속 세상
낡은 것의 빛바랜 아름다움을 아는 이들의 서랍을 열었다. 지난 시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오래된 소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빈티지 웨딩 컬렉션
빈티지숍 ‘벨앤누보’의 벨과 누보
마음에 드는 사진들만 골라 담아놓는 내 사진폴더에는 오래된 아트 북에서 찾은 흑백의 웨딩 사진이 한 장 있다. 사진 속의 신부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심플한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있는데, 이제껏 이렇게 예쁜 웨딩드레스를 본 적이 없다. 벨앤누보는 바로 그 사진 속에 신부가 입을 것 같은 빈티지 원피스를 가지고 있다. 원피스뿐만 아니라 스팽글로 뒤덮인 하얀색 구두와 레이스 장갑, 베일 대신 머리를 장식할 수 있는 커다란 코르사주, 클러치백과 주얼리까지 고전적인 신부가 되기 위한 모든 것을. 벨과 누보의 이 웨딩 빈티지 제품이 더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이 제품들은 단순히 빈티지가 아니라, 빈티지 제품을 리터칭해서 다시 만든‘작품’이라는 점 때문이다.
빈티지 커스텀 주얼리
빈티지숍 ‘나인아울즈’의 김효진
1970년대 팝 스타들이 주렁주렁 달고 다녔던 알록달록한 커스텀 주얼리의 유행이 다시 돌아오면서 몇 시즌 전부터 이런 스타일의 액세서리가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저 비슷하게 만든 제품으로는 그 독특한 스타일을 연출하기 쉽지 않다는 것. 일찍이 이런 사실을 알아챈 김효진은 미국의 빈티지 마켓에서 1960년대부터 1980년대의 오래된 커스텀 주얼리를 사 모았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커다란 브로치와 어깨까지 내려오는 귀고리, 다양한 동물 얼굴이 달린 팔찌 등. 그녀의 빈티지 커스텀 주얼리 중에서 눈에 띄는 건 부엉이 펜던트의 목걸이들인데, 다양한 얼굴의 부엉이들이 숍의 이름 ‘나인아울즈’보다 훨씬 많다.
빈티지 모자
빈티지숍 ‘제이미앤벨’의 제이미
요즘처럼 모자에 관심이 많았던 적도 없다. 특히 우아한 옛날 여배우들이 등장하는 흑백 영화나 사진에서 본 것 같은 복고풍 모자에 대한 전에 없던 관심이 반갑다. 여기에 있는 빈티지 모자들은 빈티지 아티스트 제이미가 파리와 런던의 빈티지 시장을 샅샅이 뒤져 보물찾기 하듯 찾아낸 것들이다. 와토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자들이 쓴 것 같은 납작한 리본 장식의 모자와 19세기 여자들이 이브닝 드레스를 입을 때 썼던 짧은 베일이 달린 토크, 1920년대 여자들이 썼던 클로슈, 동그란 약상자처럼 생긴 필박스 등. 제이미가 꺼내놓은 이 모자들 덕분에 우리는 두꺼운 서양복식사 책에서만 봤던 신기한 모자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빈티지 백
디자이너 류은영
류은영은 빈티지 백을 리폼하는 디자이너다. 엄마의 빈티지 디올 백에 흘린 와인 자국을 감추려고 레이스와 리본 테이프를 붙이다가 빈티지 백을 리폼하기 시작했다는데, 지금은 일이 좀 커졌다. 그녀가 리폼한 빈티지 백을 갤러리에 가득 채우고 전시를 할 정도로 말이다. 리폼의 방법도 재미있다. 디올이나 샤넬, 입생로랑 등의 빈티지 백에 파리, 런던, 뉴욕의 앤티크 마켓에서 찾아낸 레이스, 망가진 시계나 열쇠, 이니셜 장식 등을 붙인다. 그렇게 해서 만든 가방에는 또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나 시, 소설의 구절을 인용해 이름을 붙인다. 말하자면 그녀는 오래된 백에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는 사람이다.
빈티지 안경
편집숍 ‘모드 팝’의 박진현
‘슈퍼(Super)’, ‘앵글로 아메리칸 옵티컬(Anglo American Optical)’, ‘새빌로우(Savile Row)’ 등 빈티지 안경 브랜드를 소개하는 모드 팝의 디렉터 박진현은 영국 빈티지에 푹 빠져서 진짜 빈티지 안경도 수집한다. 몇 년 동안 수집한 그 안경들을 좀 보여달라 했더니, 안경 더미 속을 한참 동안 헤집어 서른 개의 안경을 골라왔다. 두꺼운 뿔테의 전형적인 빈티지 안경부터 렌즈가 뒤집히는 안경, 잘 올라간 속눈썹처럼 끝이 새침하게 올라간 안경까지. 안경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자니 박물관에라도 온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그는 차마 이 안경들을 매장에 내놓지 못하고 사무실 한쪽에 잘 모셔두고 있다.
빈티지 타이
디자이너 홍승완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디자이너 홍승완이 입거나 만든 옷에는 딱 잘라 표현하긴 힘들지만 분명 뭔가 다른 감성이 있다. 테일러드 재킷은 빈틈없이 섬세하지만 그렇다고 뾰족하지는 않고, 스커트는 풍성하지만 그렇다고 화려하지는 않다. 그의 컬렉션을 볼 때마다 빈티지 제품의 포근한 감성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의 옷장 속에도 빈티지 제품이 있었다. 그가 ‘보물’이라며 꺼내놓은 것은 일본 빈티지숍에서 하나둘 구입한 다양한 프린트의 타이들. 몇 십 년 전에는 분명 선명했을 화려한 프린트와 색은 오랜 시간이 지나며 적당히 바래서 이젠 오묘한 빛을 발한다. 이건 지금 막 매장에서 산 타이로는 절대 연출할 수 없는 세월의 힘이다. 그가 매고 있던 타이가 왜 그렇게 멋져 보였는지 그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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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이윤주
- 포토그래퍼
- 안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