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의 운동 ‘스포츠케이션’이 뜨는 이유

스포츠가 여행과 휴가의 목적이 되는 ‘스포츠케이션’이 여행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다. 여행지에서의 운동은 대체 무엇이 다르길래? 또 한 번 떠날 채비를 마친 5명은 운동이 함께했던 지난 여행의 이야기로 답을 대신한다. 

BIKE RIDING 

그해 여름과 겨울이 얼마나 덥고 추웠는지는 자전거를 타며 감각했던 것들로 기억한다. 자전거와 간단한 캠핑 장비를 짊어지고 떠나는 바이크 패킹은 오랜 취미이자 떠나게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이다. 1박 2일 동안 50~70km 되는 거리를 오직 자전거로 이동한다. 비가 오면 맞고, 물웅덩이나 포장되지 않은 날것의 길도 과감하게 선택한다. 그렇게 모험하듯 달리고 오면 따로 기록하지 않아도 몸으로 장소와 계절을 기억하게 된다.

10년 전 여름이 아찔하게 더웠다는 사실은 동해안 종주를 하며 새겼다. 휴가철을 맞아 각종 휴양지 티케팅 전쟁이 벌어질 때 나는 란도너스(장거리용 여행 자전거)를 이끌고 떠나는 첫 바이크 패킹을 계획했다. 동해안 종주라 함은 포항에서 고성까지, 말 그대로 동해안을 끼고 쭉 달리는 것이다. 처음이 주는 설렘은 본가인 대구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겠다는 과욕을 불렀다. 포부는 좋았을지언정 날씨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기록적인 폭염의 연속이었던 2013년 8월, 따가운 땡볕 아래를 달리는 동안 물을 3L도 넘게 마셨다. 그럼에도 화장실 한 번 간 적 없을 정도로 땀을 뚝뚝 흘리며 자전거를 탔다. 도로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신기루로 보일 때쯤 어느 마을 어귀의 큰 나무 아래 평상에서 멈춰 섰다. 저곳에 누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건 낮잠이 아닌 기절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더딘 속도로 라이딩은 계속되었고, 밤이 깊어 캄캄한 국도를 혼자 달려야 했다. 눈에 보이는 아무 모텔에 들어갔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지만 모텔 사장님 덕에 시내 마트에서 공수해온 주전부리로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노곤한 몸으로 침대에 누워 마신 시원한 맥주 한 잔의 맛이 지금도 선연하다. 다음 날 포항 영일대해수욕장에 도착은 했지만, 전날 먹은 더위는 쉽게 가시질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바퀴에는 펑크가 났다. 결국 자전거에 주렁주렁 달린 캠핑 장비는 써보지도 못한 채 더위만 먹고 돌아와야 했다. 의욕이 앞서 여러 변수를 고려하지 못한 결과다. 그 이후론 아무리 즉흥적으로 떠난대도 날씨만큼은 꼼꼼하게 체크하는 습관이 생겼다. 쉬지 않고 페달을 밟으면서도 영혼은 어딘가로 나자빠져 있던 그날의 라이딩이 이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침대보다 아늑했던 나무 아래 평상과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더러 창문을 내려 파이팅을 외쳐준 사람들, 모텔 사장님이 건넨 맥주 한 캔 같은 것들이 매해 여름마다 불쑥 떠오를 뿐이다. 유독 눈이 많이 내린 작년 12월은 태안 바이크 패킹으로 기억한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먼슬리바팩(Monthly Bike Packing)이라는, 매달 바이크 패킹을 떠나는 모임의 일원들과 떠난 휴가였다. 바이크 패킹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전국 각지에 있었다. 태안 원북면에 모여 함께 라이딩을 시작하자는 약속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눈이었다. 출발지까지는 차로 운전해 갔는데, 예쁘게 내리던 눈이 점점 굵어져 시야를 가리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걸어가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도로가 막히기 시작했다. 예정된 출발 시간보다 3시간가량 늦어졌지만 함께하기로 한 10명 중 빠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준비한 코스는 수시로 바뀌었다. 험로를 따라가는 그래블 라이딩을 그렸지만, 안전을 위해 일반 국도를 이용했다. 미끄러운 눈길을 긴장 속에 달리느라 피로도는 평소의 몇 배로 느껴졌고, 손발은 꽁꽁 얼었으며, 땀을 훔치듯 얼굴 위에 녹은 눈을 쉼없이 닦아내야 했지만 웃음소리는 내내 끊이질 않았다. 최고의 장면은 서해랑길 74코스에서 펼쳐졌다. 코너를 돌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멈춰서 멍하니 풍경을 바라만 봤다. 드넓은 갯벌이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저기서 타볼까?” 하는 누군가의 한마디에 모두가 홀린 듯 갯벌로 향했다. 육지에서 멀어질수록 눈이 녹아 바퀴가 푹푹 빠졌고, 몇 걸음 못 가 넘어지기를 반복했지만 다시 간대도 그 길을 택할 것이다. 몸이 힘들수록 휴식은 더 달고 여행은 더 재미있어지는 법이니까. – 손병재(바이크패킹 커뮤니티 ‘먼슬리바팩’ 라이더) 

DIVING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반다해가 남긴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이다. 반다해는 인도네시아의 반다 제도(Banda Islands) 인근에 위치한 바다다. 다이버들에게는 망치상어 떼를 볼 수 있는 스폿으로도 유명하다. ‘망치상어 포인트 주변의 바다는 어떨까? 반다섬은? 운영 중인 LAB(Live a Board, 배를 타고 돌아다니며 다이빙하는 것)도 있을까?’ 예상 밖의 고행길이 펼쳐질지는 꿈에도 모른 채 들뜬 마음만 갖고 인도네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이빙 경력 17년 차. 다이빙 한번 해보겠다고 오지라 불리는 곳을 수없이 다녀봤지만, 이번 반다 제도 여행을 따라올 곳은 없었다. 지난한 여정의 시작은 ‘암본’이라는 지역으로 향하는 것부터다. 자카르타에서 국내선을 타고 암본으로, 그곳에서 다시 비행기나 페리를 타면 반다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 외국인이 살 수 있는 비행기 티켓은 한정적인 데다 결항도 잦다기에 과감히 페리를 선택했다.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 암본에서 반다까지는 15시간이 걸린다. 운항 스케줄은 보통 3~4일 전에 확정되고 이마저도 하루 이틀 전에 취소되는 일이 빈번하다고. 우리가 탄 페리도 그랬다. 결국 태어나 처음 들어본 세람(Seram)섬을 경유해 갈아타야 했다. 페리 안에 있던 외국인은 우리 둘뿐이었다. ‘너희 어쩌다 여기까지 왔니?’ 하는 시선이 쉴 새 없이 꽂혔다. 각종 간식을 파는 보따리 상인과 그 곁을 맴도는 아이들, 생필품을 옮기는 인부들 틈에서 커다란 캐리어를 질질 끌고 온 외국인 2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데굴데굴 눈알 굴리기에 바빴다. 그때 생각했다. ‘오지 말아야 할 곳을 와버렸구나.’ 잿빛이 다 되어 반다섬을 밟은 건 서울에서 떠난 지 43시간 만이었다. 반다해가 유독 아름답게 보이는 건, 갖은 고생이 빚어낸 환상이 아닐까. 아무렴,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들고 나니 어느 때보다 다이빙이 간절했다.

바다가 한바탕 뒤집어진 뒤라 시야 확보가 어려울 거라는 조언을 뒤로한 채 첫 번째 스폿에 풍덩 뛰어들었다. 입수하자마자 눈이 똥그래져 무성의 탄성을 질렀다. 바다는 분명 탁했는데 산호는 존재감을 형형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빽빽한 산호는 본 적도 없다. 그 사이를 유영하는 형형색색 물고기 떼는 AI가 그린 그림 같았다. 그 순간 만큼은 망치상어 떼를 못 본대도 아쉬울 게 없었다. 망가지지 않은 바다는 그 건강함만으로도 압도적인 감동을 주는데, 반다의 바다가 그랬다. 다이빙을 목표로 떠난 여행의 레퍼토리는 늘 비슷하다. 무엇을 위해 이 고생스러운 길에 올랐나 자문할 때쯤 바다에 뛰어드는 것. 그리고 어김없이 흥분을 삼키며 “이게 여행이지!” 하고 되뇌는 것. 이 반복은 해도 해도 질리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내가 살면서 다녀온 여행은 다이빙 덕에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 신혼여행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4년 전 우리 부부는 고갱이 사랑한 휴양지로도 잘 알려진 프렌치 폴리네시아의 바다에서 2주간 머무르며 원 없이 물속에 뛰어들었다. 그곳에서도 아름다운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상어가 강처럼 흐르는 협곡도 만났고, 조류와 싸우다 나란히 공기를 소진한 채 출수한 적도 있다. 경이로울 만큼 아름다운 바다와는 별개로, 스쿠버다이빙은 확실히 위험한 스포츠가 맞다. 물속에서는 어떤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살아 움직이는 깊은 바다를 두 눈에 담고, 그곳을 자연스럽게 누비는 생물과 눈을 마주칠 때의 황홀함만큼은 가능한 한 오래 누리고 싶다. 그래서 한 달 뒤로 예정된 티켓을 또 끊고 말았다. 다이빙 인생의 종착지쯤으로 여겼던 갈라파고스로. – 이가람(미술작가) 

CLIMBING 

취업 준비생 시절, 답답할 때마다 부암동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따라 인왕산에 올랐다. 밤을 수놓는 종로 시내의 수많은 빌딩의 불빛. ‘이 중 내가 일할 곳이 한 곳은 있겠지’ 하며 위로했던 시간은 그 시절 유일한 기댈 곳이었다. 식품 회사의 유통 영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울려대는 업무 전화와 이메일을 피하고자 산을 찾았다. 산에 오를 때는 모든 알람을 껐다. 가끔은 집보다 산에 있을 때가 더 편안했다. 녹음이 펼쳐진 산길을 혼자 걷다 보면 확실히 고민의 힘은 약해졌다. 산이 주는 치유의 기능을 맛본 다음부터는 퀘스트를 깨듯 전국 곳곳으로 산행을 다녔다. 걱정 근심이 없어도 산에 올랐다. 여행을 갈 때는 관광지나 맛집 대신 근처에 어떤 산이 있는지부터 찾았다. 그렇게 산에 매료되어 있을 때, 팬데믹이 시작됐다. 대부분의 실내 활동이 제한되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산을 타는 것밖에 없었다.

등산 커뮤니티 ‘서울러스’도 그때 만든 것이다. 10여 명을 모아 서울 근교 곳곳으로 산행을 다니며 답답함을 날렸다. 산의 높이나 난도를 따지는 식은 아니었다. 다 같이 힘을 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산에게 받을 수 있는 위로를 함께 나누는 시간에 가까웠다. 등산에 자신감이 붙자 전국 각지의 이름 좀 있다는 산에도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2박 3일간의 영남알프스 종주를 시작했다. 영남알프스는 가지산, 간월산, 신불산 등 울산부터 경주에 걸쳐 길게 뻗은 봉우리 9개를 일컫는 산행지다. 그야말로 산을 오르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이틀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50km나 되는 산길을 걸었다. 그야말로 개고생을 했다. 첫째 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추위에 덜덜 떨며 시작한 산행은 다음 날 여명에 이르러서야 익숙해졌다. 잔뜩 긴장한 몸이 서서히 풀릴 때쯤 장관을 이루는 일출과 운해를 넋 놓고 바라봤다. 살아 있다는 느낌을 그토록 진하게 받았던 순간은 없었다. 끝없는 산봉우리 가운데서 나는 그저 티끌만 한 존재임을 새삼스레 절감할 때. 그토록 갈증을 느끼던 평온함이 찾아온다. 발은 부르트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고 또렷했다. 포기하지 않고 두 다리로 무탈히 걸어냈다는 안도감과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산이 주는 기운 덕이었을까. 말이 아닌 꼴을 하고서도 연신 행복하다는 말을 읊조렸다.

그날의 산행 이후, 산에 오르는 것 자체가 여행하듯 느껴진다. 일상의 장소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아도 여행이 주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지금도 가끔 출근하기 전 북한산에 일출을 보러 간다. 자욱한 안개를 지나 정상에 오르면 망망대해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운해 위로 떠오르는 해는 몇 시간 뒤면 출근해야 하는 현실도 아주 잠깐은 잊게 만든다. 가보고 싶은 산은 계속 생긴다. 키르기스스탄의 톈산과 알라쿨 호수를 트레킹하며 언젠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이 되겠다는 꿈도 꾼다. 그때쯤엔 인도네시아의 린자니산에도 가볼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숨 쉬고 있는 활화산이라는데, 내가 밟고 있는 땅속 깊은 곳에서 시뻘건 용암이 들끓고 있다는 사실은 없던 모험심까지 꺼내줄 것 같다. 분화구 벽의 가파른 능선을 오르고 있을 그날엔 어떤 말을 반복하고 있을까? – 박상준(등산 커뮤니티 ‘서울러스’ 리더

GOLF

20대는 여행으로 빼곡했다. 과테말라부터 이집트까지, 호기심이 생기면 일단 떠나고 봤다. 학기 중 아르바이트로 바짝 모은 돈은 방학의 시작과 동시에 비행기 티켓을 사들이는 데 몽땅 쏟아부었다. 태국의 꼬따오섬에 한 달간 머물며 다이빙에 빠져 산 적도 있다. 목적이 있는 여행보다 마음이 가고 발길 닿는 대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건 그 시절 내 여행의 모토였다. 골프가 여행의 메인 이벤트로 자리 잡은 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면서부터다. 골프라면 쳐다보기 싫은 적도 있었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스무 살. 아버지의 등살에 못 이겨 떠난 골프 여행이 발단이었다. 이 여행의 명분은 아들인 나의 대학 입학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골프광인 아버지가 당신의 친구들과 모여 종일 골프를 치고 놀기 위한 여행이었다. 여행에 함께한 일행 중 20대는 나 하나. 새벽이면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한두 바구니의 공으로 스윙 연습을 하고, 저마다의 비법을 전수하려 열심이셨던 아저씨들을 부지런히 따라다녀야 했다. 연습이 끝나면 오전에 18홀을 돌고, 오후에도 18홀을 돌았다. 36홀 동안 내가 할 일은 그저 듣는 일이었다. 대화의 주제는 골프 인생론, 혹은 인생 골프론. 저녁 술자리에서도 안줏거리는 골프였다.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온통 골프, 골프, 골프…. 그 여행 이후로 10년 넘게 골프백 근처도 가지 않았다. 그때는 또래 친구들이 골프를 치는 일도 드물었으니 딱히 갈 일도 없었다. 골프장은 그저 어른들과 함께 가는 노잼 스포츠. 딱 거기까지였다.

그 공고한 공식은 서른이 넘으면서 깨졌다. 인생에서 골프가 잊힐 때쯤 주말에 지방으로 라운딩을 가자고 졸라대는 친구들이 생겼다. 나는 늘 거절하는 쪽이었지만, 골프광 친구의 집요한 꼬드김이 내 생애 두 번째 골프 여행을 기어코 성사시켰다. 라운딩은 대충 돌고 친구들과 시간이나 보낼 심산이었다. 역시나 오랜만에 잡은 채는 난리가 났고, 공은 제멋대로였다. 가장 큰 반전은 그 모든 과정이 재밌었다는 것이다. 스윙을 잘해야만 재미있는 게 아님을 그때 알았다. 골프 실력이 어떻든 친구들끼리 자유롭게 즐기는 시간이 그저 좋았다. 10년 전 아버지가 왜 친구들과 그렇게 행복해하셨는지 어렴풋이 이해됐다. 그렇게 자의에 의한, 진짜 골프 라이프가 시작됐다. 그때부터는 골프를 하기 위해 누가 가자고 조르지 않아도 이곳저곳을 잘도 찾아다녔다. 내가 그리는 자유로운 골프 문화를 잔뜩 녹인 라이프스타일 골프 브랜드 ‘깔롱골프’도 만들었다. 올여름엔 깔롱골프가 주최하는 골프 축제 ‘The Hundreds Cup(백돌이컵)’을 개최하러 제주로 향했다. 우리끼리 붙인 부제는 깔롱 바캉스! 클럽하우스에서 3만원짜리 백반을 먹는 대신 야드에서 그릴에 햄버거와 바비큐를 구웠다. 칼라 셔츠 대신 수영복을 입고 골프를 쳤고, 마음이 내킬 때는 언제든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비가 쉼 없이 쏟아졌지만 그래서 더 자유로웠다. 지난달 깔롱골프가 론칭한 패션 라인은 모두 이 바캉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휴가인지 축제인지 모를 이벤트가 끝나니 새로운 여행을 품게 된다. 도심 속 골프 여행은 어떨까. 일하고 생활하는 도시에서 자유로운 골프 문화를 즐길 수 있다면, 멀리 자연을 찾지 않더라도 휴식이 가능해질 것이다. 지하의 폐쇄된 스크린 골프장이나 말 없이 그물망에 공만 쏘아대는 연습장이 아니라 친구들과 먹고 마시며 즐거운 주말의 기억을 남길 수 있는 골프 바캉스라면 좋겠다. 아, 공 치러 가고 싶다! – 김한균(깔롱골프 공동 대표)

YOGA

인도, 네팔, 중국, 대만…. 인생 대부분의 여행을 되돌아보면 늘 요가로 시작해 요가로 끝난다. 학생들을 모아서 가는 리트리트 여행이 아니라면 늘 요가 선생님인 아내와 동행한다. 함께 요가 수련도 하고, 그 나라에서 유행하는 요가 스타일을 살피고, 새로운 요가 센터의 인테리어나 시스템도 배우는 거다. 인생을 너무 팍팍하게 사는 거 아니냐고? 요가를 가르치는 게 일인 내가 여행을 가서까지 온통 요가 생각뿐인 걸 피곤하게 여기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요가와 명상이 함께하는 여행만큼 완벽한 쉼을 주는 건 없다. 히말라야는 그런 의미에서 해마다 찾는 곳이다. 요가 수련자에게는 인도와 함께 요가의 성지로도 불리니까. 여행하는 과정 중 가장 심장이 뛰는 순간은 네팔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경비행기를 타고 넘어갈 때다. 작은 창문 너머로 펼쳐지는 설산이 보이는 순간부터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저 설산 아래서 매트를 깔고 요가 수련을 할 수 있다니. 설렘을 안고 카트만두부터 트레킹을 시작한다. 어쩌면 험한 길을 걷고 또 걷는 것부터 수련이다. 묵언 수행을 하며 걷는 코스에서는 명상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 번은 보슬비를 맞으며 요가 수련을 하기도 했다. 시퀀스의 끝 무렵엔 비가 그쳤고, 함께한 일행 20명이 촉촉한 땅 위에서 다 함께 시르사아사나(머리서기)를 성공했는데, 이 광경을 본 관광객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내며 함께 즐겨줬다. 몇몇은 함께 아사나를 취하며 수련에 동참하기도 했다. 전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요가로 하나 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올겨울에도 요가와 명상을 하러 어김없이 히말라야로 간다. 12월에 10박 12일간 히말라야를 여행한다는 내게 돌아오는 건 늘 ‘추워서 어떡하냐’는 걱정이다. 사실 12월 히말라야의 날씨는 한국의 겨울보다 춥지 않다. 낮에는 트레킹을 하다 보면 오히려 한 겹씩 옷을 벗게 된다. 결국 중반쯤 걸었을 때는 반소매 차림이 되어 있다. 와이파이가 터지긴 하지만 굉장히 느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는 데만 하루 종일이 걸릴 정도니 산 아래에서의 아득한 밤에는 함께 온 사람들에게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 작년까지 히말라야를 총 4번 방문했는데, 늘 책 두 권 정도 챙겨 와서 다 읽고 간다.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땀이 나도록 걸으며 생경한 풍경을 담다가 지는 노을을 눈앞에 두고 요가 수련을 하는 매일. 인터넷과 멀어진 만큼 나를 어지럽히던 모든 것이 단순하고 명료해진다. 웰니스와 쉼이 히말라야에서는 일상이다. 경비가 싼 편도 아니고, 몰디브나 발리 같은 인기 있는 휴양지보다 가는 길도 험하지만, 해마다 히말라야를 마음에 품는 이유다. 간혹 요가 매트 위를 도피처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요가를 찾는 것이다. 술이나 도박을 하는 것보다야 요가로 해소하는 것이 나은 일임이 분명하지만, 매트 위를 벗어나는 즉시 삶으로 돌아가 같은 문제를 껴안고 힘들어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요가의 목적은 도피처를 내어주는 것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갖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음 근육을 제대로 기르려면 히말라야든 인도든, 낯선 땅으로, 이왕이면 자연으로 둘러싸인 아득한 곳에서 요가 매트를 펼쳐보기를 권하고 싶다. 매일 요가를 하는 내게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자꾸만 떠난다. 여정이 고된 만큼 단단한 마음을 훈련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다. 내 두 발로 온전히 걷는 날까지 이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 여동구(요가 강사)

에디터
고영진
일러스트레이션
신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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