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FANTASY / 정유미
여성의 매일에 판타지를 선사하는 로에베와 그런 여성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배우 정유미. 로스앤젤레스의 분방한 거리에서 마주한 둘의 기록.
청룡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다음 날엔 무슨 생각을 했어요?
왜 나는 아직도 이럴까!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분들은 너무 잘하시더라고요. 만약에 혜수 언니 없었으면 입을 못 뗐을 것 같아요.
하하, 2006년 청룡영화제에서 <가족의 탄생>으로 여우조연상을 탔을 때 했던 수상 소감이 생각나는 말이네요. 시상식은 부담스러운 장소 아니겠어요?
“빨리 얘기하라고 하니까 더 못하겠어요!” 했던 날이죠. 크크. 당시 제가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다들 상 받은 것처럼 기뻐했어요. 이상하게 그 시절 사람들은 오랜만에 봐도 그 당시에 느낀 따뜻함이 느껴져요. 이번 청룡은 혜수 언니가 (MC로 서는) 마지막이라고 해서, 그날 거기에 꼭 앉아 있고 싶었어요.
근데 또 상까지 받아버렸네요.
너무 신기한 게, 이번 청룡에 <가족의 탄생> PD님과 감독님도 다 계셨어요. 당시 백PD님이 이번 <올빼미>를 제작한 분이에요. 이 자리에 있어서 너무 기쁘다고 축하해주셨는데, 기분이 이상했어요. 저도 연차로 치면 제법 오래되었는데, 마치 시간이 휘리릭 지나버린 것만 같았죠. 주변분들이 더 기뻐해주셨어요.
여우주연상 수상자답게 예뻤어요. 요즘 말로 ‘헤메스’가 완벽했다.
노력했어요.(웃음) 머리를 워낙 바짝 당겨서 리프팅된 것 같아요. 스타일리스트가 예쁜 의상도 여럿 준비해줬고요. 꾸준히 운동을 해온 터라 노출을 조금 해볼까 싶기도 했는데, 그 드레스를 입었을 때 마음이 제일 편안했어요. 다만 필라테스 선생님이 너무 아쉬워했어요. 어깨 다 만들어줬는데! 하면서.
늘 화면 속 완벽한 모습의 배우를 보다, 우리도 시상식에서 배우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게 되죠. 떨리면 떨리는 대로,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자연스럽게요.
올라가서 소감을 말해야 하는데, 입은 안 떼지고, 하나같이 나만 보는 모든 사람들이 반짝반짝 빛이 나더라고요. 그러다 혜수 언니와 눈이 마주쳤어요. 항상 그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봐주시거든요. 그 순간 안심이 되고, 제 안에 어떤 감정이 스쳐 지나갔죠.
아름다운 밤이었어요. 김혜수의 마지막 청룡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게 모두에게 의미가 남다른 거 같더군요.
청룡의 어떤 권위를 김혜수라는 배우가 만든 것 같다는 병헌 선배님 말에 저도 공감해요. 30년을 그렇게 늘 봐왔잖아요…. 시상식 없는 연말이 허전하겠지만 그래도 언니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 마음도 따듯하고 편해졌어요. 또 잘하실 분이 나타나겠죠?
직접 김혜수의 후계자가 되어보는 건요?
소감도 잘 못하는데, 못할 것 같아요. 아, 아니 일이 되면 잘해보려 할지도?(웃음)
‘미스김’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연기할 수 없었을 거라고 했죠. <직장의 신> 속 ‘미스김’ 김혜수는 그때 그 시절 정유미한테 어떤 영향을 주었어요?
2013년에 만난 <직장의 신>은 제게 의미가 남달라요. ‘내가 어떤 꿈을 가졌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줬죠. <직장의 신>은 현장 분위기가 정말 좋았고, 그 중심에는 혜수 언니가 있었죠. 일과 직장에 관한 내용이니까, 연기하면서도 마치 이 직장에 소속된 것 같았어요. 단합대회 같은 것도 했거든요. 그러면서 저도 그런 생각을 한 거죠. 내가 하고 싶은 거는 연기 하나 더 잘하고 싶고, 그냥 작품 잘 만나고 싶은 거 하나인데…. 그다음 해에 <연애의 발견>을 찍으면서, 힘들 때마다 그때 생각이 진짜 많이 났어요. 언니가 주인공으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해내는 모습을 봤으니까요. 제가 그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연애의 발견>을 못해냈을 것 같아요.
배우 생활에 영감을 주고 정을 나눈 동료 배우가 소중하죠?
정말 귀하죠. 제가 카톡을 지울 때도 <직장의 신> 단톡방이 제일 아쉬웠어요.
정 많아서 정유미잖아요.
많아서 큰일이죠. 예전보다는 많이 참는데, 그래도 어디 성격이 변하지 않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저 지금 사춘기예요. 사춘기. 진짜 마흔이 되고 사춘기를 겪다니.
사춘기? 그 질풍노도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어요?
그래서 그냥 순간순간 즐길 수 있는 건 최대한 즐기려고 노력 많이 했어요. 그러니까 또 그게 되더라고요. <잠>으로 칸 영화제 갔잖아요? 가서는 매일 술 마셨어요. 그렇게 매일 마신 적은 난생처음인 것 같아요. 니스로 먼저 들어가서 계속 샤블리 마시고요. 그런데도 다들 아침 6시에 일어나요. 니스에서 오랜 로망도 실현했어요.
어떤 로망이 있었어요?
잠옷 입고 그냥 해변까지 나가는 거요. <여름방학> 때 해보고 싶었는데 그해 여름에 비가 정말 미친 듯이 맨날 쏟아졌어요. 니스 가서는 정말 잠옷 입고 내려가서, 건널목을 건너 바다까지 가봤어요. 너무 좋았어요.
영화에서 탄생한 배우 정유미가 영화 <잠>으로 상을 받았죠. 작년 여름 인터뷰할 때 <잠>은 러브 스토리라고 했죠. 영화를 보니 그 말이 이해가 되더군요.
다들 저를 무서워하더라고요. 크크. 제가 그때 부상 선수로 뛰고 있었던 것만 빼면 모든 게 좋았어요.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해요. 한 가지 아쉬운 건 다른 촬영장도 마찬가지지만 테이크를 예전만큼 많이 갖고 갈 수 없는 것. 감독님이 셀렉할 수 있는 걸 많이 만들어주고 싶은데, 늘 현실적 문제가 있으니까요.
<잠> 봤다고 하면 결말 어떻게 생각하냐고들 하죠. 그런 질문 많이 받았죠?
찍어둔 에필로그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나오지 않았다는 걸 한동안 잊고 있었어요. 의견이 분분한 걸 보고 그제야 생각나서 “맞아, 감독님. 그거 어떻게 됐어요?” 물어봤더니,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다면서 잘랐다는 거예요. 저는 잘한 것 같아요. 그 에필로그가 있었다면 이런 의견이 막 오고 가지 않았을 것 같아요.
감독의 의도는 ‘연기’였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빙의’라고 믿고 싶더라고요. 정유미가 ‘수진’을 믿고 싶게 연기를 한 거죠.
시나리오에도 그랬어요. 군더더기 없이 그대로 영화에 그렇게 또 나온 게 너무 좋았어요. 칸에 안 갔다면 좀 더 일찍 개봉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 칸에 가면서 그때부터 이 영화가 좀 운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저도 그 운 덕을 본 것 같고, 무엇보다 감독님을 알게 된 게 너무 좋아요. 저한테 ‘선배님, 선배님’ 하는 건 너무 싫지만요.(웃음) 저는 ‘배우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싫어요.
그럼 어떻게 부르는 게 좋아요?
“배우님 들어가십니다”는 싫고요. 예를 들어 <잠>의 수진이면 “수진 들어갑니다” 이게 제일 좋아요.
<잠>은 오컬트에 대한 영화였죠. 요즘에도 영화 찍을 때 고사 지내요?
요즘은 돼지 모양 케이크나 사진으로 해요. 처음에 연기하면서 돼지 머리 있는 것만 보면 너무 놀라서. <82년생 김지영> 때는 돼지 케이크였던 것 같아요.
사주 본 적 있죠? 자주 듣는 말 있어요?
늦게 결혼해야 한다, 뭐 이런 거?(웃음) 하긴 한다는데 아닌 거 같아요. 왜냐하면 벌써 했어야 돼. 그래서 들을 건 듣고 아닌 건 안 들어요.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오래 연기하려면 뭐가 필요한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가만히 있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흘렀고요. 어쨌든 떠나지 않고 있다 보니까…. 기자님도 제가 배우 일 하는 동안은 기자 계속해야죠.
안 될 것 같네요. 정유미는 70세까지 할 것 같아서.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전혀. 저는 좀 정해놨어요. 마음속에.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거면 뭐가 그래도 되는 게 있었던 거겠죠? 위기도 있었지만 그걸 잘 넘겼고, 한해 한해 하다 보니까 이렇게 시간이 흘렀어요.
또 달리 하고 싶은 일 있는 것도 없죠?
일은 아니지만 그냥 어디 바닷가 가서 종일 누워 있고 싶은 마음.(웃음)
그래서 LA에 간 거예요? LA에 간 정유미를 <얼루어>가 따라잡았죠.
이런 건 일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개봉하기 전인가도 혼자 여행을 다녀왔거든요. 늘 집에 혼자 있지만, 그래도 집에서 쉬면 운동을 해야 한다, 뭘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요. 촬영이 언제 잡힐지 모르지만 준비를 안 하면 안 된다. 이런 게 생겨버리니까…. 훌쩍 떠나야 자유로워지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2024년 청룡의 해를 시작하는 1월호에 청룡 여우주연상 배우정유미가 <얼루어 코리아>의 얼굴이 됩니다.
하하, 그런데 우리가 촬영할 때만 해도 이럴 줄 몰랐잖아요.
모든 것은 운명, 그리고 필연인 거죠. 2024년, 기세가 좋습니다.
우리 모두의 기세가 좋지! 전 호시탐탐 <얼루어>를 엿보고 있어요.
아까 내가 바라는 건 연기 잘하는 거랑 작품 잘 만나는 것밖에 없었다고 했잖아요. 그 마음 지금도 똑같아요?}그렇죠. 그거를 잘해야 하죠. 그동안 제게도 변한 모습이 있겠지만,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게 지금 제게는 제일 중요하고, 소중해요. 좋은 상을 탔으면 또 보답도 연기로 해야 하니까요.
그나저나 청룡 트로피는 어디에 뒀어요?
이름을 새겨서 나중에 보내준다고 했거든요. 트로피 아직 안 왔을 걸요?
*본 기사에는 협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