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MATCH / 하석진
정제된 멋과 유연한 제스처, 스마트함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하석진과 로로피아나의 만남.
요즘 자다 가도 웃음이 날 것 같습니다. <데블스 플랜> 우승 후 몇 달이 지났는데, 이번 작품은 어떻게 남았어요?
연기할 때와 비슷했어요. 좋은 장면 하나는 남긴 거 같다 싶은 마음이죠. 배우라면 내가 맡은 어떤 한 장면에서 좋은 연기를 펼쳤다는 확신이 들 때가 있잖아요..
우승 상금이 무려 2억5000만원입니다. 모두 우승자인 한 사람, 하석진에게 돌아갔죠.
물론 2500만원보다는 2억5000만원 들어오는 게 낫고, 2억5000만원보다는 25억원 들어오는 게 좋죠.(웃음) 사실 돈보다 긍정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만족감이 더 커요. 오히려 ‘흥행이 안 되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은 좀 했어요. 그래도 시즌2를 제작한다고 하니, 결과가 괜찮았나 봐요.
이 게임에서 최고의 순간은 역시 문제를 해결하고 감옥을 탈출하게 된 하석진이 오열하던 때죠.
제가 나온 장면이 제일 재밌었다니, 다행입니다. 저한테는 다 축하한다는 말만 하니까, 어떤 장면이 재미있다는 말은 잘 못 듣거든요. SNS로 전 세계분들이 디엠을 주신 건 재미있었습니다. 한창 때는 그 열기가 무서울 정도였어요. 남녀들이 ‘메리미(Marry Me)’를 외치고. 그 ‘메리 미’라는 거는 제가 결혼을 했건 안 했건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는 것 같아요. ‘Congratulations’에 가까운 멘트 같더군요.
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감정을 연기해야 하는데, 그 오열과 기쁨은 진짜 감정이잖아요. 배우로서 새삼 느낀 바가 있었나요?
제게 <데블스 플랜> 출연은 한편으로는 일이었어요. 출연료를 받고 참가를 했고, 여기서 내가 더 잘하면 상여금이 있는 일이었죠. 보는 사람들한테 나쁜 거든, 좋은 거든, 희열을 줘야 된다. 특히 이런 두뇌 서바이벌 같은 걸 할 때는 분명히 반짝이는 뭔가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우승하지 않아도, 저보다 훌륭한 사람한테 그런 장면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다른 말로 프로그램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도전자의 마인드보다 출연자의 마인드가 더 앞섰어요. 흐름이 재미없다면, 재미를 만들기 위해 내가 배신이라도 때려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한 8회나 9회, 10회 정도의 흐름을 만들고 나간 탈락자가 되어도 좋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실제 제 감정을 짓누르기 시작하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그러고는 엄청 큰 감정을 느꼈고요. 거의 20년 가까이 연기자로 살아온 제 삶에서 꽤나 격동의 순간이었죠.
데뷔 이후 가장 강렬한 순간 중 하나인가요?
연기하면서 감정의 격함을 느낄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런 장면도 어쨌든 반복할 수밖에 없거든요. ‘원 신 원 컷(One Scene, One Cut)’ 찍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 한 번 감정이 폭발을 해도 “다시 한번 바스트로 들어갑니다” 하면 다시 하죠.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처음의 강렬한 감정이 둔화되거든요. <데블스 플랜>에서의 감정은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단 한 번의 순수하고 정직하고 격한 감정이었어요.
서바이벌의 묘미가 그런 것 같아요. 진짜 감정이 나오고, 어느 순간에는 나도 나를 컨트롤할 수 없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게 두렵지는 않았나요?
현장에서 자신을 컨트롤하는 데 실패해 이른바 ‘나락’으로 가는 일도 생길 법해요. 하지만 우리 프로그램은 자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 해온 사람들이다 보니 다들 그 컨트롤을 잘했어요. 모두 좋은 사람들이고, 나이스했고요. 그래서 오히려 날것을 원했던 시청자는 부족한 부분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어요.
우승에 대한 목표와 기대는 없었나요?
누가 나올지도 몰랐고 두뇌든 체력이든 내가 끝까지 남아 있을 세대가 아니다.(웃음) 기억력도 체력도 예전같지 않으니까요. 더 뛰어난 젊은 친구들이나 오히려 저보다 인생 경험이 많은 사람이 우승할 줄 알았어요..
‘합숙’이라는 것도 오랜만에 하는 경험이죠?
사실상 일주일 합숙은 인생 살면서, 성인이 되면서 겪기 어렵죠. 일주일을 한 공간에서, 낯선 사람과 햇빛도 안 드는 곳에서, 모든 통신이 단절된 상태에서 보냈죠.
강제적이지만 진정한 디지털 디톡스를 경험했네요.
그게 진짜 좋았어요. 다른 출연자들도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제가 연락이 안 될 거라는 걸 몇 명에게는 알리고 들어간, 정당한 단절이었으니까요. 처음에는 초조했는데, 그 마음이 금방 사라지더라고요. 모두들 의미 없이 인스타그램 열고, 네이버 들어가 보고 하잖아요. 저는 또 유튜브 채널도 하니까 유튜브 스튜디오 앱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걸 자주 보거든요. 그런 습관을 끊으니 좋더라고요. 안 보고 있다가 다시 볼 때의 묘한 쾌감이라는 게 있거든요.
어떤 쾌감이에요?
폰과 떨어져서 온전히 네트워킹과 차단된 시간을 보냈고, 와서 폰을 봤는데 아무것도 안 와 있다면 약간 서운하긴 하고, 나를 찾는 사람이 있으면 좋고. 그렇죠.
유튜브를 보니 출연자들에게 위해 금으로 만든 기념품을 선물했던데요?
엄청 고민해서 만들었어요. 사실 촬영은 1월 말에 끝났고, 상금도 몇 달 안에 받았고, 우승자로서 보답을 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방송이 되면서 라운딩 인터뷰를 했는데, 40개가 넘는 매체 기자분들이 다들 상금을 어디다 썼느냐고 하시는 거죠. ‘아, 내가 준비를 미리 했어야 했구나….’
그 거액을 그냥 계좌에 넣어두었다고요.
왠지 제 돈 같지가 않았거든요. 그때부터 저한테는 새로운 ‘데블스 플랜’이 들어오기 시작한 거예요. 뭐 소고기라도 보낼까? 뭐라도 하나씩 맞출까? 상금이 돈으로 되어 있지만 제게는 트로피 같았거든요. 그래서 환금성이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고 싶었어요. 금으로 코인을 만든 다음, 피스를 새겼죠.
환금성이라는 건, 여차하면 팔 수도 있는 거죠?
네, 팔 수 있어요. 꽤 돈 돼요. 다들 얼마냐고 물어보는데 그냥 제가 섭섭지 않게.(웃음) 다행히 지금 거의 다 전달했고 3~4명만 못했어요. 제작진이랑 단 몇 명이 남았죠. 제 것도 하나 있어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필요하면 그것도 주고 싶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로로피아나에서 코트도 여러 벌 살 수 있겠네요.
좋죠. 저는 로로피아나 옷 좋아하거든요. 지금 이 옷도 자주 입어요. 매장에서 로퍼도 사고, 유럽 가면 아웃렛도 가고 해요. 2011년에 이탈리아인가 어디 아웃렛에서 60% 할인하는 코트 산 거 아직도 입어요. 13년 됐네요. 꽤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오래 입겠다 싶어 샀는데, 여전히 옷장 속 한편을 차지하고 있죠.
하하, 서머 로퍼 정말 편한가요?
여름에 맨발로 신기도 좋고, 제 발에 잘 맞게 늘어나서 너무 편합니다.
<데블스 플랜>으로 2023년은 돈과 명예를 거머쥐었어요.
명예는 좀 많이 생긴 것 같아요. 다행히도요. 저도 뿌듯하고 어머니도 좋아하셨고, 넷플릭스 어떻게 로그인하는지도 모르시는 어머니가 어떻게 해서 보셨더라고요.
하석진이 풀어야 할 인생 문제도 있나요?
개인적으로 풀 문제는 어마어마하죠. 아직도 한참 남았습니다. 일적으로도, 제 인생으로도 문제는 산적해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시급합니까?
여러 가지 있죠. 가정을 이룰 나이도 한참 지났고요. 건강도 관리해야 하고 젊음도 유지해야 하고…. 이맘때쯤 갖춰야 할 지적 수준 등등 많습니다.
40대 남자 배우는 정말 많은 걸 할 수 있잖아요.
이제 또 새로운 장이 열리길 기대하고 있어요. 어느 정도 내려놓을 나이가 됐다는 건 좋아요. 그런데 또 내려놓기는 싫은 거죠. 여전히 또 멜로가 됐건 로맨스가 됐건 20대의 혈기왕성한 어떤 캐릭터가 됐건, 배우로서 여전히 하고 싶어요. 오늘도 러닝 20분, 요가 40분 하고 왔고요. 비타민도 먹으면서 무지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하, <나 혼자 산다>의 장면이 떠오르는 말이네요. 그만큼 쉬워진 것도 있겠죠. 삶은 공평하니까.
그래서 <나 혼자 산다> 같은 프로그램에 나갈 때도 연출된 모습이 아닌 ‘집에서 저는 이러고 삽니다’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진짜 보여줄 게 없었거든요? <나 혼자 산다>에 나온 일상은 한 1~2주간의 하루를 몰아놓은 느낌? 싱크대에서 코 푸는 게 있었는데, 그것만 좀 없애달라고 했어요. 제작진이 그 요청을 들어주셔서 진짜 너무 감사해요. 이 인터뷰를 통해서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네요. 저는 방송이 나올 때까지 제가 아저씨 같은지 전혀 몰랐어요.(웃음)
아저씨라고 하지만, 그 옛날 대한항공 광고로 데뷔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인간적으로는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나아진 것 같아요. 까칠하던 것들은 뭉툭해졌고 거칠었던 부분은 조금 부드러워졌고요. 지금은 또 고민하죠. 여기서 얼마나 더 좋은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도 관대해졌지만, 그 관대의 크기가 더 커지지는 않은 것 같아요. 커지는 순간 좀 게을러질 것 같아서.
그래서 2024년은 어떻게 보낼 생각이에요?
올해는 아직 무계획이에요. 뭐 해야 하죠? 우선 오늘 촬영을 잘하려고요.
*본 기사에는 협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