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Y FEVER / 이이담
배우 이이담은 늘 운이 좋았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속 민들레로 활짝 피어나기 전부터.
한 해의 시작과 끝의 경계에서 만났어요. 연말을 보내는 루틴이 있나요?
매년 만나는 친구들 모임이 있고, 저녁에는 가족과 거실에 모여 제야의 종소리 중계를 봐요. 함께 카운트다운을 외치며 새해를 맞이하죠.
소원도 빌어요?
그럼요. ‘연기 열심히 잘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항상 똑같지만 꾸준히 빌었어요. 너무 가늘지만 않게, 적당한 밀도로 이 일을 오래 하고 싶거든요.
올해는 조금 강렬했죠?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이하 <정신아>)의 반응이 뜨거웠어요.
행운이 가득했던 것 같아요. <정신아>와 <택배기사>가 공개돼 배우 이이담으로 설 수 있었고, 새로운 작품 <원경>까지 만나게 됐으니까요. <정신아>를 기점으로 난생처음 겪는 일도 많았어요. 그 어느 때보다 작품과 관련해서 많은 피드백을 받았고, 거리에서 저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하는 분도 계셨어요. 아직<정신아>의 뜨거움 속에서 지내고 있어요.
현장에서도 이런 반응을 예상했어요?
개인적으로 좋은 평을 받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작품이 가지고 가는 메시지가 워낙 좋았고, 의사와 간호사, 환자를 연기하는 배우 모두 베테랑이었거든요. 현장에서 선배들의 연기를 보는 게 황홀할 정도였어요. 이재규 감독님의 연출이야 믿고 보는 거고요! 저는 그 안에서 튀지 않게 잘하자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더 욕심내고 싶은 건 없었고요?
‘베테랑 선배님들 사이에서 로봇처럼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싶었어요. 그게 제 욕심의 전부였죠. 컴퓨터 앞에 앉아 차팅을 하고 서류를 정리하는 생활 연기가 더 까다롭고 어렵더라고요. 감정적으로는 들레가 가진 서사가 워낙 특수하다 보니 상황에 몰입하며 준비할 수 있었는데, 자연스러운 행동은 계산 속에서 나올 수 없으니까요. 소품이나 동작에 익숙해지려고 틈틈이 훈련했어요.
작품 자체가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느꼈어요. 마지막 화에 들레가 비로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자유로워지는 것 역시 동화적 장면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고요.
보는 분들의 대리 만족이 컸을 것 같아요. 간호사로서 인정받고 있고 안정적인 상황에서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게 현실에서는 어렵잖아요. 저도 그랬을 것 같고요. 감독님과 처음 미팅했을 때 민들레를 ‘멋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들레의 선택을 보고 확 와닿았어요.
지금 대화를 하며 느끼는 건데, 원래 목소리 톤이 이렇게 높아요?
민들레를 연기할 때는 또박또박 말하려 하고 대사를 툭툭 뱉으면서 톤이 낮아진 것 같아요. 원래는 성격이 급한데 말이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다소 어눌하고 밝답니다.(웃음) 들레로 있을 때는 일부러 걸음걸이도 빠르게 하고 머리도 꽉 묶어서 연출했어요.
숨겨진 디테일이 또 있나요?
자세히 보신 분들은 아실 수도 있는데, 황여환(장률 분) 쌤과 썸을 타면서 머리망을 풀어요. 망을 하고 안 하고의 사소한 차이인데, 왠지 들레라면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마음의 변화가 그렇게 소소하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그리고 병동 밖의 들레는 늘 머리를 풀고 있었어요.
감독님을 비롯해 배우들이 많이 울고 웃었던 현장이라던데, 소문처럼 모든 배우가 ‘과몰입’한 현장이었나 봐요. 분위기는 어땠어요?
지금까지도 자주 만나고 연락할 정도로 끈끈해요. 좋은 소식이 있으면 공유하고 열렬히 ‘우쭈쭈’해줘요. 촬영하며 탄생한 단체 채팅방도 여러 개예요. 간호사와 의사 전체 방이 있고, 그 안에서도 감독님이 있는 방, 없는 방으로 나뉘어요. 간호사 쌤끼리도 대화방이 따로 있고요. 여기서도 수연(이상희 분), 정란(박지연 분), 다은(박보영 분) 4명이 있는 방이 있고, 수쌤(이정은 분)까지 계신 방이 있어요. 보통 저희끼리 의견을 정하고 수쌤이 있는 방으로 보고드리고는 하죠.
진짜 병원에서 일하는 직장인 같아요. 주로 어떤 얘기가 오가요?
선배님들이 워낙 바쁘시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시스템이 정착된 것 같아요. 최근에는 다은 언니의 청룡영화제 수상 축하를 열띠게 하고, 수연 쌤의 인터뷰 사진이 멋있어서 이슈가 됐어요.
오늘 화보를 보면 뭐라고 하실 것 같아요?
‘우리 이담이, 우리 막내 최고다!’ 하실 것 같아요.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막내인 현장이라 사랑을 듬뿍 받았어요. 막내인 현장이 진짜 좋은 것 같아요.(웃음)
사랑받는 막내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운이 좋은 것 같아요. <택배기사> 때 우빈 선배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11명의 단체 대화방도 아직 건재해요. 근황 이야기를 하고 얼마 전에는 송년회를 하자는 얘기가 오갔어요. <정신아>는 개인적으로도 많이 성장했다고 느끼는 현장이라 더 특별했어요.
어떤 성장을 일궜어요?
선배님들을 보면 쉬는 틈에도 끊임없이 연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더 좋은 시너지를 좇아요. 열심히 준비하는 것 이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걸 느꼈어요. 감독님들께서 저를 민들레 그 자체로 봐주시고 소통해주시니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어요. 이재규, 김남수 감독님께서 저를 민들레로 봐주시고, “네 생각은 어때? 어떨 것 같아?”라는 질문을 자주 하셨어요. 어떤 대답이든 귀 기울여주신 덕분에 현장에서 새로운 애티튜드를 장착하게 된 것 같아요. <원경>을 촬영하면서 그 성장이 더 크게 느껴져요.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과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죠.
맞아요. 연기하는 캐릭터에 대해 ‘자신감이 있다’는 게 어떤 건지를 처음 경험했어요. 이전에는 감독님께 질문하는 게 많이 겁났어요. ‘그저 확신을 얻고 싶을 뿐인데, 준비를 안 한 것처럼 보이면 어떡할까’ 하는 걱정이 앞섰거든요. 지금은 그 질문이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고 연기에 대한 열정이라는 쪽으로 생각하게 됐어요. 덕분에 쓸데없는 눈치를 안 봐요.
<정신아> 1화에 “원래 아침이 오기 전에 새벽이 제일 어두운 법이에요”라는 대사가 있어요. 이이담에게도 칠흑 같은 새벽이 있었나요?
해 지는 노을까지는 있었던 것 같은데 아직 밤은 없었어요. 성격 자체가 그래요. 짧고 굵게 괴로워하다가도 다음 날이면 훌훌 털어내버려요. 주변에서도 ‘행복하게 산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특별한 비법이 있어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아요. 취미는 없지만 지금 뭘 하고 싶은지, 어떤 걸 하면 기분이 좋을지 알고 있어서 아플 새가 없어요.
데뷔가 비교적 늦은 편인데 초조함은 없었어요?
그 시간이 오히려 좋았죠. 25~26세쯤 첫 작품을 했는데, 덕분에 성인이 된 후 저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 시간 동안 저를 운용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아요. 시간이 정말 많으면 없던 고민도 생기고 지나간 일도 후회하고 괜한 걱정이 엄습해요. 그럴 때마다 집 밖에 나가서 걷거나 드라이브를 떠났어요. 혼자 전시를 보고 등산을 하고 카페에서 멍 때리고, 여름에는 산속에 있는 절에 가서 매미 소리를 듣고 왔어요. 그렇게 해소해온 시간 덕분에 스트레스를 푸는 확실한 방법을 깨달은 것 같아요. 저를 행복하게 할 선택지를 많이 축적해놓은 셈이죠.
가장 좋아하는 건 뭐예요?
혼자 하는 드라이브요. 혼자 하는 걸 좋아해요. 남 눈치 안 보고 내가 좋아하는 거 먹고, 집에 가고 싶을 때 오면 되거든요. 뭐든 빨리빨리 진행된다는 장점도 크고요.
지금 떠나고 싶은 곳 있어요?
겨울에는 잘 안 떠나긴 하는데, 여름 드라이브를 정말 좋아해요! 오후 2~3시쯤 점심 먹고 느긋하게 남양주나 파주로 1시간 반 정도 코스로 출발해요. 맵을 켜서 보이는 괜찮은 카페 하나를 목적지로 정하고 그곳에 빵과 커피를 시켜 시간을 보내다 해 질 무렵 떠나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무조건 맛집을 하나 들러요. 이상하게 혼자 그렇게 짧은 여행을 떠날 때면 다 성공적이었어요. 그런 운이 따르는 것 같아요.
오늘 인터뷰에서 ‘운이 좋다’는 말을 참 많이 했어요. 운명을 믿어요?
사람마다 어느 정도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운명을 알고 싶지 않고 내던져지는 게 좋아요. 누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도 제 운명은 건들지 않을 거예요.
만약 램프의 요정 지니가 눈앞에 나타나면 어떤 소원을 빌 거예요?
일단 인증샷을 하나 찍고요. 세상에서 가장 비싼 호텔에서 ‘호캉스’하기요!
2024년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길 바라요?
<정신아> 시즌2?(웃음). 만약 들레가 크루즈에 타서 없다고 한다면 카메오라도 시켜달라고 조를 거예요. 너무너무 하고 싶어요. 물론 지금 촬영하고 있는 <원경> 역시 무탈히 대중에게 닿길 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