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가을/겨울 시즌의 페티시 트렌드
특정 물건을 통해 성적 쾌감을 얻는 것 또는 그런 사람을 의미하는 ‘페티시’라는 단어가 트렌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단어에서 느껴지는 S&M적인 성적 취향을 드러내는 옷 정도로만 생각했다간 당황하리만치 고혹적이고 관능적인 아름다움과 마주하게 된다.
페티시, 에로틱, S&M(사디스트&마조히즘) 등등. 정확한 뜻은 몰라도 이쯤 되면 수위 높은 포르노 영화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심해도 괜찮다. 이 야한 단어들의 출처는 다름아닌 이번 시즌 컬렉션, 그러니까 트렌드의 근원지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지극히 변태적인 옷이었다면 대놓고 ‘페티시’라는 단어를 쓰지도 못했을 거고, 새로운 트렌드로 주목받지도 못했을 거다. 선입견을 바닥까지 내려놓게 만든 이번 시즌 페티시 스타일을 설명하려니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 떠오른다. 에로티시즘을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 라는 수식어가 따르는 그의 그림에는 붉게 물든 발그레한 볼과 선홍빛 유두가 자리한 봉긋한 가슴이 자주 등장한다. 신기한 것은 천박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여자의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이 눈에 찬다. 이유는 명확하다. 그의 피사체는 ‘이게 뭐 어때서?’라고 읊조리는 듯 언제고 너무도 당당하다. 당당해서 더 유혹적이다. 과장되지 않아서 더 관능적이다. 이게 바로 클림트의 여자들이 가진 이상하리만치 묘한 마력이다. 그리고 이번 시즌 런웨이를 아슬아슬 물들인 페티시 스타일은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때로는 홀딱 벗은 것보다 온몸을 옷으로 꽁꽁 감싸고 있는데도 더 야해 보일 때가 있다. 또 그 중간 정도인 아스라이 살갗을 드러낸 신체의 한 부위 때문에 애간장이 녹을 때도 있다. 옷을 입고 벗고, 혹은 적당히 걸치고의 경우의 수에서 비롯되는 이 현상은 주로 남자가 여자를 볼 때 본능적으로 작동된다. 다만 그저 야하거나 혹은 적당히 유혹적이거나 아니면 치명적일 만큼 관능적이거나 하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이 주목한 부분도 이거다. 어떤 옷이면 여자의 성적 매력을 높이는 동시에 우아하면서도 고혹적인 자태를 드리울 수 있을까. 결코 천박해 보여서는 안 된다. 이러한 미션을 안고 완성된 이번 시즌의 매력적인 페티시즘에는 몇 가지 공통분모가 있다. 그 첫 번째 요소는 잘록한 허리다. 팔다리와 몸을 완벽하게 감쌌음에도 여자가 섹시해 보인다면 그 이유는 허리에 있다. 모래시계처럼 잘록하게 조인 허리는 여자의 곡선적인 몸에 명확한 경계를 짓는다. 그 경계를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여성성을 드러내는 신체 부위인 가슴과 다리가 덩달아 살아난다. 이 불변의 법칙을 증명하듯 이번 시즌 페티시 스타일에 집중한 디자이너는 대부분 잘록한 허리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두 번째 요소는 은근하게 살갗을 노출하는 레이스와 시스루 소재다. 보일 듯 말 듯 살갗이 비치거나 혹은 실제로는 비치지 않더라도 은근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레이스는 페티시즘의 독보적인 존재다. 잘록한 허리까지 더해진다면 레이스 의상의 성적 파급력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마치 투명 스타킹 같은 효과를 내는 시스루 소재는 페티시, 즉 특정 물건으로 인해 성적 쾌락을 맛보는 현상에 정확하게 명중한다. 몸 전체가 아닌 팔이나 어깨선, 또는 다리를 슬쩍 드러내는 식의 아슬아슬함을 강조하면 시스루 룩의 페티시는 더 짙게 물든다. 세 번째 요소는 슬릿 장식. 발목까지 치렁치렁하게 내려오는 스커트라도 가위로 한번 쭉 자른 듯한 슬릿 하나만 있다면 걸음걸음 여자의 관능은 나타났다 숨었다를 반복한다. 저 선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하는 의혹이 증폭될수록 더 치명적인 유혹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요소는 꽤 흥미롭다. 앞의 세 가지 요소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약간의 재치가 바로 그것이다. 시스루 의상을 입고 깐깐한 사감 선생님 같은 뿔테 안경을 낀다거나(지방시 컬렉션처럼), 허리에는 코르셋 벨트를 하고 손에는 수갑까지 차놓고선 목에는 단정한 흰색 칼라를 두른다거나(루이 비통 컬렉션처럼) 하는 신선한 연출은 관능과 상반된 어떤 요소를 접목해 관능을 더욱 부각하는 대비효과를 제대로 낸다.
이러한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새로운 페티시 스타일을 제시한 대표적인 디자이너는 루이 비통의 마크 제이콥스다. 코르셋 벨트로 과장되게 조인 허리와 하늘하늘한 시스루 소재를 단 팔과 다리, 실처럼 이은 스트랩 부츠, 수갑처럼 연출한 팔찌, 단추를 풀면 알몸이 튀어나올것만 같은 가죽 트렌치코트 등은 지극히 S&M을 연상시키지만 결코 천박하지 않다. 여자를 우아하게 만드는 적당한 미디 길이, 정숙함을 드리우는 새하얀 라운드 칼라처럼 보수적인 면모를 적절히 입힌 덕분이다. 언제나 오트 쿠튀르의 정수를 보여주는 알렉산더 맥퀸도 페티시에 심취했다. 몸을 죄는 듯한 가터벨터와 아찔한 레이스업 부츠로 관능적인 여전사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여기서의 포인트는 화려한 깃털, 가죽과 버무려진 시스루 장식 사이로 슬쩍슬쩍 드러나는 살갗! 1980년대 파워 슈트로 강인한 여성성을 연출한 페라가모도 있다. 넓은 어깨와 대비되는 날렵한 허리, 각진 슈트 안에서 유연하게 움직이는 시스루 블라우스는 은근한 관능이 무엇인지 몸소 느끼게 한다. 우아한 실루엣에 시스루와 레이스 소재를 이따금 매치해 진부하지 않은 레이디라이크 룩을 만들어낸 랑방과 지방시는 이번 시즌 가장 현실적인 페티시 룩을 제안한다. 몇 시즌째 레이스 의상에 푹 빠진 돌체앤가바나는 이번 시즌에도 레이스 드레스로 관능을 노래하며, 인어공주를 떠올리게 하는 반짝이는 비늘 느낌의 의상으로 과감한 노출을 감행한 크리스토퍼 케인은 페티시를 동화처럼 풀어내 탄성을 만든다. 영화 <제5원소>에 나올 법한 미래적인 의상에 슬릿과 시스루 장식을 드리운 자일스의 옷은 강함과 유연함 사이에서 중성적인 관능을 만들어내고, 포효하는 야생동물을 시퀸 소재로 표현한 엠마누엘 웅가로의 옷은 고전적인 실루엣 속에서 조금은 엄격한 관능을 포착해낸. 걸을 때마다 슬릿 사이로 다리를 드러내는 구찌의 드레스는 고혹의 절정이며, 여자의 옆선을 도트무늬 시스루 소재로 너무도 아름답게 연출한 스텔라 맥카트니는 다시 없을 우아한 페티시 룩을 펼쳐 보인다.
이 모든 관능적인 아름다움은 여성성에서 비롯된다. 거기다 여성성을 궁극으로 끌어올리는 옷이라는 매개체도 있다. 비록 타고난 관능이 없을지라도 이번 시즌만큼은 ‘옷’으로 그 탐나는 관능에 흠뻑 취해보길. 마치 클림트의 여인처럼 당당하고 뻔뻔하게.
최신기사
- 에디터
- 박선영
- 포토그래퍼
- KIM WESTON ARN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