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라이딩 룩은 안녕
귀족들이 즐기던 스포츠, 승마에서 유래된 라이딩 룩이 이번 시즌에는 중세 기사의 위용과 승마 기수의 날렵함까지 걸쳤다. 경주마 서러브레드처럼 도심을 날쌔게 질주할 근사한 라이딩 룩의 조건들을 이야기한다.
영화 <코코 샤넬>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20세기 초, 승마를 즐기는 상류층의 모습이 보여지는데, 남자들과는 달리 몸을 꽉 조이는 코르셋에 드레스를 입고 말을 타는 여자들의 모습이 코코 샤넬의 눈에는 영 불편하다. 그녀는 곧장 가위로 남자의 팬츠 슈트를 싹둑싹둑 잘라 자신의 몸에 맞게 고쳐 입고 말에 오른다. 처음에는 경박하다는 듯 쳐다보던 부인들도 어느새 그녀의 용기와 편한 옷차림을 부러워한다. 남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고삐를 힘차게 잡아당기던 샤넬의 모습은 누구보다 기세 넘쳤다. 영화 속에서 샤넬은 승마바지(무릎 윗부분은 넉넉하고, 무릎에서부터 발목까지는 딱 붙는 바지인 ‘조퍼스(Jodhpurs)’가 대표적이다)에 화이트 셔츠와 체크무늬 베스트, 스리 버튼의 싱글 브레스티드 재킷, 일자로 곧게 뻗은 낮은 굽의 가죽 부츠를 신고 있는데, 이 옷차림이 20세기 패션의 초창기 라이딩 룩의 모습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날렵하고 간편하게 변형된 승마복처럼 패션으로 만나는 라이딩 룩 역시 에르메스, 구찌, 랄프 로렌과 같은 승마DNA 보유자들을 주축으로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말 타기 딱 좋은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에는 어김없이 라이딩 룩이 조명받는다. 그런데 이번 시즌에는 그 강도가 더 세다. 본디 고급스럽고 클래식한 멋이 충만한 데다 이번 시즌 트렌드 톱 리스트를 채운 매니시 스타일 ,가죽, 검정과 갈색, 투박한 부츠 등과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때로는 지극히 고전적으로, 때로는 자유분방한 매력으로 런웨이를 질주한 라이딩 룩은 크게 세 가지 스타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귀족적이고 고전적인 스타일. 스리 피스 슈트, 글렌 체크와 아가일 체크무늬, 무릎까지 오는 볼록한 모양의 니커보커 팬츠 등을 기본으로 하는 19세기 영국 신사의 패션을 생각하면 되는데, 당시 최고의 패션 아이콘이었던 윈저 공이 승마나 골프 등의 스포츠를 즐길 때 입었던 의상과 거의 흡사하다. 이를 현대 여성의 몸에 재현한 랄프 로렌의 컬렉션은 가장 귀족적고 고전적인 라이딩 룩을 보여준 예다. 정통 영국 스타일을 1960년대의 직선적인 실루엣과 접목한 타미 힐피거 컬렉션은 조금 더 젊은 버전이 되겠다. 가죽 장갑과 벨트 ,승마 모자와 부츠 등의 액세서리는 매력적인 조연이었다.
두 번째 스타일은 가장 많은 디자이너가 선택한 중세 기사의 위용을 더한 라이딩 룩이다. 나폴레옹의 기세가 느껴지는 밀리터리 무드를 곁들인 알투자라 컬렉션의 모델은 프린지 장식이 찰랑대는 날렵한 사이하이 부츠를 신고 런웨이를 호령했다. 자수 프린트의 아르누보풍 실크 팬츠 슈트를 걸친 구찌의 모델들은 조퍼스 팬츠와 일자로 곧게 뻗은 라이딩 부츠가 만들어내는 잘 빠진 실루엣 때문에 키가 한 뼘은 더 커 보였다. 라이딩 룩의 본좌 에르메스 컬렉션은 낙낙한 가죽 케이프와 화이트 셔츠, 자연스러운 주름의 롱부츠, 페도라를 조합해 간결하게 드러내는 위용이 얼마나 근사한지 노련하게 펼쳐 보인다.
마지막을 장식할 스타일은 승마복에서 영감 받은 본질에 충실한 라이딩 룩이다. 한눈에도 승마 기수가 떠오르는 옷차림을 연출한 이들이 이번 시즌 라이딩 룩을 독보적인 트렌드로 만든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왕좌는 지방시 컬렉션.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실크 블라우스와 반질거리는 가죽 재킷, 투박한 스웨이드 사이하이 부츠로 소재의 극적인 대비를 연출했는데, 덕분에 더없이 드라마틱한 라이딩 룩이 탄생했다. 에르마노 설비노의 모델들은 말에서 내린 직후 런웨이를 걷는 듯한 프로페셔널한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압권인 것은 부드러운 울 소재의 조퍼스와 그의 선을 제대로 살리는 타이트한 상의와의 조합!
이처럼 이번 시즌 라이딩 룩 트렌드를 이끄는 세 가지 스타일 안에서도 연출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취향대로 골라 입자. 그리고 몸소 느껴보자. 세기를 넘어 사랑받고 있는 라이딩룩의 그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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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박선영
- 포토그래퍼
- KIM WESTON ARN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