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를 외치다

여기, 모피를 입지 않는 여자들이 있다. 동물의 희생에 대한 측은지심과 나부터라도 입지 말아야 한다는 완고한 사명감은 같았지만 각자의 삶 속에서 부딪히는 모순이나 죄책감의 크기는 제각각이었다.

모피를 안 입은 지는 이제 6년 정도 됐다. 사실 모피를 입지 않는 것까지는 쉬웠다. 모피 생산 과정에서 벌어지는 잔인함을 담은 영상 몇 개를 보고 난 뒤엔 도저히 죽은 동물을 몸에 걸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고민은 그 이후에 찾아왔다. 신발장을 가득 채운 가죽 신발과 침대 위 거위털 이불, 거실 슬리퍼의 포근한 양털 밑창까지, 내 삶은 이미 너무 많은 동물의 희생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거다. 패션 에디터라는 직업이 주는 크고 작은 아이러니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겨울이면 돌아오는 모피 제품을 다룰 때마다 묘한 찝찝함과 죄책감이 들었고, 모피를 입지 말라는 주장이 담긴 나의 기사는 다른 이의 모피 화보와 함께 같은 달 같은 잡지에 실리기도 한다. 게다가 기름진 고기는 또 얼마나 맛있는지! 모피를 입느냐 마느냐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안 입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그 결정이 내 삶의 어느 부분까지 영향을 미칠 것인지 타당한 기준을 세우고 맞춰나가는 게 더 중요했다. 문득, 모피를 입지 않는 다른 여자들이 궁금해졌다. 어떤 이유로 모피를 거부하는지, 과연 그녀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PART. 1 신념과 의무 사이
홍보 대행사 APR에이전시에서 10여 년간 럭셔리 브랜드의 홍보를 담당해온 유상희 차장은 개인적으로는 모피를 반대하는 입장이면서도 직업상 모피를 홍보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러니를 겪었다. 자신이 맡은 브랜드에서 겨울 주력 상품으로 여우털 코트나 송치 소재의 클러치백을 내놓을 때,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신념과 의무 사이에서 갈등한다.

패션 홍보 대행사에서 모피 안 입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요. 모피는 패션의 중요한 한 산업이니까요. 저도 산업 그 자체로 인정은 해요. 제가 모피를 안 입는다고 해서 입는 사람들을 뭐라 하고 싶지도 않고요.

모피를 보고 예쁘다 생각한 적은 없어요? 물론 있죠. 얼마나 멋있는지 감탄하기도 하고 쓰다듬어보기도 해요. 그런데 요즘 모피 트렌드를 보면 마냥 예쁘다는 생각만 드는 건 아니에요. 예전에는 통으로 된 모피 제품이 많았는데 요즘은 갈수록 얇고 가볍고 편하게 입으려 하잖아요. 그렇다 보니 처음 모피를 입기 시작한 ‘보온’이라는 목적과는 상관없이, 모피를 잘게 잘라서 니트를 짜듯 얼기설기 엮는다든지, 아니면 등판은 빼고 앞판에만, 혹은 포켓과 소매 부분에만 모피를 덧대는 등 부분적으로만 장식하는 경우가 많아요. 오로지 멋을 위해 생명이 희생된다고 생각하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요.

모피를 안 입으면서 모피 트렌드는 꿰뚫고 있네요. 홍보를 하며 알게 되는 것들이고, 알게 되면서 점점 더 반감이 생기는 부분이죠. 예전에 한 모피 브랜드를 홍보하면서 제작 과정에 대해 배웠는데, 사지를 잘라서 산 채로 껍데기를 벗겨내는 과정을 담은 비디오라든가, 네 발과 머리가 그대로 달린 채 납작하게 걸려 있는 모피를 봤을 때 엄청 마음이 안 좋았어요.

모피 브랜드 홍보를 또 맡게 되면 어떡해요? 저도 결국은 회사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보니 주어진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 예전에는 회사에 저의 입장을 얘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연차가 어리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 고민을 거친 지금은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어요. 결국 홍보도 진정성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모피를 주력으로 하는 브랜드는 피하고 싶어요.
가죽 제품은 쓰죠? 안 써야지 하는 생각도 사실은 해봤어요. 엄밀히 따지면 모든 가죽 제품도 동물의 희생을 요하는 거니까 결국 쓰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더라고요. 저는 채식주의자도 아닌데, 소고기도 다 먹으면서 가죽을 안 입겠다고 하는 건 좀 앞뒤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스스로 기준을 내린 게, 동물이 오로지 껍데기를 제공하기 위해 죽임을 당했느냐 아니냐로 판단하는 거예요. 소는 고기를 제공하고, 가죽은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나오기도 하니까. 

그럼 거위털과 오리털은 어때요? 그건 안 입어요. 일단 저는 추위에 노출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회사원이고. 거위털 패딩이 따뜻한 건 잘 알지만 그냥 솜 패딩, 울 코트만 입어도 충분해요. 

기준이 참 애매한 것 같아요. 저도 가죽과 거위털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더라고요. 제가 만약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있는 직업을 가졌더라면 거위털 점퍼를 입었을지도 몰라요. 결국은 선택에 달린 거죠. 또 가죽은 포기하고 난 뒤 대안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어요. 그래서 용기도 잘 안 나고요. 솔직히 저도 거창한 환경 운동을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단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덜 입자는 거죠.

PART. 2 포기해도 아깝지 않은 것들
고엔 제이의 디자이너 정고운은 에디터의 학교 동기로 거의 10년 동안 서로의 성장을 지켜본 사이다. 분명 학생 시절 악어가죽이나 뱀가죽 같은 이그조틱 레더와 모피를 사랑했던 친구인데, 디자이너가 된 지금 그녀는 인조 모피로 옷을 만든다. 그 변화에 대해 물었더니, 그녀는 많이 알아갈수록 포기하는 것이 생기더라는 대답을 했다.

언제부턴가 모피를 안 입더라? 응. 한 2~3년 전쯤인가? ‘피스러브앤언더스탠딩’의 이희문 디자이너 알지? 하루는 그를 만나러 나가면서 모피 코트를 입은 거야. 그날 그가 그러더라고. 너같이 배울 만큼 배운 애가 어떻게 남의 고통에 무감각할 수 있냐고. 그러고는 모피 생산의 잔인성에 대해 설명해줬어. 그에게 얘기를 들은 직후 내가 가지고 있는 털옷은 몽땅 없애버렸지. 도저히 못 입겠더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는 모피를 휘감은 사람들조차 곱게 보이지 않아. 

무지해 보이는 건가? 근데 나도 한때 모피를 너무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어떤 마음으로 그걸 돈 주고 사는지는 이해해. 하지만 이제 어두운 면을 알아버려서 더 이상은 못 입고 못 만들겠어.

근데 그 전에도 모피 제품은 안 만들었잖아? 사실 처음 시작할 때는 자금이 문제였지. 모피를 취급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또 모피를 제대로 가공하는 공장도 찾기 힘들어. 그게 다 수작업이거든. 근데 다행이야. 지금은 모피 생산을 해볼 수도 있지만 그 전에 신념이 생겨버렸으니까. 모피를 사용하지 않아도 옷을 아름답게 만들 방법은 충분히 많아. 

대신 인조 모피는 다루지? 응, 지난겨울 시즌에 미즈하라 키코가 입어서 대박 난 인조 밍크 코트 같은 거. 근데 그게 일본에서는 참 잘됐는데, 홍콩이랑 중국 쪽 시장에서는 반응이 별로였어. 그쪽 바이어가 말하길, 이게 만약 진짜 모피였으면 정말 잘 팔렸을 거라는 거야. 그러니 내년에는 모피 코트를 꼭 만들라고 하더라.

그래서 만들 생각이야? 아니 절대로.

세일즈가 보장되는데도? 포기해야지. 돈 조금 못 벌어도 괜찮아.

솔직히 저널리스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디자이너가 소신 있게 옷을 만드는 게 훨씬 멋지기는 해. 스텔라 맥카트니처럼. 맞아. 그리고 그녀의 셀링 포인트가 그거잖아. ‘우리는 동물을 사랑하고, 희생 없는 건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그 가치관을 판매하는 거지. 나는 그게 정말 세련됐다고 생각해. 마음속으로는 반대하지만 수요가 있으니 일단 만들겠다는 것보다 낫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물개들을 때려 죽이는 사진, 시베리아의 모피 공장에 털이 벗겨진, 새빨간 물개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는 끔찍한 사진을 본 이후로는, 어후….

그런 사진을 보면 경각심이 들어? 당연하지. 완전 효과 있어. 

그럼 겨울에 추울 때는 뭘 입으면 좋을까? 껴입어야지! 내의도 입고! 사실 모피도 그렇고, 거위털도 그렇고 겨울에 티셔츠 한 장 입고 걸쳐도 든든한 건 맞아. 근데 그거 알아? 내가 이번 시즌 패딩 점퍼 만들 때 쓴 건데, 신슐레이트라는 신소재가 있어. 근데 이게 거위털만큼 가볍고 따뜻하거든. 대체할 소재는 얼마든지 있어. 특히 충전재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굳이 내용물을 그렇게 끔찍한 거위털로 채워 넣을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얘기해놓고 다음 시즌 점퍼 후드에 모피 달고 그러면 안 돼. 여우털 코트로 어디 돈 좀 벌어볼까? 하하하(정색하며) 걱정 마, 안 해.

PART. 3 모순 속의 선택

사진가 김태은의 스튜디오에는 대형견 구름이를 비롯해 그녀가 키우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 우르르 뛰어다닌다. 동물 사랑이 넘치는 그곳에서 김태은과 함께 촬영하는 것은 에디터의 입장에서 이미 모피는 촬영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선택을 한 셈. 그렇게 모피에 대한 선택은 스스로 내리는 것이라고 김태은은 얘기한다. 비록 그것이 모순일지라도 말이다.

모피는 처음부터 안 입은 건가요? 일단 그렇게 비싼 걸 사 입을 생각을 안 해봤어. 또 어릴 때는 그런 거 잘 몰랐잖아. 그냥 죽은 걸 벗겨서 입나 보다 했지, 그걸 따로 사육해서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줄 누가 알았나? 사실 나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잔인한 영상을 본 적은 없어. 얘기를 듣기만 해도 끔찍하거든. 나는 시각적으로 민감하고 동물에 대한 측은지심도 강해서 만약에 영상을 본다면 격분해서 피켓 들고 시위할지도 몰라.

산업이 있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부터는 못 입게 된 거군요? 인지하는 순간 그건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빈티지니까, 몇 번 손을 거쳤으니까’ 하면서 가지고 있던 것들도 어느 순간 혐오스럽게 느껴진 것 같아. 내 옷장에 걸려 있는 것 자체가 끔찍한 거야. 그래서 다 갖다 버렸어. 다른 사람이 입는 것도 싫어서 그냥 버렸어. 플리마켓 이런 것도 안 하고. 

이후에는 모피가 다르게 보이던가요? 모피는 여전히 아름답지. 하지만 문제는 이거야. 옛날에 못살았을 때는 개, 고양이, 쥐, 뭔들 못 먹었겠어? 배가 고픈데. 어떻게든 영양보충을 해서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면 나라도 먹었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기술이 발달하고, 삶이 풍족해져서 다들 잘살고 있잖아. 그래서 그런 것들이 ‘혐오 식품’이라 불리는 거고. 그런 의미에서 모피는 패션의 혐오 식품 같은 거야. 의미 없는 사치품. 

패션의 본질은 어떻게 보면 생존 이상의 미를 추구하는 것인데, 패션 사진가로서 이런 신념을 지켜나가다가 불이익을 당한 적은 없나요? 불이익? 모피 광고가 안 들어오는 게 불이익일까? 내가 그런 걸 안 찍기 때문에 큰돈을 못 번다면 딱 고만큼만 부족하게 살지 뭐. 

오리털과 거위털은 입나요? 응, 입어. 우리는 추운 겨울 야외 로케이션 촬영이 많기 때문에 그런 옷 없이는 사실 좀 힘들거든. 너무너무 추우니까. 이기적인 모순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결국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해. 나의 기준과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선택.

하긴, 저도 야외 촬영에는 별 수 없더라고요. 내가 얼마나 친환경적인 삶을 사는지는 측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노력하는 거야. 모피 코트는 내가 입겠다고 선택하는 순간 털을 제공하는 동물에게는 아주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거잖아. 나는 사람들이 피 흘리는 선택을 최대한 줄였으면 좋겠어. 

최선의 선택을 하려면 공부가 좀 필요한 것 같아요. 많이 알수록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지. 모피를 입지 말라고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는 없지만 우선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 인기 있는 사람, 능력 있고 잘나간다는 사람들이 그런 것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불필요한 것을 줄여나가는 추세잖아. 덕분에 사회적인 인식도 많이 바뀌었고.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해. 펜디 같은 거대 모피 브랜드가 그 뛰어난 장인 정신과 감각으로 똑같이 입이 떡 벌어지는 인조 모피 제품을 만들면 얼마나 근사할까 하는 상상. 결국엔 사업이니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쪽 업계의 권력자 중에 만약 그런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면 진짜 멋질 것 같아.  

김태은의 근사한 상상을 듣고 있노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불필요한 희생을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남용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선택이나, 시장의 수요와는 상관없이 모피 제품을 안 만들겠다는 정고운의 결단, 신념과 의무 사이에서 늘 갈등하지만 자신만의 기준에 맞춰 살아간다는 유상희의 소신은 그 자체로도 이미 가치 있는 것이었다. 나 하나 안 입는다고 모피 생산율이 줄어들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시작은 시작인 거다. 

    에디터
    패션 에디터 / 박정하
    포토그래퍼
    홍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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