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가득한 빅토리아 시대의 귀환
19세기 말,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서 영감 받은 2015년 가을/겨울 패션은 다시 한 번 낭만 가득한 사치스러운 황금기를 꿈꾼다. 이번 시즌의 빅토리안 무드는 어둠, 날카로움, 남성성이 더해졌다는 점을 기억할 것.
패션 기자가 왜 맨날 슬리퍼만 신고 다니냐’는 질문에 '이게 유행이야’ 라며 어물쩍 넘어가지만 실상 마음은 불편하다. 클래식, 베이식, 놈코어 등의 단어로 포장된 유행을 핑계로 긴장감을 내려놓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편안한 스타일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은 지적인 영혼이 충만한 일상적 삶을 유지하는 것과 긴장감을 잃지 않고 우아하고 멋진 삶을 유지하는 것이 서로 다른 길임을 깨닫게 해준다. 가을/겨울 시즌을 시작한 디자이너들 역시 지나치게 일상적인 룩을 추구하는 놈코어에 철저하게 반하는 ‘안티 놈코어’를 주장한다. 그 시작을 알린 것은 바로 미적인 모든 것이 풍요로웠던 빅토리아 시대다!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키워드는 이미 지난 봄/여름 프라다, 루이 비통, 에르뎀, 디올 컬렉션을 통해 트렌드의 바통을 이어받을 조짐을 보였다. 가을/겨울 시즌의 시작과 동시에 우아하게 목을 감싸는 19세기풍 하이 칼라, 흐드러지게 피어난 러플, 에스트로겐 분비를 자극하는 낭만적인 레이스, 호황을 누린 대영 제국의 전원풍 프린트가 폭발하듯 런웨이를 물들였다. 많은 디자이너가 맥시멀리즘의 주자로 빅토리아 시대를 선택한 것은 사조의 경계가 무너지고 하이와 로우가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지금이 100년 전과 닮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으로 극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한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영국 사회는 여유롭고 호화로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번영과 풍요 속에서 숨막히는 엄격함과 정숙을 병적일 만큼 집요하게 요구했다. 또한 엄밀히 말하면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함은 독창적이라기보다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까지 이전 시대의 요소를 모방하며 화려한 장식을 더한 교합의 결과물이었다.
올가을 빅토리안 무드를 모던한 방식으로 끌어안은 디자이너는 지방시의 리카도르 티시. ‘Victorian-chola Girl’을 주제로 블랙 레이스와 러플, 기교적인 장식을 사용해 빅토리아 시대의 어두운 면을 센슈얼하게 부각하고, 라틴아메리카의 스트리트 문화를 더해 동시대적인 빅토리안 스타일을 선보였다. 1800년대의 얼굴 패치에서 영감을 얻어 사파이어, 루비 등을 얼굴에 장식해 빅토리아 시대의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하드 코어 로맨티시즘의 절정을 이끌어냈다. 하드 코어적인 로맨티시즘으로 불러들인 것은 알렉산더 맥퀸의 사라 버튼도 마찬가지이다. 장미꽃처럼 층층이 겹쳐 부풀린 실루엣의 드레스, 플라워 패턴을 자카드한 얇은 가죽 블랙 코트, 서정적인 물결이 일렁이는 주름 장식 실크 톱 등은 블랙의 엄격한 기운, 미드 <페니 드레드풀>을 연상시키는 창백한 피부와 붉은 입술 메이크업, 불손하게 헝클어진 헤어 스타일과 만나 멜랑콜리한 빅토리안 무드를 완성했다. 빅토리아 시대 군복의 견장, 최고로 사치스러운 태슬 장식, 유연하게 흘러내리는 시폰 블라우스를 되살여 빅토리아풍의 밀리터리 룩을 선보인 로베르토 카발리의 컬렉션도 주목해야 한다. 현대적인 빅토리안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인 유약함과 견고함의 조화를 발견할 수 있다. 빅토리안을 필두로 맥시멀리즘의 유행을 여실히 증명한 디자이너는 절제와 담백을 설파해온 피비 파일로다. 미니멀리스트로 알려진 그녀가 선보인 종처럼 넓게 퍼진 소매는 과감한 러플 장식의 빅토리아 시대 드레스를, 보석으로 치장한 신발은 당대 여성들이 애정한 커다란 스톤을 장식한 장신구를 떠오르게 한다. 세기의 미니멀리스트조차 빅토리안 무드를 선택했다는 것은 올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맥시멀리즘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현실을 중시하는 트렌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세린느의 컬렉션에서 알 수 있듯이 빅토리안 무드는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점진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그 최대 수혜 영역은 바로 액세서리! 스텔라 맥카트니와 샤넬의 볼드한 진주 초커, 발렌시아가와 프라다의 대담한 브로치, 미우미우의 반짝이는 크리스털 이어링이 이렇게 속삭인다. 치명적이고 불손한 낭만주의 세계가 열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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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패션 에디터ㅣ남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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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