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STRANGER / 이상윤

무대 위에서 이상윤은 또 한 번 기꺼이 깨지고 부서진다. 익숙한 듯 낯선 이의 얼굴로.

코트, 셔츠, 팬츠와 샌들은 모두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

풀오버 셔츠와 팬츠는 로에베(Loewe).

재킷은 보테가 베네타 (Bottega Veneta).

셔츠와 팬츠는 아미(Ami).

수척해 보여요. 덕분에 이상윤의 낯선 얼굴을 포착했어요. 일부러 감량을 했나요?
요즘 그런 얘기를 자주 들어요. 운동은 늘 하지만, 감량을 위해 유산소운동을 더 하거나 먹는 양을 줄이지는 않았어요.

연극 <클로저> 때문은 아닐까요? 4월부터 7월까지 장장 3개월의 여정이었죠.
2월 말부터 연습을 시작했으니 더 길었어요. ‘래리’와 함께 살면서 아무래도 그가 짓는 표정이나 감정이 얼굴에 남아 있는 것도 같아요. 저랑 다른 감각으로 사는 사람이거든요. 연기할 때면 늘 짠했어요.

어떤 부분이 그토록 짠했나요?
래리는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무한한 동경, 결핍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늘 불안정하죠. 우연히 안나를 만나 동경하던 것에 가까워지지만 한계에 부닥치며 그 속에서 허덕이는 자신을 마주해요. 불편함 속에서 실수가 반복되면 갈등과 균열이 생기잖아요. 그로 인해 진짜 ‘나’로 존재하는 순간이 드물어요. 래리가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순간은 앨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흩어진 세 사람이 다시 마주할 때뿐인 것 같았어요.

<클로저>의 국내 무대는 2016년 이후 8년 만이에요. 2024년에는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
지금까지 공연된 <클로저>는 수위가 높은 작품으로 유명하더라고요. 프로덕션에서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결로 해석하기를 원했어요. 연습 과정에서 ‘시의성’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고요.

좀 더 담백하게 가려고 했나요?
그래서 저에게도 제안이 온 것 같았고요. 이 작품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과 이야기를 과장되게 묘사한 일종의 블랙코미디인데, 그 포장지가 성적 코드예요. 사회문화적 배경이 영국일지라도 지금 우리의 관객은 한국인이잖아요.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을 다른 방식으로 번역하고 감정과 서사에 집중하려 했어요. <클로저>는 결국 모두가 생각하는 사랑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품이거든요. 사랑은 형태와 색, 깊이가 제각각이고, 누구의 것이 맞다 틀리다를 평가할 수 없으니까요.

사회문화적 배경이 영국과 서울이라는 점에서 시의성 외에 고려할 요소가 많지 않았나요?
그 지점이 참 어려웠어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영국의 계급문화인 ‘포시(Posh)’를 표현하는 게 한계였죠. 한국에서는 의사라는 직업에 명예와 권위가 따르지만, 영국에서 공공의는 평범한 직장인에 가까워요. 반면 래리가 사랑에 빠지는 안나는 영국에서 귀족 계급에 속하는 포시예요. 평범한 남성이 신분이 다른 여성을 사랑하게 되는 요소가 있는데, 우리 사회와 다르니 이걸 표현하기가 어려웠어요. 영국이었다면 배우가 포시 악센트를 쓰면 전달되는데 저희는 의상의 힘을 빌렸죠.

공연이 끝으로 향할수록 무대 위 시간이 더 익숙해지나요?
무대에서는 늘 솔직하고 대본에 충실하려고 해요. ‘연기’를 하기 때문에 인물의 감정에 몰입해 대사를 뱉고 감정을 표출하지만 100% 수용되지 않았다면, 회차가 쌓일수록 ‘래리니까’라는 마음이 커져요. 래리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하고, 이렇게 말하고, 그런 행동을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퍼즐이 맞춰지더라고요.

감정이 깊어질수록 무대 위에서는 자유로워지겠네요?
점점 그래요. 대사와 행동이 익숙하고 편해지면서 상황에 더 집중하게 돼요. 희한한 경험이에요. 너무 재미있죠. 그 재미가 충만한 날은 오히려 다음 공연이 걱정돼요.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작업이네요. 2019년 <올모스트 메인>으로 연극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가 기억나요?
당시 저희 소속사 배우끼리 뭉쳐 올린 작품이에요. 종종 밥 먹고 술 한잔 기울이는 자리가 있었는데, 누가 ‘좋은 배우들이 점점 많아지는데, 연극 한번 올려보자’는 아이디어를 던졌어요. 연극 경험이 있던 민성욱 배우가 연출을 맡고, <올모스트 메인>이라는 대본도 추천하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됐어요. 옴니버스 구성이라 스케줄을 조율하기도 용이했고요. ‘연극을 꼭 한번은 해봐야지’ 했던 터라 재미있게 진행한 프로젝트였어요.

이후 <라스트 세션>으로 그 여정이 이어졌어요. 무려 삼연을 했고요.
조달환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을 관람하러 가서 알게 된 프로덕션이 있었어요. 뒤풀이 자리에서 연극에 관심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후 <라스트 세션> 대본을 보내주셨어요. 근데 봐도 모르겠더라고요.(웃음) 연극이 다 이런 건가 혼란스러워서 결정을 보류하고 있던 중에 <올모스트 메인>을 올리게 된 거고요. 당시 제작사에서 신구 선생님과 함께 작품을 보러 오셨는데, 알고 보니 그 프로덕션에서 저와 신구 선생님으로 <라스트 세션>을 올리고 싶어 하셨더라고요. 선생님도 제 공연을 긍정적으로 보셨나 봐요. 이후 제작사를 통해 신구 선생님이 참여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무조건 하겠다고 했어요.

어떤 믿음이 그 선택을 이끌었어요?
신구 선생님과 일대일로 연기할 수 있는 기회다 싶었죠. 저야 대본을 잘 볼 줄 모르지만 선생님이 출연을 결심하셨다는 건, 제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 분명 좋은 대본이라는 인정이 있을 테니까 믿고 뛰어들었어요.

같은 작품, 같은 배우와 삼연까지 가는 건 흔치 않은 일이죠.
초연을 하고 1년 반 정도 지났을 때 재연을 논의했어요. 선생님이 의지가 있으셨고,  저도 선생님과 또 한 번 붙어보고 싶었어요. 몇 달간 치열하게 공연했지만 이 속에 뭐가 더 있을까 파헤쳐보고도 싶었고요. 함께하는 배우가 바뀌면서 달라지는 점도 많고 파면 팔수록 계속 새로운 지점이 보이더라고요. 삼연 때는 사실 고민이 많았어요. 논의 중인 작품도 있었고요. 어느 날 선생님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됐는데, 선생님께서 삼연 얘기를 꺼내면서 ‘너랑 나랑 이번에 하면 무조건 전과 다르게 더 잘해야 돼!’ 하시는 거예요. 제가 출연을 안 할 거라는 한 치의 의심도 없으시더라고요.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하시는데 안 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선생님을 택시에 태워 보내드리고 소속사 대표님께 바로 전화했어요.

신구 선생님은 어떤 어른인가요?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이라는 말을 몸소 실천하세요. 연습 첫날 선생님 대본 두께가 2배는 불어나 있어요. 100개의 연기를 해야 한다면 95개는 무대에 오를 때까지 크게 변하지 않아요. 5개 정도는 연출, 배우와 맞추는 과정에서 변하는 거고요. 완성형에 가깝게 준비하시는 거죠. 연습도 늘 전력투구하고 무대 위에서는 연습 때처럼 자기만의 속도와 밀도를 잃지 않으세요.

연극을 시작한 때가 배우로서 사춘기의 시간이었나요?
그 시기가 좀 그랬어요. 배우로서 한계를 느끼기도 했고, 일은 좀 쉬고 오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어요. 여행을 통해서 생각이 전환돼서 <집사부일체>라는 프로그램에도 출연했고요. 연극 역시 연기적인 부분에서 나를 좀 깨보자는 실천 중 하나였고요.

이후에도 계속 연극 무대에 오르는 이유는 뭔가요?
‘깨지고 싶어서’인 것 같아요. 깨진 뒤에 비로소 채워질 수 있잖아요. 물론 촬영장에서도 깨질 때가 있지만, 한정된 시간에서는 완성을 위해 최고가 아닌 최선의 방향으로 타협하는 경우가 많죠. 연극은 오랜 시간 준비하며 반성하고, 채우는 과정의 연속이에요. 연기를 우연히 시작해 당장 맡겨진 것을 하느라 급급하던 시간이 지나고 역할과 책임이 커지며 더 넓은 세계를 보게 됐어요. 캐릭터도 다양해지는데 100% 소화하지 못한다는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그 답을 연극에서 찾았던 것 같아요.

연극이라는 매체가 가진 힘은 뭘까요?
현장감요.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라고 느껴요. 우스갯소리로 ‘이제 콘텐츠의 장르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OTT냐 아니냐로 나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자본이 몰리고 세력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곳이죠. 반면 연극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요. 현장감이라는 매력을 대체할 콘텐츠는 없거든요.

첫 연극 연습 현장을 기억해요?
매일 탈탈 털려 퇴근했어요. 반성하고 연습해서 현장에 가면 또 새로운 과제가 눈앞에 놓여요. 무대는 누구나 설 수 있는 곳도 아니에요. 현장 관객은 냉철하기 때문에 철저한 자기 객관화, 죽을 둥 살 둥 치열하게 하도록 책임감을 갖게 하는 곳이에요.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
얼마 전 연극 <햄릿>을 관람했는데, 보는 내내 ‘어렵겠다’ ‘대단하다’며 감탄했어요. 이렇게 정통에 가까운 고전극은 처음 봤거든요. 기본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 체감했어요. 연기를 처음 배울 때 발성과 발음에 대한 얘기를 자주 해요. 무대에서 객석 끝까지 소리가 정확히 전달되어야 한다는 거죠. 일종의 절댓값이지만 영화, 드라마, 현대극에서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큰 흠이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고전극은 그 차이 하나로 배우를 향한 집중도가 완전히 달라지더라고요. 만약 언젠가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저렇게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겠구나’ ‘해낼 수 있는 배우가 되어야겠구나’ 다짐했어요.

    에디터
    김정현
    포토그래퍼
    LEE JUN 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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