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곳에서나 느껴지는 은은한 나무 향과 자연의 소리. 비가 내리거나 맑거나, 한옥에서 보내는 하루만으로도 삶이 다시 충만해진다.
어릴 적 외갓집은 한옥이었다. 창호지에 구멍을 뚫거나 아궁이에서 불장난을 하는 재미는 컸지만, 때로 무섭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한 곳이었다. 종종 생각한다. 그 집이 남아 있었더라면 어떤 모습의 한옥이 됐을까?
단종의 마지막 숨결이 서린 영월의 푸른 숲길을 거치고 강을 건너 만난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한옥을 뛰어넘는다. 강이 구불구불 흐르고, 빼어난 형태를 자랑하는 소나무들이 하늘로 향한 영월에 자리한 이곳은 찾아오는 사람에게만 속살을 보여준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이 미덕이던 옛 선조의 가치처럼, 겉으로는 소박해 보이는 문을 열면 아늑한 동시에 위용 넘치는 한옥 공간이 펼쳐진다. 뼈대만 한옥인 곳, 뼈대조차 가짜인 한옥이 난무하는 가운데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를 만든 조정일 대표는 모든 것이 진짜인 한옥을 꿈꿨다. “잘 지은 한옥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양식입니다. 한옥은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어우러진 공간이죠. 목재부터 공법까지 전통 한옥 방식을 고집하되 당시 기술력으로 이루지 못한 부분을 더했습니다.”
한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무, 그리고 대목장으로 불리는 목수다. 한옥 건축에 적합한 목재는 10년 동안 건조 과정을 거쳐야 완성되는데, 이 장기간의 건조 기간은 제대로 된 한옥을 짓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IT 1세대 벤처 사업가였던 조 대표는 이 과정을 위한 기술 개발에 힘썼고, 약 6개월 안에 목재 내 수분 함유량인 함수율을 최대치인 15%까지 낮추는 공법을 개발했다. 이는 문화재 복원 시 승인되는 함수율 25%보다 낮은 것으로 시간이 지나도 목재의 변형과 뒤틀림을 방지할 수 있다. “목재 관리부터 기와까지, 대목장이 전 과정을 함께합니다. 한옥에 대해 방음, 보온, 난방, 차음이 안 된다는 편견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건 한옥의 문제가 아니라 공법의 문제입니다. 나무를 연구하고 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태양, 바람 같은 자연 요소와 소재, 공법을 12년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섬세한 공정으로 완성된 이곳에서는 물론 방음과 냉난방의 문제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한옥의 멋을 해치지 않도록 갤러리와 협업해 작품과 소품, 기물을 선정하는 과정, 기와 한 장 허투루 놓지 않는 과정이 공간 곳곳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조금씩 다른 색깔의 기와를 조화롭게 얹은 지붕은 시간을 입고 더욱 아름다워질 게 분명했다.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의 총규모는 건축 연면적 1만6332㎡에 달한다. 전통 한옥 호텔 78동 1백37실과 숙박객이 아니어도 방문할 수 있는 열린 공간도 들어설 예정이며, 현재는 두 동의 영월종택과 선돌정(7월 중 오픈)이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머무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공간
“이곳을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한옥스테이 하면 와닿을 것 같지 않았죠. 고민 끝에 ‘한옥 공간’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조남희 부사장의 말처럼,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에서의 경험은 한옥 민박이나 고택 체험과는 전혀 다르다. 한옥을 완성하는 건 단지 건축뿐이 아니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원경, 중경, 근경의 세 가지 풍경이 있어야 비로소 옛 선조들이 그토록 사랑한 한옥이 완성되는 것. 하룻밤을 머물 영월종택 별채에 들어섰다. 아파트에서 섀시와 커튼을 겹겹이 치고 사는 나는 창문부터 모조리 열었다. 운무가 피어오르는 수묵의 산이 원경으로, 영월의 자랑인 선돌 명승지의 다섯 절벽이 중경으로, 소나무와 담벼락, 기와가 빚어내는 근경이 바로 시야에 들어온다. 대청과 누마루에도 나가보았다. 대청은 의자 하나도 창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세심한 높이로 완성되었고, 누마루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기에 체면 상관없이 누울 수 있는 한옥만의 멋진 공간이다. 장마철이 시작되어 비가 그쳤다 내렸다를 반복했지만, 한옥에서는 그마저도 재미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 들리는 빗소리와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의 전주곡, 개구리와 새소리, 바람 소리마저도 매번 달라진다. 풍경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 자연으로부터 잠시 빌린다고 해서 이를 ‘차경’이라고 한다. 이 차경을 방해하지 않도록, 방충망도 투명한 특수 섬유로 특별하게 제작했다. 이렇듯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는 한옥의 미학은 물론, 철학과 가치에 대한 진정한 탐구로 완성됐다.
이날, 대청에서는 방문자를 위한 특별한 사운드 배스 프로그램이 열렸다. 실제로 해보기도 했고, 잠이 들지 않을 때는 유튜브로 사운드 배스를 틀어보기도 했지만, 오늘의 사운드 배스에는 가야금이 함께했다. 은은한 빗소리와 함께 시작된 사운드 배스 프로그램은 그야말로 오감을 일깨우는 신선한 경험. 사운드 배스는 소리, 진동, 파동으로 완성되는 만큼 한옥은 그 모든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후 다이닝 공간에서 진행된 영월과 인근 지역의 재료를 활용한 코스 요리까지, 한옥의 시간은 충만하게 흘러갔다. 머무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웰니스 공간, 한옥.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열었더니 저녁 식사 시간에 입은 드레스에서, 객실에서 입은 파자마에서, 꺼내는 옷마다 은은한 나무 향이 배어 있었다. 그 향이 좋아서 코를 대고 킁킁거린 후, 옷을 가만히 걸어두었다. 한옥의 시간이 나를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