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에게 죽음을-Black Out> 전개를 두고 ‘꿀고구마’라는 애칭이 생긴 걸 알고 있나요?
들어본 적 있어요! 어떻게 그런 깜찍한 표현을 만드는 걸까요?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고구마 대신 시원한 사이다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조금만 힌트를 줄 수 있어요?
앞으로 사건 해결에 속도가 붙고 휘몰아치면서 난장판이 될 겁니다.(웃음) 꿀고구마의 핵심은 ‘심리’에 있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서스펜스죠. 작가님이 대본 뒷면에 수사 일지, DNA 판별 검사 등 사건과 관련한 자료를 빽빽히 적어주셨어요.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현실적인 인물과 촘촘한 상황에서 인물들의 선택과 반응에 쾌감을 느낄 수도 있고요. 원작 소설과는 다른 결로 펼쳐지는 전개를 기대하셔도 좋아요.
나겸의 선택에 공감할 수 있어요?
부와 명예를 쥘 수 있는 라이징 스타이자 배우인 나겸이 왜 옥바라지를 하며 위험한 선택을 이어가는지 저도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어요. 잃을 게 더 많은 선택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나겸이라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기도 해요. 나겸에게 ‘나’라는 사람을 완성해준 사람은 정우밖에 없었거든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나겸이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려면 정우가 필요해요. 원하지만 닿을 수 없는 존재였던 그가 의지를 하면서 이 친구를 행복하게 해주고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 생각하며 사랑도 싹트죠. 그렇게 질긴 사랑과 집착이 피어났다고 생각해요. 나겸에게 이 사건의 장르는 멜로예요.
구체적인 해석이네요. 그 답을 찾게 된 여정이 있었나요?
작품이 확정되면 캐릭터에 공감하기 위해 매일 그 인물의 입장에서 일기를 썼어요. 지독한 가난 속에서 태어나 치명적인 결핍과 자격지심이 생겼고,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했는지 나겸의 지난 시간을 쫓아봤어요. 나겸이가 덕미로 불리던 시절부터, 덕미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쌓아갔는데, 노트 한 권을 꽉 채운 건 처음이었어요.
인간의 악함은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고 생각해요?
그건 판단할 수 없어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누구나 각자의 밝고 어두운 세상이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인간의 심리와 관련된 자료를 많이 접했는데 흥미롭더라고요. 어디가 모나거나 과장되어 있다면 그 이면에는 분명 결핍이 있다는 진리 하나는 깨우친 것 같아요.
이 세상이 평화로워지려면 결핍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욕망을 잘 컨트롤해야겠어요.
평온하고 행복할 때와 불편한 감정이 불쑥 튀어나오는 순간을 아마 본인이 잘 알 거예요. 여러 자료에서는 그 결핍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고들 하더라고요. ‘내 안의 어린아이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말처럼 다독이고 위로하는 쪽으로 접근하는 편이 건강한 것 같아요.
보결 씨 내면에 존재하는 어린아이를 마주한 적도 있나요?
여러 번 마주쳤죠. 늘 그 결핍을 채우려고 아등바등했는데, 올해 초 연극 <꽃, 별이 지나>를 하며 그 아이를 대하는 다른 방법을 배웠어요.
어떤 방법인가요?
결핍을 채우고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잦은 빈도로 이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거예요. 그동안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연극을 하면서 그 정의가 더 구체적으로 진화했어요. 프리즘의 단면처럼 빛이 투과되었을 때 오색찬란한 확장성을 갖고 싶어졌죠. 투명도가 높아질수록 제 행복도도 높아진다는 사실을 처음 경험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제가 꿈꾸는 배우로서의 방향이 확실해진 뒤 그 과정에 있는 하루하루가 더 행복해졌어요.
어린아이에게 새로운 꿈이 생긴 셈이네요?
맞아요. 그 결핍을 알고 채우는 과정에 있었다면, 이제는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저 자신에게 ‘100점짜리 하루를 보냈어’라고 당당히 말해줄 수 있는 용기도 얻었고요.
그나저나 내면의 그 아이는 왜 그렇게 연기를 갈망하나요?
중학생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연기 학원에 던져졌어요. 확 몰입했다가 금방 질리고 모험심이 강한 저를 보고 연기를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대요. 첫 수업에서 선생님이 독백 대사를 읽어보라고 하셨어요. 애인의 죽음을 겪은 여자의 독백이었는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오 하늘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이런 내용이었어요.
중학생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였겠어요. 사랑도 죽음도.
그러니까요! 그런데 이 대사를 막상 입 밖에 꺼내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아직도 잊히지 않는데, 제 귀에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로 쿵쿵 뛰었어요.
시작이 강렬했네요. 이후 예고, 예대를 졸업하고 단역부터 차근차근 올라왔어요. 연기 외길이라고 할 수 있네요. 그 길은 어땠나요?
보조 출연, 오디션 횟수를 정확히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세 자릿수일 거예요.(웃음) 몇 년간 오디션에 계속 떨어졌으니 생각할 시간이 많았는데, 방향성을 확실히 정해놓아 흔들리지 않았어요. 단 한 장면에 등장하더라도 압도적인 연기로 계속 생각나는 배우가 되는 것요. 대사 한마디에서 인물의 서사가 그려지는, 힘이 있는 연기자가 되자고 결심했거든요.
그런 연기를 위해 필요한 역량은 어떻게 키웠어요?
스스로 훈련하기 위해서는 좋은 눈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속도보다는 방향성이 앞서야 하고요. 연기를 하는 게 꼭 저라는 사람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탐구의 과정 같았어요.
지금도 이렇게 눈이 반짝이는 걸 보면 그 탐구는 쉽게 질리지 않을 것 같아요.
파고 또 파도 끝이 없거든요. 방법적인 모색과 몰입에 대한 고민, 작품 속 배우의 쓰임 등 다방면으로 고민하다 보면 또 새로운 국면을 마주해요. 배우가 극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극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해요. 지금 제 이야기는 철저히 배우 입장에서 하는 고민이지만, 하나의 작품은 스태프와 함께 만드는 과정이기에 작업 과정에서 또 새로운 질문이 솟아나고는 해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다’라는 명제에 동의하나요?
완벽히 동의해요. 생각에 꼬리를 물다 보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만 남아요. 이 답을 찾는 과정이 곧 좋은 배우가 되는 길 같기도 해요.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철학 같아요.
최근에 탐구한 질문은 뭐예요?
적극적으로 탐구하지는 않았는데 러닝을 하며 ‘성장’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어요. 나이키 앱을 통해 러닝을 하는데 러닝 코치인 아이린이 어느 날 “시작한 것만으로 이미 당신은 박수 받을 수 있어요. 이 러닝이 끝났을 때 한 단계 성장한 사람이 되었을 거예요”라는 메시지를 주셨어요. 이 말이 제게 큰 힘이 되더라고요. 10분이든 30분이든 달리는 것만으로 나는 해낸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연기에도 이 논리를 접목할 수 있어요. 제가 얼마나 느는지 즉각 알아차릴 수는 없고, 허송세월하는 건 아닌지 불안한 시기가 있는데 두려워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성취감이라는 건 본인 스스로 스승, 코치가 되어 이끌어가는 거예요. 오늘 화보를 통해서도 전과 다른 제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오늘 화보를 통한 성장이 궁금한 걸요?
익숙했던 제 이미지를 와장창 깨부쉈어요. 보내주신 시안 속 ‘독사과를 먹은 서늘하고 아름다운 백설공주’를 나름대로 상상하고 왔는데, 그 이상이었어요. 낯선 착장과 메이크업, 헤어로 완성된 이미지를 보면서 ‘이런 면이 있었어?’ 하고 놀라며 몰입했어요. 그 쾌감을 느낀 날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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