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리시한 여자의 일생

스타일은 타고나는 걸까? 스타일리시하게 나이 드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스쳐 지나가는 유행부터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우리의 외모까지 모두를 극복하게 하는, 스타일이라는 묘약에 대하여.

스타일리시한 여자들의 어제와 오늘 (위에서부터 아래로) 고혹적인 여성미의 카르멘 델로르피체. 지성과 우아함을 갖춘 안젤리나 졸리. 간결한 옷차림으로 언제나 당당한 샬럿 램플링. 아방가르드한 트렌드를 자신의 색깔로 소화해내는 틸다 스윈턴.

스타일리시한 여자들의 어제와 오늘 (위에서부터 아래로) 고혹적인 여성미의 카르멘 델로르피체. 지성과 우아함을 갖춘 안젤리나 졸리. 간결한 옷차림으로 언제나 당당한 샬럿 램플링. 아방가르드한 트렌드를 자신의 색깔로 소화해내는 틸다 스윈턴.

예쁘고 어린 어시스턴트가 있었다. 올해 스물한 살인 그 아이는 가늘게 쭉 뻗은 몸과 반짝이는 흑발, 뽀얀 얼굴을 가졌는데, 유독 그 아이만 보면 이것저것 잔소리를 하게 됐다. “예쁠 때 사진 많이 찍어놔.” “어리니까 역시 포니테일이 잘 어울리네.” “이제 그 서클렌즈는 좀 빼지 그래?” 사실 잔소리의 대부분은 일과 상관없는, 외모와 스타일에 관한 것이었다. 학업도 마저 끝내야 하고, 아직 사회에 나오기엔 이른 나이라 일을 잘하라고 다그치기보다는 그녀가 지금 가진 젊음을 제대로 즐기길 바랐다. 족집게 과외를 하듯 그 나이 때 미처 모르고 지나친 것들,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들을 미리 알려주면 그녀의 싱그러운 시절이 조금 더 스타일리시하게 남지 않을까 해서다. 어쩌면 본인은 그저 ‘꼰대의 오지랖’이라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이 애정 어린 잔소리는 50대 후반의 엄마에게도 똑같이 쏟아 진다. “흰머리 염색 안 하고 멋스럽게 놔두면 안 돼?” “시장에서 신발 좀 사 신지 말고!” 젊었을 때 한 미모, 한 스타일 하셨던 분이 평범한 아줌마로 나이 드는 게 안타까워 전전긍긍했지만 정작 엄마는 항상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실은 내 코가 석자였다. 패션 에디터라는 직업을 앞세워 멋과 스타일에 대해 좀 안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화보 같은 일상’과는 거리가 먼 내게 다른 세대의 여자들 역시 잔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스타일이라는 건 젊어서나 늙어서나 여자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 그렇게, 평생 멋진 스타일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괜찮아, 젊음이야

10대와 20대를 지나는 여자들의 마음에는 자신감과 자괴감이 뒤섞여 있다. 최신 트렌드의 과감한 옷도 서슴없이 입을 정도로 자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친구와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고, 연예인이 입은 옷을 따라 사며,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옷장을 채워나가기도 한다. 그러고는 어울리지 않는 옷 차림에 어색해하고, 연예인과 나의 ‘같은 옷 다른 느낌’을 접하며 우울해한다. 이렇게 내 스타일이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춰져 있던 경험, ‘나’라는 사람의 본질과 다른 틀에 맞추려는 시도는 다들 한 번씩 해본 적이 있을 거다. 아름다운 여자들을 동경하면서 ‘내가 같은 옷을 입으면 어떻게 될까?’ ‘살을 더 빼면 그 여배우 같아질까?’ 스스로에게 계속 묻는 거다. 젊은 여자에게 스타일이란 어쩌면 이런 질문의 연속이 아닐까 싶다. 

패션과 뷰티에 민감한 20대를 보내고 난 뒤 깨우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의 취향을 정의 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20대의 나는 ‘스타일리시한 여자는 늘 심플한 옷차림을 추구한다’는 패션 업계 특유의 고전적인 규칙에 얽매여 있었다. 새로운 옷을 사도 이미 옷장에 있을 법한 것을 골랐고, 요란한 트렌드를 꺼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아쉽다. 세상에 얼마나 예쁜 옷이 많은데, 왜 벌써부터 베이식한 데님과 트위드 코트, 화이트 셔츠만 평생 입고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트렌드를 적극 수용하고 실험하는 즐거움은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일종의 특권인데 말이다. 물론 30대인 지금도 늦지는 않았다. 똥배가 있지만 크롭트 톱을 입고 미러 선글라스를 즐기며, 얼마 전에는 머리를 금발로 탈색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 적어도 금발이 되고 싶다 마음먹었을 때, 모델 수주나 에프엑스의 크리스탈과 자신을 굳이 비교하며 미리 절망하지는 않는다.

물론, 젊은 시절을 좀 더 스타일리시하게 만들기 위해 지켜야 할 것도 있다. 첫 번째는 바로 살찌지 않는 것. 날씬한 몸매는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소화해내는 자신감을 선사하고, 나이 들어서도 쉽게 펑퍼짐해지지 않는 기본 체질의 바탕이 된다. 유행하는 몸매를 따라 무리한 다이어트를 시도하란 게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보기 좋은 적정 체중이 있는데, 거기서 조금이라도 줄거나 늘어났다면 다시 원상태로 조절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과체중이었던 어머니의 우울증과 전쟁 시절의 혹독한 기아 현상을 겪은 오드리 헵번이 평생 49킬로그램을 유지했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 적정 몸무게를 유지한다는 게 스타일리시한 여자로 살아가는 데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세기의 패션 아이콘은 이를 몸소 증명해 보였다. 사진 보정이나 성형시술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 특히 요즘은 전문적인 프로그램 없이 스마트폰 앱 만으로도 쉽게 얼굴을 갸름하게, 또 다리를 길게 만들 수 있는 데, 미적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듯 사진 보정에도 유행이 있다. 지금 예뻐 보이는 ‘조금 만진’ 사진이 몇 년 후 다시 보면 어딘가 촌스럽고 이상해 보일 수 있는 반면, 자연스러운 사진 속의 얼굴은 시간이 지나도 젊음 그 자체로 빛나고 유행 지난 옷차림은 재미있는 추억이 된다. 불필요한 성형시술도 마찬가지다. 압구정역 일대를 뒤덮은 성형외과 광고에 스타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성 없이 유행에 따라 변형된 외모라면 어떤 옷을 입어도 똑같은 표정과 분위기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스타일리시한 여자들은 예쁜 얼굴에 집착하지 않는 법. 외모의 사소한 부분을 왜곡하기 시작하면, 스타일이라는 큰 그림을 보기 어려워진다. 영화 <어바웃 타임>을 보면 인상 깊은 대사가 등장하는데, 바로 여주인공 레이첼 맥아담스가 처음으로 예비 시어머니 ‘메리’를 만나는 장면이었다. 어딘가 소심해 보이는 아들의 여자친구에게 그녀는 어깨를 툭 치며 “아주 좋구나! 여자가 너무 예뻐도 별로야. 얼굴 믿고 유머나 인격을 안 가꾸거든”이라 말한다. 아, 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인가! 이 스타일의 본질을 꿰뚫는 한마디는 메리를 ‘앤디 워홀을 닮은 괴짜’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근사한 자신감으로 살아온 멋진 여자로 만들었다. 이렇듯 스타일은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다듬어나갈 수 있는 것이고, 젊음은 그 노력의 시작 단계인 실험과 도전을 위해 존재한다. 외모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도록 노력하고, 이를 돋보이게 하는 옷차림을 찾는 데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급해할 필요도 없다. 아직 젊으니까, 이것저것 입어봐도 괜찮다.

진짜 스타일의 시작

여자의 진짜 스타일은 나이 드는 것과 동시에 시작된다. 자신에 대해 고민을 거듭할수록 더 근사해지며, 그래서 시행착오를 겪고 난 성숙한 여자의 옷차림에는 언제나 세련미와 조화가 있기 마련이다. 우아한 할리우드의 여신, 안젤리나 졸리의 예를 들어보자. 고딕 펑크 룩과 그런지 룩, 흑발과 금발, 핑크 헤어 등 스타일의 극단을 오가며 실험을 거듭한 젊은 시절의 그녀는 진한 화장과 거친 옷차림이 어딘가 무서워 보였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또 제3세계 어린이와 사회 구호 활동에 깊이 관여할수록 그녀는 스타일의 군더더기를 털어냈다. 거칠고 남성적이었던 애티튜드는 사라지고 검은색 일색의 우중충한 옷차림은 베이지와 그레이를 만나면서 한결 부드러워졌다. 과도한 노출 대신 드라마틱하면서도 정제된 재단이 레드 카펫 룩의 주재료가 되었고, 전남편의 이름을 새겼던 문신은 그녀의 아이들이 태어난 곳의 위도와 경도로 다시 새겨졌다. 할리우드의 대표적 와일드차일드였던 안젤리나 졸리의 변신은 여자가 나이 들면서 배울 수 있는 스타일 레슨의 전형을 몇 가지 보여준다. 모성애와 연민 등 보다 풍부해진 감정으로 부드러운 여성성을 되찾는 것, 의미 없는 치장을 피하는 것, 그리고 좋은 재단과 정제된 실루엣의 옷을 선택하는 것이다. 

여자가 나이와 함께 얻을 수 있는 가장 근사한 훈장은 바로 모성애다. 여자의 모성애가 아름다운 이유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부드러움과 모든 것을 이겨내는 강인함을 동시에 지녔기 때문인데, 이 성숙한 여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혹적이고 부드러운 매력은 스타일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83세의 패션 모델 카르멘 델로르피체는 나이가 들수록 짙어지는 여성성을 트레이드마크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지금도 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녀는 15세에 처음 미국 <보그>의 커버를 장식할 때만 해도 그저 평범한 모델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은 고혹적인 여성미로 패션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여기에는 그녀의 옷차림도 한몫했다. 중년 이후의 수많은 여성이 무난하고 중성적인, ‘편한 옷’을 찾을 때 그녀는 누구보다 타이트한 펜슬 스커트를 입었고, 세련된 드레이핑 드레스를 입었다. 백발을 감추려 하기보다 글래머러스한 웨이브로 볼륨을 더했고, 야무진 입매를 더욱 강조하는 붉은 립스틱을 발랐다. 나이 들었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과감한 옷일지라도, 성숙하고 강인한 여성미를 더하면 우아한 스타일로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렇듯 나이가 들수록 ‘스타일리시하다’는 말은 더 넓은 스펙트럼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타고난 신체적 조건보다 취향과 라이프스타일, 사회적 지위 등 다양한 경우의 수가 옷차림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스타일리시한 여자들의 목표는 어려 보이는 것, 혹은 예뻐 보이는 것에 맞춰져 있지 않다. 배우 윤여정은 두 달 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멋있다는 에디터의 말에 “멋있긴 뭐가 멋있어요. 나는 미인이라고 할 순 없으니까 사람들이 멋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도 예쁘다고 하는 것보다는 나아요”라며 솔직한 생각을 전했다. 그러고 는 자신의 담백한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동그란 뿔테 선글라스를 쓰고, 간결한 디자인의 스니커즈를 신고 <얼루어>의 카메라 앞에 섰다. 그날 그녀의 스타일이 멋졌던 이유는 단순히 자신을 장식하기 위한 아이템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옷 차림의 군더더기를 줄인다는 것은 마음의 예쁘고자 하는 욕망을 그만큼 덜어낸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 하지만 성공했을 때 결과는 이토록 스타일리시하다.

나이 든 후에도 옷 잘 입는 여자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간결함을 유지하되, 몸에 잘 맞는 날렵한 재단과 좋은 소재의 옷으로 정제된 실루엣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다이앤 키튼, 샬럿 램플링 같은 패션 아이콘들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공식 석상에서 두 사람은 슈트를 즐겨 입기로 유명하다. 샬럿 램플링의 경우 툭 떨어지는 낙낙한 팬츠 슈트에 티셔츠를 받쳐 입어 쿨한 감각을 유지하고, 다이앤 키튼은 포멀한 턱시도 슈트부터, 날렵한 테일러드 재킷에 미디 스커트를 매치하는 등 슈트의 다양한 변주를 즐긴다. 이들의 옷차림에는 별다른 장식이 필요 없다. 말끔한 재단과 야무진 실루엣이 두 스타의 스타일 내공을 조용히 드러낼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폭넓은 연기를 보여주는 틸다 스윈턴도 이 규칙을 따른다. 그녀는 아방가르드하거나 트렌디 한 옷차림에도 서슴없이 도전하는데, 중년의 나이에도 그런 옷 차림이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오는 비결 또한 단단한 재단에 달렸다. 똑 떨어지는 하이더 아커만의 드레스 앙상블이나 세린느의 날렵한 롱 코트는 그렇게 그녀의 시그니처 룩으로 자리 잡았다. 나이 든 여자의 좋은 스타일은 그리 복잡한 공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끝까지 여성미를 유지하고, 과한 장식을 덜어 내고, 옷의 재단과 소재에 특별히 신경 쓰는 것, 이 세 가지 사항만 잘 기억한다면 이 세상에 못 입을 옷은 없다.

스타일은 마음에서부터

그러고 보니 색색의 서클렌즈를 바꿔 착용하는 어시스턴트도, 시장에서 산 신발이라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신는 엄마도 어쩌면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좋은 스타일을 위해 노력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나이에 맞게 트렌드를 실험하고, 불필요한 치장보다 가진 물건을 소중하게 관리하는 마음이 옷 입는 행위를 즐겁게 만드니까. 스타일의 궁극적인 화두는 옷 입기를 즐기는 것,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세상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트렌드와 스타일은 나이를 불문하고 호기심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니 트렌드에 마음을 열고, 자신의 취향에 관심을 기울이자. 스타일리시한 여자의 일생은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멋에 대한 애정은 삶의 시행착오가 얻어준 노하우를 만나 우리 모두를 각자의 개성으로 빛나게 할 것이다. 

    에디터
    패션 에디터 / 박정하
    Photography
    Getty Images/Multibits, REX/Alphaphotos, Courtesy of N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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