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골을 드러내는 패션
탄탄하게 올라붙은 볼륨있는 실루엣을 자랑하기 위해 골반뼈를 노출 할 때이다. 상상력이 지배하는 관능의 발로, 펠비지룩을 말한다.
고리타분하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노출은 유혹을 위한 패션의 기술이다. 클리비지를 한껏 드러내고 초미니 스커트를 입으면 남자를 꼬실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당장 어떠한 대상을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성적 환상을 유발하거나 살을 드러내는 옷 입기는 이성을 향한 무의식적 구애와도 같다는 것이다. 분명히 밝히건대 무의식으로! 패션은 다양한 방식으로 무의식적인 기술을 진화시켜왔고 몸에도 유행을 불어넣었다. 정말 몸에도 유행이 있다. 어릴 적 나는 지젤 번천 같은 글램한 몸매를 꿈꿨다. 그러다 말라 비틀어진 강낭콩처럼 성장이 멈춰버린 게 다행이라고 여긴 건 케이트 모스와 그놈의 파리지엔 때문이었다. 움푹 파인 쇄골과 가는 팔다리의 유약함이 주는 시크함은 말라야 뭘 입어도 ‘간지’ 난다는 집착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지금은? 소담스럽게 자리 잡은 복근, 탄탄한 엉덩이와 허벅지를 위해 유기농 채소, 닭가슴살로 식단을 조절하며 데드 리프트와 스쿼시로 근력을 강화하고 있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몸 바야흐로 21세기는 탄력 있고 적당한 볼륨을 지닌 건강한 몸의 시대이다. 그리고 패션도 이런 현상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가슴골로 어필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탄력 있는 라인을 드러내는 오버사이즈 민소매 톱의 유행을 일컫는 신조어 ‘사이드 밥(Sidebob)’, 엉덩이 아랫부분에서 허벅지로 이어지는 매끈한 라인을 강조하는 마이크로 쇼츠 룩 ‘언더버트(Underbutt)’가 단적인 예이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화두가 된 부위는 치골로,다리의 라인을 타고 올라가 낙원으로 가는 길 문을 거쳐 은밀하게 솟아 있는 골반뼈로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선을 드러낸다. 과감한 치골의 노출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응당 속옷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는 당혹감, 무엇인가가 보일 것 같은 기대감, 그리고 그 이상을 상상하게 되는 야릇함이 공존하다. 2012년 메트로폴리탄 갈라에서 모델 안냐 루빅이 가슴과 골반뼈가 훤히 드러나는 안토니 바카렐로의 드레스를 입었을 때만 해도 치골의 노출은 현실 저 너머 붉은 카펫 세상의 일이었다. 하지만 몇 년 새 판도가 달라졌다. 골반과 허벅지는 물론 엉덩이의 일부가 비치는 드레스를 입은 기네스 팰트로, 허리를 휘감아 내려오는 컷아웃의 드레스로 우월한 각선미를 자랑한 지젤 번천, 스트랩 사이로 숨어 있던 살을 드러낸 강력한 노출 강도를 소화한 매키 큐, 그리고 지난해 토론토에서 열린 뮤직 비디오 어워즈에서 양쪽 허벅지와 골반뼈를 드러낸 파우스토 푸글리시의 슬릿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켄달 제너에 이르기까지 스타들은 레드 카펫에서 치열한 치골 경쟁을 벌인다. 도전적으로 양쪽 골반뼈를 보여준 켄달 제너는 인스타그램에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Why do one slit when you can do TWO!?
현실적인 펠비지 룩 골반 노출이 대중에게 익숙해지자 골반을 의미하는 ‘펠비스(Pelvis)’와 가슴골을 의미하는 ‘클리비지(Cleavage)’의 합성어인 ‘펠비지(Pelvage)’가 생겨났다.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디자이너들은 슬릿과 컷아웃으로 숨어 있는 라인까지 찾아내 상상력을 자극한다. 다행히 레드 카펫 룩처럼 적나라하지 않다. 좋은 본보기는 세린느.허리 부분을 커다랗게 컷아웃한 톱에 롱 스커트를 매치해 부드럽게 골반을 강조하는 현명함을 보여준다. 스텔라 맥카트니는 낙낙한 니트 드레스의 허리를 구조적으로 커팅해 우아하게 골반 부분만 드러냈는데 현실에서는 세린느처럼 로 라이즈 팬츠를 더해도 좋을 듯. 뮈글러의 데이비드 코마는 작은 동그라미 컷아웃을 한쪽은 골반뼈를, 다른 쪽은 깊은 슬릿을 더한 스커트로 간결한 펠비지 룩을 선보였다. 파코 라반의 줄리안 도세나는 스포티한 터치를 가미해 모던한 인상을 주고 크리스토퍼 케인과 톰 포드는 시스루 소재를 덧대어 맨살의 자극을 한층 완화했다. 비대칭 허리 라인으로 치골의 일부를 드러낸 자크뮈스, 로 라이즈 팬츠의 부활을 불러들인 디스케어드2, 드리스 반 노튼도 나름의 방식으로 치골의 아름다움을 담아냈다(절대 1990년대식이 아니다.헐렁한 실루엣의 팬츠를 흘러내리듯 연출하는 것이 동시대적인 방식!).런웨이 위 펠비지 패션이 레드 카펫의 것보다 덜 외설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적당한 감춤의 미덕 덕분이다. 이는 섹슈얼리티라기보다는 에로티시즘에 더 가깝다. 둘 다 몸에서 출발하지만 섹슈얼리티는 즉물적인 흥분을 유발하고 상상력과 유혹의 기술을 동반하는 에로티시즘은 정신 감각을 자극하며 궁극엔 관능을 불러일으킨다. 소설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는 “애매모호하게 속셈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의 유혹만큼 강력한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스타일에도 그 말은 어김없이 적용되고 이건 시대를 초월한 불변의 법칙이다.
- 에디터
- 패션 에디터ㅣ남지현
- Photography
- InDigital, Getty Images/Multibi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