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가방 속 이야기 <2>
유행은 계절보다도 빠르게 지나간다. 그러나 그런 트렌드의 폭풍 속에서도 느긋하게 옷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가방이 있다. 주인과 함께 10년, 그리고 그 이상을 함께하며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가방들. 패션 피플 10인이 자신의 오래된 가방을 꺼냈다. 어떤 가방은 주인보다 나이가 많다.
1 반짝반짝 나의 백
나의 오래된 가방 샤넬 빈티지 2.55 실버. 친구들과 유럽 여행 갔을 때 파리에 있는 샤넬 매장에서 구입했다. 매장에서 보는 순간 딱 내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리미티드 아이템으로 희소성이 있는 데다가 유니크한 실버 컬러가 한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도 검정 옷을 즐겨 입는 내게는 모든 옷과 믹스매치하기가 쉬울 것 같았다.
간직하고 있는 이유 샤넬 브랜드의 가방이지만 ‘명품’ 같지 않은 빈티지함과 클래식함이 편안하고 특별하다. 옷은 최대한 단순하게 입고, 볼드한 액세서리를 즐겨 하는 내게 확실한 스타일을 만들어주는 가방이다.
가방의 추억 이 가방을 들고 간 날에는 행운이 따르곤 한다. 많은 가방이 옷장에 있지만, 그 ‘특별한’ 느낌을 주는 가방은 이것이 유일무이하다. 회사 면접, 중요 미팅이 있으면 이 가방을 드는데 그날은 어려운 일도 술술 풀린다. 오랜 세월 함께하면서 내 손때가 묻은 이 익숙함은 어떤 값비싼 가방과도 비교할 수 없다.
지금 이 가방을 든다면 심플하고 편안한 게 좋다. 그리고 새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빈티지 운동화에 오버사이즈 와이드 팬츠를 입고 편안한 저지 소재의 검정 로브를 걸친 후 이 가방을 들면 멋질 것 같다.
갖고 싶은 새 가방 유행을 따르지 않는 나만의 백팩. 내 것, 내 물건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액세서리 등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데 가죽 공예에도 관심이 많다. 기회가 된다면 물건을 한가득 가지고 다니는 내 습관을 고려해 수납공간을 최대한 많이 넣은 오버사이즈 가죽 백팩을 직접 만들고 싶다. 나만의 ‘인생백’이 될 거다.
– 이승민(조르지오 아르마니 뷰티 홍보팀)
2 내가 가장 성숙했을 때
나의 오래된 가방 요즘 대학생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내가 캠퍼스를 누비고 다닐 때에는 대학생도 구호나 타임, 아르마니의 슈트에 루이 비통 자스민이나 스피디, 프라다 백팩을 메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정말이다. 우리는 미숙했지만, 패션만은 너무나 성숙했던 것이다. 이 루이 비통의 검정 에피 스피디 백은 그 무렵 구입한 루이 비통 가방 중 하나다. 작은 모노그램 가방은 힙에 걸치는 가방으로 나온 것인데, 선배가 준 것이다. 벨트를 떼어 클러치백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튼튼하고 편한 데다 여권이 딱 들어가는 크기라 출장길에 애용한다.
간직하고 있는 이유 루이 비통 에피 소재의 특징은 튼튼하다는 것이다. 정말 튼튼하기 때문에 유행이 다 지나버렸다고 해도 버릴 수 없다. 게다가 워낙 모양이 잡혀 있어 형태가 무너지지도 않아, 늘 가방 칸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
가방의 추억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난 날, 다른 친구들이 서둘러 가방을 보호하는 동안 나만 태연자약했다. 이 가방은 마치 방수 가공을 한 것처럼 비에 젖어도 끄떡없는, 울트라맨 같았다.
지금 이 가방을 든다면 요즘 이 가방을 꺼내 드는 경우는 문상을 갈 때뿐이다. 검은색 옷과 검은색 슈즈를 신은 후 이 가방을 든다. 엄마도 가끔 이 가방을 빌려가는데, 역시 장례식에 가실 때다.
갖고 싶은 새 가방 갖고 싶은 가방은 딱히 없다. 브랜드와 상관없이 예쁜 터키색 클러치백을 만나게 되면 사고 싶어질 것 같다.
–허윤선(<얼루어> 피처 디렉터)
3 밀라노 컬렉션의 추억
나의 오래된 가방 이 발렌시아가의 가방은 밀라노 발렌시아가 매장에서 구입했다. 에디터로 떠난 첫 컬렉션이어서 매우 셀레고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간직하고 있는 이유 10년 전에 구입했지만 지금까지도 어떤 룩에도 잘 어울리는 걸 보면 선택이 옳았다!
가방의 추억 몇 년을 들다 우연히 행사장에서 만난 선배가 같은 백을 들고 있었다. 나의 롤모델 같은 선배가 말이다. 그것도 같은 매장에서 샀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이 가방을 들 때마다 그 선배가 생각난다.
지금 이 가방을 든다면 이번 시즌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화이트 팬츠나 민트 스커트, 카멜 컬러 니트와 들면 블랙 백이 강조될 것 같다.
갖고 싶은 새 가방 델보의 시즌 컬러인 파란색 브리앙 가방.
– 김은경(델보 홍보팀)
4 어머니의 선물
나의 오래된 가방 아버지의 친한 친구가 파리에 출장 가셨다가 어머니 선물로 사오신 랑방 가방이다. 벌써 스물다섯 살을 넘긴 가방이다.
간직하고 있는 이유 어머니가 오래된 것들을 잘 보관하신다. 그래서 지금도 나와 동생이 사용하는 가방이나 입는 옷 중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입고 쓰는 것이 꽤 있다. 내가 최근에 산 옷보다 모두 더 마음에 든다.
가방의 추억 한동안 잊고 있다가 우연히 들고 나간 날 어떤 남자가 이 가방을 칭찬했다. 그와는 잠시 만나다 말았지만, 남자가 가방 칭찬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 이상하게 이 가방을 들면 기분이 좋다. 실제로도 편한 가방이다.
지금 이 가방을 든다면 나는 이 가방을 주로 가을, 겨울에 든다. 보통 블랙 코트나 레드 코트에 부츠를 신고 크로스로 캐주얼하게 메곤 한다. 올해는 줄을 짧게 해서 실크 셔츠와 코트, 하이힐 슈즈와 함께 들고 싶다.
갖고 싶은 새 가방 질리지 않고 들수록 멋이 나는 클래식한 아이템이 결국 최고인 것 같다. 여유가 생기면 보테가 베네타 숄더백이나 완전히 클래식한 디올의 토트백을 사고 싶다.
– 정유선(문학동네 마케팅팀)
5 ‘타임리스’ 타임 백
나의 오래된 가방 2004년 타임 옴므에서 구입한 가죽 토트백. 패션 잡지 어시스턴트 시절, 한창 유행하던 화려한 명품 가방에 대한 괜한 반감이 생겼다. 무엇보다 브랜드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단순하면서도 매니시한 디자인과 좋은 소재에 끌렸던 것 같다.
간직하고 있는 이유 매니시한 가방의 첫 시작이다.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갖고 있는 가방을 정리하게 됐는데, 스타일은 비슷하고 컬러만 다른 백들이 수두룩하더라. 이런저런 유행의 파도에 휩쓸리다가도 결국엔 이런 형태의 가방에 안착한다는 얘기가 아닐까.
가방의 추억 2006년 생애 첫 해외 남성 컬렉션 참관 때, 당시 유일한 스트리트 사진가였던 스콧 슈먼에게 밀라노 거리 한복판에서 사진 촬영 제의를 받았다. 나중에 보니 이 가방만 크롭트해서 블로그에 올렸더라. 나 원 참.
지금 이 가방을 든다면 밑단이 해지거나 싹둑 자른 청바지와 얇은 가죽 끈으로 된 플립플랍. 워낙에 부들부들한 가죽 소재라, 손에 들지 않고 옆구리에 끼고 다닐까 보다.
갖고 싶은 새 가방 트롤리. 7년 전에 구입한 리모와가 있는데, 당시엔 신선한 형태와 브랜드였지만 지금은 너무 흔해진 것 같아 다른 걸 구입하고 싶다. 브랜드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가볍고 아름다운 트롤리를 애타게 찾는 중이다.
– 박나나(<지큐 코리아> 패션 에디터)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허윤선
- 포토그래퍼
- 정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