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의 경계가 사라진 ‘젠더리스’ 시대
각진 슈트를 입은 여자, 러플 장식의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남자가 런웨이에 오르는 세상. 성별의 경계도, 스타일에 대한 경계도 사라진 지금은 바야흐로 새로운‘ 젠더리스’ 시대다.
오버사이즈 재킷, 보이프렌드 핏 데님, 로퍼 같은, 남자들이 입는 옷과 구두가 여자의 옷장을 차지하게 된 것은 꽤나 오래전이고, 크게 놀라울 것도 없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2015년 가을/겨울 밀라노 컬렉션에서 구찌의 새로운 수장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선보인 영국풍 빈티지와 너드식 자유로움이 혼재된 컬렉션을 목도하며 놀라웠던 점은 구찌의 상징과도 같았던 흘러넘치는 관능미가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중간중간 등장한 남자 모델이었다. 리본 장식의 실크 블라우스와 러플 소매 셔츠를 입은 남자라니! 더욱 흥미로운 것은 같은 시즌 남성복 컬렉션에서 선보인 의상과 거의 동일한 디자인이라는 데 있다. 남성과 여성 컬렉션을 동시에 전개하는 패션 하우스의 경우 각기 다른 주제로 컬렉션을 풀어내는 데 반해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무대와 시간만 바뀌었을 뿐 거의 동일한 디자인을 남녀 모두에게 제안했다. 작년 가을 크게 화제를 모은 J.W. 앤더슨의 2014년 로에베 남성 캠페인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다. 성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모델 두 명이 낙낙한 데님 팬츠, 토트백을 들고 스카프를 흩날리며 서 있는 모습은 남성이 아니라 매니시한 옷을 즐기는 여성에 더 가깝다. 이렇듯 현재 패션계의 흐름은 여성에서 남성으로의 일방 통행이 아닌 쌍방향으로 옮겨가며 성별을 초월한 젠더리스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
이 젠더리스 트렌드의 발화점이 된 앤드로지너스(Androgynous)라는 단어가 처음 생겨나고 유행한 시기는 1980년대. 데이비드 보위, 보이 조지 등은 화려한 메이크업과 반짝이는 의상으로 여자보다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고, 유리스믹스의 애니레녹스는 팬츠 슈트와 넥타이를 멋지게 소화하며 남자 같은 여자의 대표 아이콘이 되었다. 파‘ 워 드레싱’이라는 신조어가 나오면서 어깨가 넓은 재킷을 차려입고 남자들과 당당히 경쟁하며 커리어를 쌓아가던 여자들이 주목받던 시대도 바로 이때였다. 현재의 젠더리스 룩 역시 지금의 시대상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21세기엔 우리가 가지고 있던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성 역할의 경계는 점차 흐려지 있는데, 이런 현상을 증명하는 것이 모델들이다. 여자보다 아름다운 남자 모델이었으며 현재 성전환으로 진짜 여자가 된, 가장 유명한 트랜스젠더 모델인 안드레 페직, 반대로 여자이면서 남성복 모델로 활동하는 각진 턱선과 투블록 커트가 매력적인 케이시 레글러, 삭발로 루이 비통의 컬렉션에 등장해 기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준 타미 글라우 같은 중성적인 모델의 등장은 시대의 변화와 패션계의 흐름이 맞닿아 빚어낸 현상이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기 전부터 생리학적으로 이분화되고, 사회적으로도 이를 답습하며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나누어왔다. 그러나 21세기는 남자들이 요리를 하고, 여자 타투이스트가 주목받는 등 직업에 대한 경계가 무너졌고, 남자들이 가장에 대한 책임감을 내려놓는 사회적인 분위기는 ‘메트로섹슈얼’이라는 남성상을 탄생시켰다. 여기에 에디 슬리먼, 릭 오웬스, J.W. 앤더슨 등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는 디자이너들로 인해 상호 교환이 가능한 컬렉션이 등장하면서 패션계는 그 어느 때보다 유연한 사고와 스타일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2015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폭발했다. 남성적인 이미지에 치우쳐 있던 매니시 룩이 아닌 로맨틱함이 더해진 중성적인 슈트가 등장했는데, 직선적인 실루엣의 남성 슈트에 기반했지만 레이스나 벨벳 등 부드럽고 유연한 소재를 사용하거나 색상이나 디테일로 센슈얼한 분위기를 드리운 것이 특징이다. 크리스토퍼 케인은 슈트의 칼라에 빨간색을 이용해 관능미를 더했고, 구찌는 리본 장식과 플라워 패턴으로 빈티지와 로맨틱한 분위기를 불어넣었다. 남성 컬렉션의 경우 단연 구찌가 독보적이다. 빨간색과 분홍색, 레이스 소재, 플라워 프린트 등 여자들의 옷장에서 가져온 듯한 의상이 가득했고, 생 로랑은 레이스 블라우스로 섬세한 로커의 룩을 보여주었다. “여자가 입은 남자의 옷이나 남자가 입은 여자의 옷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두가 근사해 보이는 것이자, 현대성에 관한 것이다.” J.W. 앤더슨이 2013년 가을/겨울 J.W. 앤더슨 남성 컬렉션을 마친 후 한 말은 지금의 변화를 잘 대변한다. 이제 성별을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초점은 여성이냐 남성이냐라는 이분법보다 우리가 가진 스타일에 대한 범주와 이를 수용하는 마음가짐에 있다. 지극히 여자다운 것도 지극히 남자다운 것도 없는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패션을 즐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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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 에디터 / 김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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