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의 재구성
인터넷 공동 구매 사이트를 뒤지고, 관세 안 붙게 ‘알아서’ 배송하는 해외 쇼핑몰을 수소문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옷을 사는 이유를 돌아보고 옷장의 효율성을 높이는 쇼핑 방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옷을 사볼 만큼 사봤고, 입을 만큼 입어봤다고 생각했다. 쇼핑으로 부릴 수 있는 꼼수란 꼼수도 다 부려봤다. 조금이라도 싸게 구입하려고 SPA 브랜드 매장과 편집 매장 아울렛을 주기적으로 들렀고, 내 생일은 안 챙겨도 샘플 세일 기간은 칼같이 사수했다.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었던 인터넷 직거래, 관세와 배송비에 적잖이 당황했던 해외 인터넷 쇼핑몰, 이건 또 뭔가 싶어 시도해본 모바일 소액 결제와 TV 리모컨 쇼핑까지 서툴고 투박한 쇼핑의 기억으로 얼룩진 10년을 보냈다. 쇼핑의 창구는 점점 다양해졌고, 옷을 살 때마다 항상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믿었지만 아직도 내 옷장에는 몇 번 입지도 않고 구석에 처박아둔 옷과 도대체 왜 샀는지 이해가 안 되는 옷이 가득하다. 옷은 많은데 입을 옷이 없다는 아이러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우리는 늘 인터넷에 떠도는 쇼핑 무용담에 휩쓸려 나만의 ‘득템’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진짜 쇼핑을 잘하는 사람들은 이런 정보 전쟁에 별로 동요하지 않는다고 한다. 남들보다 더 많은 옷을 접하고, 사보고, 입어봤다는 패션계의 자타공인 쇼핑 고수 네 명과 얘기를 나누어봤다.
합리적 쇼핑의 시대는 갔다
우리가 인터넷을 뒤지고, 달력에 세일 기간을 표시해두는 건 물건을 좀 더 저렴하게 구입하자는 ‘합리적 쇼핑’에 근거한다. 하지만 갤러리아 백화점의 홍보팀장 정은지는 이 합리적 쇼핑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저는 뭐든 많이 사는 편이었어요. 소비 자체를 즐긴다고 할까요? 월급이 들어오면 고스란히 옷을 사는 데 쓰곤 했죠. SPA 브랜드가 생겨난 직후엔 정말 심했어요. 옷을 싸게 많이 구입할 수 있다 보니 지출은 늘고, 만족도는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죠.”
그녀는 옷장에 넘쳐나는 옷을 보고 덧없음을 느꼈다고 한다. 아무리 싸게 구입해도 손이 가지 않는 아이템이라면 그건 결국 낭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맥시멀(Maximal) 쇼핑의 결과로 얻은 것도 있었다. “옷을 워낙 많이 사본 만큼 보는 눈도 높아졌어요. 좋은 물건을 알아보고,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게 된 거죠. 또 경험을 해보니 자주 입는 옷과 안 입는 옷을 구분할 수 있게 됐어요. 예를 들어, 저는 평소 캐주얼 스타일을 선호해서 가방을 폼 나게 들 일이 없더라고요. 값비싼 명품 백은 제게 별로 쓸모가 없는 것이었어요.” 그녀는 이런 식으로 쇼핑의 지향점을 바로 잡아나갔다고 한다.
“합리적 쇼핑이라는 게, 사실 국내에 많은 브랜드가 수입되지 않던 시절의 얘기잖아요? 남들이 못 가진 옷을 조금이라도 싸게 구입하려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웬만한 브랜드와 제품이 모두 국내에 입고되어서 못 구할 게 없어요. 이제 관건은 그 속에서 나만의 물건을 찾는 것이죠. ‘가치 쇼핑’이 중요해요.” 그녀는 물건을 제값 주고 구입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게 가치 쇼핑이라고 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완성해주면서 본인이 생각하기에 합리적인 가격대의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다. “이제 꼭 필요한 아이템만 사니까 충동 구매를 한다거나, 외국에 나갈 때마다 단지 한국과 비교해 싸다는 이유만으로 쇼핑을 잔뜩 하는 일이 줄었어요. 쇼핑 시간도 단축되고, 구매 경로도 단순해졌죠.”
그녀는 최근 쇼핑의 대부분을 백화점에서 해결한다고 했다. “포인트 적립에 할인, 마일리지 등 따져보면 백화점 쇼핑이 꼭 비싼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유통망이 클수록 고객을 위한 혜택과 서비스는 많아지니까요. 환불이 안 되는 등의 위험부담을 떠안을 필요도 없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꼼수를 부린다고 꼭 경제적인 쇼핑을 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정은지는 쇼핑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수선과 리폼을 추천하기도 했다. “자라에서 4만9천원짜리 팬츠를 구입하더라도 제 체형에 맞게 수선을 해서 입어요. 아무리 비싼 옷도 내 몸에 맞지 않으면 안 멋지니까요. 수선과 리폼이 쇼핑을 완성한다고 생각해요.”
나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쇼핑
나만의 스타일, 나만의 옷장을 만드는 건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의 패션 에디터 허세련이 쇼핑을 하는 이유였다. 아방가르드한 헤어스타일과 개성 넘치는 액세서리, 강한 그래픽 프린트와 독특한 컬러 매치의 옷을 입는 그녀는 누가 봐도 자신만의 스타일이 뚜렷한 사람. 그녀는 스타일에 대한 명확한 시각이 있기에 이것저것 많이 사기보다는 평소 좋아하는 쇼핑 플레이스 몇 군데를 집중적으로 돌아다니며 목표 지향적인 쇼핑을 했다. “나만의 취향을 아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평소 편집 매장 아울렛에 자주 들르는데요, 갖고 싶은 옷에 대해 상세히 물어보기도 하고, 몇 번씩 찾아가서 매장 직원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어놓기도 하죠. 너무 가격이 비싸다 싶은 옷이 있으면 세일 기간이 언제인지 물어보고, 좋아하는 브랜드가 생기면 신제품이 언제 입고되는지 물어보는 등 매장 직원들과 솔직하게 대화하는 편이에요. 게다가 늘 비슷한 옷을 고르다 보니까 이제는 그들이 알아서 고급 정보를 알려주기도 하죠.” 그녀도 한때는 인터넷 구매 대행, 해외 출장지에서의 쇼핑, 누구나 다 하는 SPA 브랜드에서의 대량 구매 등 수많은 쇼핑 옵션에서 길을 헤매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을 제대로 파악하고 남들과 공유하고 나서야 자신에게 꼭 맞는 쇼핑 경로를 찾았다고 한다. “국내 편집 매장의 경우 재고가 많이 남아요. 그래서 아울렛 매장이 활성화돼 있죠. 입고된 물건도 자주 바뀌고요. 내가 뭘 사고 싶은지만 정확히 알면 정말 ‘딱 내 옷이다’ 싶은 물건을 얼마든지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요.” 이런 식으로라면 아무리 충동 구매를 하더라도, ‘나만의 스타일’이라는 경계 안에 있기 때문에 사놓은 옷을 입지 않는 불상사는 없다. 쇼핑의 목적이 그저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아이템으로 나만의 옷장을 완성한다는 본질에 가까워질수록 쇼핑은 단순하고 쉬운 길을 가는 것이었다.
분산된 쇼핑의 묘미
고엔 제이의 디자이너 정고운은 한 단계 더 목표 지향적인 쇼핑을 하고 있었다. 직업이 패션 디자이너다 보니 남이 디자인한 제품을 구입하는 데 있어 훨씬 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도 한때는 쇼핑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어요. 특히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던 학생 시절에는 6백만원짜리 지방시 가방을 겁 없이 지르고, 아방가르드한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옷을 막 사들였죠. 그때는 브랜드 욕심도 많고 이것저것 입어보고 싶은 옷도 많아서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게 많은 쇼핑을 하고 난 뒤에 남는 건 내가 입는 옷과 입지 않는 옷으로 구분된 옷장뿐이었어요.” 그녀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가 쌓여갈수록 쇼핑의 범위는 넓어지고, 구매 경로는 명확해졌다고 한다. “좋은 제품을 알아보는 눈을 기르고 나니 어디서든 내가 원하는 아이템을 정확히 골라낼 수 있게 됐어요. 예를 들어 디자이너 아이템은 평소 가지고 싶은 것을 눈여겨봤다가 SNS에 공지된 샘플 세일 때 구입하고, 셔츠와 티셔츠, 스웨터 등 베이식 아이템은 남성복 브랜드에서, 양말이나 머플러 등 포인트가 될 만한 건 아동복 매장에서 구입하는 식이죠. 이렇게 하면 쓸데없는 지출은 자연스럽게 줄어요.” 본인의 취향과 필요에 충실히 따르다 보면 저절로 경제적인 구매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게 그녀의 전언. 아이템별로 분산된, 전략적으로 계획된 쇼핑이 중요한 포인트였다.
자신만의 쇼핑 영역을 찾아낸 건 정고운뿐만이 아니었다. 태국 브랜드 더블유더블유에이(wwa)의 국내 대표 박성미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동남아 브랜드에 조예가 깊은 그녀는 자신의 취향을 파고들다 새로운 쇼핑의 영역을 발견한 케이스였다. “저는 옷을 살 때 이게 정말 내 스타일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요. 저는 몇 년째 같은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고, 트렌드와는 상관없이 화장을 하고 내가 입고 싶은 옷만 입고 다니거든요. 그래서 쇼핑에 신중한 편이죠. 그러던 어느 날 여행으로 방문한 방콕에서 ‘딱 내 스타일이다’ 싶은 현지 디자이너들의 브랜드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어요.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신선하고 세련된 관점의 스타일과 좋은 품질의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죠. 이후 매년 휴가 때마다 방콕에서 쇼핑을 했어요. 더블유더블유에이를 한국에 론칭한 지금은 제 옷의 대부분을 제가 운영하는 브랜드에서 해결하죠. 우리가 취급하지 않는 액세서리나 슈즈, 모자 정도만 센스, 오프닝 세레모니, 파페치 같은 해외 온라인 숍에서 구입한답니다.” 그녀 역시 오랜 시간 이베이를 통한 온라인 쇼핑에 심취하고, SPA 브랜드의 제품을 많이 구입했지만, 다양한 성격이 공존하는 옷장에서 제대로 된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고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이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고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물건을 쇼핑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눈 쇼핑 고수들마다 관심사가 다르고 애용하는 쇼핑 경로도 달랐다. 하지만 그녀들이 얘기하는 좋은 쇼핑의 노하우는 모두 ‘나만의 스타일을 찾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동안 우리는 나날이 발전하는 쇼핑 창구와 경쟁적인 소비 심리로 인해 얼마나 잘못된 쇼핑을 하고 있었나? 어느 나라 면세점에 가야 에르메스 백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지, 제일모직 직원들만 다닌다는 패밀리 세일 기간이 언제이며 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는 몇 번의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물건을 싸게 사서 모으는 것보다 버리거나 안 입는 옷 없이 내가 산 물건들이 활용도가 높아져 순환이 잘되는 옷장을 만드는 것. 쇼핑하는 방법이 아닌, 쇼핑의 목적에 집중할 때다.
NEW GROUND RULES
그동안 우리가 잊고 있었던, 후회 없는 쇼핑을 위한 행동지침 다섯 가지.
1 옷장을 정리한다 입는 옷과 안 입는 옷을 구분하자. 가지고 있는 옷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취향과 스타일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옷장뿐만 아니라 평소 하고 다니는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도 모니터하면 더 좋다.
2 눈으로 확인한다 보통 오래가는 옷은 좋은 소재로 만든 것인데, 밝은 조명에서 찍은 옷 사진은 소재와 색상을 왜곡할 수 있다. 피팅도 마찬가지. 웬만하면 옷을 직접 보고, 만지고, 입어보자. 직접 입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동 구매의 반은 줄일 수 있다.
3 쇼핑 경로를 줄인다 나의 스타일과 취향을 파악했다면 그에 잘 맞는 쇼핑 장소를 열 곳 이내로 제한한다. 필요한 옷은 대부분 그 안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같은 곳에서 계속 구매를 하다 보면 다양한 서비스 혜택도 누릴 수 있다.
4 되파는 것도 옵션이다 살까 말까 고민되는 옷이 있다면 다시 팔 수 있는지를 따져본다. 인터넷 직거래 사이트는 소비자가 아닌 판매자의 입장으로 참여했을 때 훨씬 더 효율적이다. 안 입는 옷은 되팔거나 리폼하는 등 안 입고 묵혀두는 옷이 없도록 옷장의 순환을 유지한다.
5 지향점을 바로잡는다 절대로 싸다는 이유로 옷을 구입하지 않는다. 쇼핑할 때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지향점은 언제나 ‘나의 패션 스타일, 나의 라이프스타일과 잘 어울리는가’이다. 그 외의 이유로 산 옷은 잘 안 입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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