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숨겨지지 않는
<천일의 약속>의 향기를 지켜보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토록 비현실적인, 어쩌면 애초에 외면을 받았을지도 모를 노향기를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인정받게 한 건 어쩌면 정유미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만나고 난 뒤,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해졌다.
“식사는 하셨어요? 과자 좀 드세요.” “와, 고맙습니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데 인색하고 좀처럼 먹지 않는 여느 여배우들과는 달리 그녀는 권하는 과자와 음료를 사양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두 조각으로 쪼개어 “에디터님도 드세요” 하고 나머지 한쪽을 나누는 것도 잊지 않았고 ‘고맙다’는 말을 할 때는 상대방과 눈을 마주쳤다. 메이크업을 받을 때는 담당자에게 갸름해 보이는 메이크업 노하우를 묻기도 하고 <무한도전>의 ‘나름 가수다’ 편을 놓친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한 컷을 더 찍고 싶어 하는 에디터와 다음 스케줄이 있다며 단호하게 거절하는 매니저 사이에서 “빨리 찍으면 시간이 맞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벌써 옷을 갈아입으러 커튼 안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향기일 때만 그런 줄 알았는데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꽤 긴 시간 동안 정유미는 웃고 있었다. 진짜를 답하려 했고 더 많은 것을 들려주고 싶어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과 훌륭한 배우가 되기 전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잘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는 여느 배우에게서 찾기 힘든 단단하고 아름다운 기품이 있었다. 정유미는 향기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래서 지금보다 조금은 늦어졌을지라도 분명히 우리가 그 이름을 기억해야 마땅한 좋은 배우가 되었을 거다.
실물이 더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듣죠?
사실 좀 듣긴 해요. 화면에서 더 예뻐야 하는데 말이에요.
이제 향기에게서는 좀 빠져나왔나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요. 드라마가 정말 끝난 건지, 향기랑 정말 헤어진건지…. 전혀 다른 인물로 살아야 하는 것에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덜 된거 같아요. 드라마 끝나고 너무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뭔가 정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해서 안타깝고요.
<원더풀 라디오>가 <천일의 약속> 끝나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개봉날짜를 잡았더라고요.
시기적으로 딱 맞물리긴 했어요. 덕분에 요즘은 지방으로 무대인사를 돌고 있어요. 영화 홍보하고 그동안 못했던 인터뷰도 하고 일본 쪽 광고 미팅도 하고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계속 스케줄이 있었어요. 드라마 끝나고 크리스마스이브랑 1월 1일 딱 이틀 온전히 쉬었어요.
쉬는 날에는 뭐 했어요?
모처럼 늦잠을 잤어요. 집 밖에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푹 쉬었어요.
열렬했던 짝사랑이 드디어 끝났네요. 그녀로 살았던 수고스러움이란 엄청났겠죠?
초반에는 그 감정들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그렇게까지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도 없고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기만 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요. 좋았던 시절도 없이 마음이 돌아선 후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라 김래원 선배가 지형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감정을 잡기가 힘들었어요. 회사에서 래원 오빠 사진을 프린트해서 벽에 붙여놔라, 컴퓨터 배경 화면을 그의 사진으로 바꿔라, 라고 시키기도 했어요. 실제로 배경화면에 쓸려고 사진을 찾아본 적도 있어요.
그러다 어떻게 그렇게도 지독하게 빠지게 된 거예요?
둘의 이야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관계 속에서의 지형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서연이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예전에는 향기에게도 조금이나마 하지 않았을까. 워낙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니까 좋았던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조금씩 감정이 쌓여간 것 같아요. 이해가 되지 않으면 대본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었어요. 그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어요.
향기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동이>에서 궁녀 정임을 연기할 때 대사가 어렵기도 했고 대본이 너무 임박해서 나오다 보니까 대사를 외울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어요. NG가 한번 나고 두번 나고 계속 반복이 되니까 마치 덫에 걸린 것처럼 대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더라고요. 작품이 끝나고 시간이 꽤 지나긴 했지만 김수현 작가님의 작품 같은 경우는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면 안 되고 호흡까지도 완벽하게 해야 하는 걸로 유명하잖아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을 거라고, 안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마음먹고 오디션을 보러 갔더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엄청 준비를 해갔던 작품에서는 안 된 경우가 많은데 마음을 비우니까 되더라는 말을 절실히 깨달았죠. 뭔가 안정되고 여유있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묻어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을영 감독님이 오디션을 본 뒤에 ‘너는 향기가 아니야, 향기는 연꽃잎에 흘러내리는 이슬 같은 아이야’라고 말씀 하셨다죠?
‘너는 아니야’하셔서 ‘네, 제가 생각해도 전 아닌것 같아요’ 하면서 농담을 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도 오디션 마치고 집에 가는데 ‘여기까지 힘들게 왔으니 가서 대본이나 읽어봐라’ 하시며 6부의 대본을 챙겨주셨어요. 원래 이렇게 챙겨주시나 보다, 하고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2주 뒤에 연락이 왔어요. ‘어렵게 너로 결정을 내렸다. 할 수 있겠냐’라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마지막에 ‘내 희망이 되어주길 바란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기쁘다기보다 겁이 났어요. ‘할 수 있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오는 거예요. 오디션은 편하게 봤는데 막상 내가 한다고 생각하니까 부담감이 엄청 컸어요.
그걸 뛰어넘는 지점이 있었나요?
6부가 지나면서 훨씬 나아졌어요. 자신감도 생겼고요. 감독님이 부딪히면 된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정말 한 장면 한 장면 촬영을 끝낼 때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뭔가 매듭이 풀리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거의 마지막에 둘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이젠 보내준다는 의미로 하는 대사들이 있었어요. 만약에 그분과 같이 있다가 마주치게 되더라도 나 모른 척하지 말아달라고 담담하게 말해야 하는 장면인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진짜로 이 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되는 거고 그럼 진짜 볼 수 없는 거잖아요. 차라리 통보를 받을 때는 괜찮았는데 안녕을 내 입으로 해야 하니까 그게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 정도로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유미 씨 안에 향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요?
연애 경험이 거의 없어요. 적지 않은 나이인데 첫 연애를 늦게 시작하기도 했고 밀당이라든가 그런 걸 잘 못해요. 저보고 곰 같다고 해요. 음, 어떤 면에서는 향기랑 비슷한 점도 있는 것 같아요. 근데 또 향기처럼 다 주는 타입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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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조소영, 김희원
- 포토그래퍼
- 최용빈
- 스탭
- 헤어/이에녹, 메이크업 / 김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