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석의 견고한 얼굴

섬뜩한 살인마, 트랜스젠더 록 가수, 철없는 허세남까지 그 어떤 역할도 백지처럼 흡수하는 영민한 배우 오만석은 천천히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먼 미래나 내일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사는 남자, 오만석의 견고한 얼굴을 마주했다.

얼마 전 뮤지컬 <그날들>에서 청와대 경호원이 된 당신을 봤어요. 단단하고 거침이 없었죠.
작년 초여름부터 3개의 공연을 연달아 하고 있어요. <헤드윅>, <레베카>,<그날들>까지요. <그날들>은 부산과 안산 공연만 남은 상태예요.

주말 드라마 <왕가네 식구들> 촬영이 시작되었어요. 거기서는 허세의 달인, ‘허세달’이라는 인물을 맡았다죠?
3대가 함께 사는 왕 씨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허세달은 그 집의 둘째 사위예요. 좀 밝고 재미있는 캐릭터를 하고 싶었는데, 마침 허세달을 만나게 되었어요. 감독님, 작가님과도 마음이 잘 맞아서 더 기대되는 작품이에요.

그들은 어떤 이유로 당신을 허세달이라는 인물에 안착시켰을까요?
작가님과 미팅을 하는데, 허세달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시더라고요. 시나리오를 보고 생각한 것들을 이야기했더니 정확히 본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맡겨도 좋을 것 같다고요.

배우 경력 14년 차에 처음으로 허세 가득한 마마보이를 연기하게 된 소감은요?
기존과 다른 모습,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굉장히 진지할 거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사실 많이 밝고 긍정적인 편이거든요. 이번 역할은 스스로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캐릭터라 기대가 되고, 좀 더 적극적으로 변신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주말극의 이미지는 특히 오래가는데 그것에 대한 걱정은 없나요?
욕을 많이 먹고 싶어요. 욕을 먹는다는 건 제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허세달은 철부지에다가 되게 뻔뻔한 인물이에요. 자신이 철이 없다는 것도 모르죠. 허세달을 재미있게 풀어내려면 저 스스로 이 인물이 뻔뻔하다는 생각을 지워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실제로도 철부지가 되려고 노력 중인가요?
촬영장에 가서 허세달의 의상으로 갈아입으면 말투가 좀 바뀌어요. 걸음걸이와 자세도 풀리고요. 벌써 허세달의 치명적인 캐릭터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아까 커피 주문할 때 “아이스 아메리카노 따뜻하게 주세요”라고 한 것도 허세달의 영향인가요?
원래 장난치는 걸 좋아해요. 감독님께서 평소에 제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눈여겨보셨다가 대사와 캐릭터에 반영하는 경우도 꽤 있어요.

가족 드라마인 만큼 현장 분위기가 남다를 것 같은데 어떤가요?
처음 대본 리딩하는 날부터 얼마나 화기애애했는지 몰라요. 나문희, 김용 선생님, 이태란, 오현경, 조성하 선배님 등 함께 출연하는 배우 분들과 처음 만났는데도 왠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가깝게 느껴지더라고요. 시작부터 기운이 아주 좋아요.

일주일에 한 번 다 함께 맥주를 마시는 자리도 있다고 들었어요.
대본 리딩이 끝나면 작가님, 감독님, 배우들이 다 모여요. 맥주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촬영 때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스스럼 없이 편하게 할 수 있어서 좋아요. 덕분에 스태프, 배우들과 빨리 친해질 수 있었고요.

살인마와 트랜스젠더, 철없는 허세남까지 당신이 연기하는 인물들은 공통점이 전혀 없어요.
작년에 소극장에서 록 뮤지컬을 한 후, 대형 뮤지컬을 하고 싶었고, 그 후에는 창작뮤지컬을 하고 싶었는데 그때마다 원하는 작품과 캐릭터를 만났어요.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매번 그렇게 다른 배역에 도전하는 이유는 뭔가요?
아무래도 다른 걸 찾으려고 하는 본능이 있는 것 같아요. 잘할 수 있는 것, 익숙한 것에 오래 머무르면 도태되는 기분이 들어요. 나와 떨어져 있는 것, 내가 아닌 것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게 배우의 가장 큰 매력인데 그걸 포기할 수 없죠.

<레베카>의 경우는 출연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고 들었어요.
2막 초반에 막심이 맨덜리 저택의 비밀과 레베카의 죽음에 관해 노래와 대사를 함께 하는 6분 분량의 장면이 있어요. 그걸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극의 성패가 갈릴 만큼 중요한 장면이죠. 그 부분을 영상으로 먼저 보게 되었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꼭 막심이 되어서 그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에너지가 넘치고 성량이 점점 더 풍부해지는 것 같아요. 나이를 거꾸로 먹는 비결은 뭔가요?
처음 뮤지컬을 할 때는 노래를 잘하지도 못할뿐더러 배우는 속도가 정말 느렸어요. 좋아하니까 많이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조금씩 나아진 거예요. 선천적으로 좋은 성량을 타고난 건 아니에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많이 노력한 것 같아요.

꾸준히 무대에 오르는 확고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배우, 관객과 느끼는 교감이 바로 바로 전달되잖아요.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감정이죠. 무대에 내려와서도 문득 그 순간을 그리워하게 되요. 그래서 또 무대를 찾게 되는 거죠. 일종의 중독이에요.

무대에서의 당신은 ‘완전히 쏟아낸다’는 표현이 어울려요.
지난해 <헤드윅>을 할 때가 특히 그랬어요. 공연이 끝나면 시체처럼 무대에서 빠져 나왔어요. 살이 절로 빠지더라고요.

<레베카>, <그날들>에서 유준상 씨와 같은 역할을 맡았어요.
연습할 때는 거의 매일 보지만 공연을 시작하면 만날 일이 없어요. 연속으로 세 작품에서 같은 역할을 해보자고 했었는데, 얼마 전에 형이 다음에는 같은 작품에서 다른 역할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너무 못 만나니까.

같은 기간, 같은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꽤 의지가 되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배역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통 분모를 찾는 건 사실이죠. 성향이나 색깔이 워낙 다르니까 굳이 다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색깔을 더 살릴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죠.

뮤지컬 <즐거운 인생>, <내 마음의 풍금> 등에서는 연출자로도 활약했죠. 연출자로서의 준비도 꾸준히 하고 있나요?
본격적으로는 아니고 슬금슬금 하고 있어요. 좋은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비슷한 작품이 나와서 스톱된 상태예요. <즐거운 인생>의 무대, 시나리오를 수정해서 올리고 싶고, 새로운 창작 뮤지컬도 만들고 싶어요.

배우와는 명백히 다른 영역일 것 같은데, 어떤 매력을 느끼나요?
배우는 작가, 연출자가 원하는 걸 기본으로 제 색깔을 입혀나가는 거지만 연출은 기본 그림을 직접 그릴 수 있으니까 좀 더 포괄적인 구상이 가능해지죠. 연기가 10층 건물 중에 어느 한 층을 맡는 거라면 연출은 건물 전체의 도면부터 완공까지 세세하게 만들어가는 거예요. 배우와는 완전히 다른 매력이 있죠.

배우로서의 길은 생각한 대로 잘 걸어가고 있나요?
생각하고 바랐던 것보다 훨씬 많이 왔다고 생각해요. 제가 가진 능력보다 더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 같아요.

당신의 지금, 이 시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배우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기는 30대 이후인 것 같아요. 직접 부딪히고 경험하고 느껴야 풍성한 감정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지금부터 시작인 것 같아요.

영화와 드라마, 뮤지컬과 연극을 오가며 충실히 필모그래피를 쌓아왔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애착이 가거나 아쉬웠던 작품이 있을까요?
<왕과 나>를 다시 만들면 김처선 역할에 한번 더 도전하고 싶어요. 기대를 많이 한 작품이라 그런지 스토리나 캐릭터에 있어서 아쉬운 부분이 많거든요. 영화 <우리 동네> 같은 경우도 좀 더 재미있게 풀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작품을 결정할 때는 본인의 감을 믿나요?
매니저나 친구들에게는 가벼운 조언 정도만 듣는 편이에요. 아무래도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이다 보니 관계도 중요하게 작용하죠. 작품 자체만 가지고 결정하기는 힘들어요. 좋은 멤버와 함께한다거나, 친한 친구가 입봉작에 출연해달라고 부탁하면 작품이 조금 부족해도 할 수 있는 거고요.

당신이 가진 것 중에 연기를 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에는 어떤 게 있나요?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 조건이 콤플렉스가 되기도 하고, 장점이 되기도 해요. 자세가 좋지 않으면 자세를 꼿꼿이 하라고 이야기들 하잖아요. 하지만 모든 캐릭터의 자세가 꼿꼿할 수는 없는 거죠. 어떤 캐릭터에는 흐트러진 자세가 어울리거든요. 자신이 가진 것들을 적절하게 조절할
줄 알면 어떤 조건도 긍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어요.

에 호스트로 출연한 걸 보면서 아직 보여주지 않은 것이 더 많은 배우라는 생각을 했어요.
예능에도 관심이 많아요. 에 나온 뮤직 비디오의 가사도 직접 썼고, 닮은꼴 연예인을 등장시킨 것도 제 아이디어였어요. 정말 재미있었고 주위 반응도 좋았고요.

앞으로 또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사람들이 저에게 기대하는 건 다 다른 것 같아요. 좀 더 진지한 작품을 하길 원하는 사람도 있고, 재미있는 걸 원하는 사람도 있어요. 무엇을 하든 얼마나 충실하게, 완성도 있게 해내느냐가 중요하겠죠.

그렇게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시나리오를 볼 때나, 현장에서 연기를 할 때나 작은 요소들까지 찾아내고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죠.

열한살 딸에게는 어떤 아빠인가요?
친구처럼 편안한 아빠이고 싶어요. 이제까지 공부하라는 이야기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책 읽어라, ’‘숙제해라’는 아주 가끔 하지만요. 어제는 책 하나를 읽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저에게 들려주더라고요.

당신과 특히 잘 통하는 부분이 있나요?
둘 다 놀이공원에 가는 걸 좋아해요. 롯데월드, 에버랜드, 도쿄 디즈니랜드 할 것 없이 엄청 다녔어요. 드라마 끝나고 나면 LA에 있는 디즈니랜드에도 같이 가려고요. 자신의 즐거운 삶을 살아갔으면 하고, 그 즐거운 삶 안에 제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함께하는 시간이 긴 만큼 하루하루 커가는 걸 실감하겠어요.
저를 배려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는 게 느껴져요. 제가 피곤해 보이면 자기 방식대로 영양식을 만들어서 가져다줘요. 차와 견과류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과일을 갈아서 주기도 해요. 어제는 외출하려는데 일하면서 마시라고 바나나 셰이크를 만들어 주더라고요.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나요?
간절한 것이 있었다면 이미 다 이뤘을 거예요. 아직 이루지 않은 걸 보면 간절하지 않아서겠죠.

배우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한 작품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더 잘되어야 하는데, 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일 거예요. 저는 지금에 만족하고, 충분하다고, 때로는 과분하다고 생각해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려오는 일만 남잖아요. 내리막길에서는 한번 구르면 크게 다치죠. 지금 이대로 천천히 가는 게 좋아요.

천천히 가는 지금의 당신이 좋아 보여요.
오늘이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할 수 있어요.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힘들게 사는 사람은 미래도 절대 행복할 수 없어요.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조소영
    스탭
    스타일리스트 / 김선미, 재클린(재클린숍), 김현정(재클린숍)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