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맨과의 대화, 박상원
박상원은 약속한 시간에 정확히 도착했다. 스태프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눴고, 대답을 할 때는 한 번도 말끝을 흐리는 법이 없었다. 잠시 후 그가 카메라 앞에 섰다. 흠잡을 데 없는 신사가 거기 있었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서울, 분당 공연을 지난주에 마쳤어요. 휴가 계획은 없나요?
한 달가량의 휴식을 취하는 건 정말이지 몇 년만이에요. 얼마 전에는 가족들과 휴가도 다녀왔고,다음 주쯤에는 월드비전 친선대사 자격으로 우간다로 봉사활동을 떠나요. 9월이 시작되면 또 정신없겠죠.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지방 공연도 시작하고, 개강도 할 테니까요.
잡지 촬영도 오랜만이죠?
아주 오랜만이죠. 나이를 먹으니까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면이 있어요. 소중한 것을 그에 맞게 대할 줄 알고, 어떤 게 중요한지 구분할 줄 아는 감각이 생겼다고 할까요? 손톤 와일더의 희곡 <우리 읍내(Our Town)>는 1막 탄생, 2막 결혼, 3막 죽음으로 구성된 작품이에요. 3막에서 여주인공이 숨을 거두기 전에 이렇게 말하죠. ‘죽기 전에는 몰랐다’고. 내가 요즘 그런 것 같아요. 전에는 돈 받고 하는 광고 촬영도 피곤하면 ‘빨리 끝냅시다’ 하고 툴툴대기도 했는데 잡지 촬영처럼 귀찮은 일을 이렇게 즐기며 하고있는 걸 보면 말이에요.
<얼루어>가 좋은 시기에 만남을 청한 건가요? 하지만 50대 배우가 ‘죽기 전엔 몰랐다’는 표현을 하다니요!
50대는 아직 젊죠. 무지무지 젊지. 나도 내가 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 모두 태어난 순간부터 사형수 신세잖아요. ‘언젠가 죽는다’는 개념을 안 갖고 사는 걸 더 걱정해야죠.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삶을 살아갈 에너지도 없지 않겠어요?
일종의 ‘메멘토 모리’인 셈인가요?
그럴 수도 있죠. 사형수가 사형 집행장까지 가는 길을 ‘그린마일’이라고 하잖아요. 그 이유가 문득 궁금했던 적이 있었어요. 초록색은 생명의 색인데 죽으러 가는 길이 왜 초록색일까, 고민하다가 혼자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건 사형 집행장까지 가는 그 5분, 10분의 짧은 시간 동안에도 어쨌든 사형수는 살아 있다는 거예요. 죽음을 향해 걸어갈지라도 살아 있는 한은 살아야 한다는 거죠. 형이 언제 집행될지 알 수 없다는 점은 사형수와 다르지만 언젠가는 그 순간이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치열하게 열정적으로 살 필요는 있다고 봐요.
지금보다 젊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나요? 아니면 나이를 먹으며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 건가요?
지금도 그런 삶을 지향한다는 거지,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시간의 질량이 농축된 것처럼 훨씬 무거워지는 것은 맞아요.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잖아요?
당신은 워낙 부지런한 배우로 유명하죠. 얼마 전에는 두 번째 사진전을 열었고, <브로드웨이 42번가>에 함께 출연 중인 뮤지컬 배우 남경주 씨와는 공연 기획사 ‘박앤남’을 차렸어요. 시간을 빈틈없이 쓰고자 하는 당신의 노력이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판도를 따라가기보다 그 틈새에서 하고 싶은 작품, 더 좋은 작품을 하고 싶은 욕심은 늘 있어요. <브로드웨이 42번가>는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무대를 만드는 우리들의 이야기잖아요. 제가 연기를 하는 줄리안 마쉬는 브로드웨이의 흥행 연출가인데 극중에서 그가 배우들에게 하는 대사에 진리가 담겨 있어요. ‘진정한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라’ 같은 것 말이에요. 그런 점에 반했죠.
줄리안 마쉬처럼 후배들에게 실제로도 조언을 하는 편인가요?
이제 대부분의 현장에서 제가 최고 연장자인 경우가 많아요. 직접적으로 조언을 하기보다 솔선수범하려고 하죠. 예를 들어 공연이 보름 정도 남으면 의상과 소품을 무대 올라갈 때와 똑같이 하고 연습해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니까요. 2~3일이 지나니 후배들도 차림새를 갖추고 연습실에 오더군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전체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참 행복했어요.
지난 연말, 오랜만에 출연한 TV 토크쇼를 보니 예전의 작품이나 동료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으로 기억하더군요.
일부러 기억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들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거죠. 누구와 뭘 했는지, 몇 연도였는지 전부요. 아마 이것도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해요. 많은 것이 여전히 또렷해요. 아직도 연기를 시작했던 대학생 시절부터 출연작품의 대본과 소품 등, 나와 관련된 것들은 99% 정도 가지고 있어요. 전부 소중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버리기가 힘들더군요. 보관하는 게 당연 하다고 생각해요.
연극 무대에서 활약하다가 1988년 <인간시장>으로 브라운관에 데뷔했어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종학 PD의 작품이었죠. 이후에도 그의 작품인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에 출연했고요.
‘김종학 사단’이라 부르죠.
김종학 PD는 <태왕사신기>를 통해 국내 드라마에 사전 제작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어요. 그의 죽음의 원인으로 현재 드라마 제작 환경을 지목하기도 하던데요.
우리는 지나치게 시청률로만 드라마를 평가하고 있어요.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 <첫사랑>, <그대 그리고 나>는 전부 제가 출연한 작품이고, 역대 드라마 시청률 10위에 드는 작품들이지만 서로 어떤 게 더 낫다고는 결코 비교할 수 없거든요. 시청률은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별 것 아닌 건데, 그게 주는 명암이 너무 또렷해요.
당신도 시청률에 신경 쓴 적이 있나요?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제가 나온 모든 작품이 시청률이 높아서 신경 쓸 일이 없었던 게 아니라, 시청률이 작품의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출연한 드라마들은 한국 드라마의 ‘전설’에 가까워요. 지겨운 질문일 수도 있지만 그 작품들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그 작품들에 대해 저는 감사하다는 마음밖에 없어요. 그런 작품에 내가 서 있었다는 것,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 그로 인해 사람들이 나를 알게 됐다는 것. 그리고 그런 작품들이 몇 개나 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 아니에요? 다만 그 느낌을 가지고 다른 더 큰일을 해야죠. 과거에 취해서 유물처럼 쓰다듬고 있는 것, 정말 비효율적이잖아요.
많은 당신 또래의 배우가 사극에 출연하거나 아버지 역할을 맡는데 당신은 여전히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죠. 심지어 드라마 <황금물고기>에서는 스물세 살 아래인 조윤희 씨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어요. 이유가 뭘까요?
어색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겠죠? 멜로를 계속할 수 있고, 그런 역할이 꾸준히 들어온다는 건 확실히 기분 좋은 일이에요. 현장에서 학생들을 많이 만나는 게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서경대, 수원대를 거쳐 지금의 서울예대까지 15년 가까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열정에 있어서 만큼은 학생들한테 뒤처지기 싫거든요.
교수 박상원은 어떤 사람인가요?
연기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가고 싶어해요. 교수인 나는 가이드예요.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죠. 저는 함께 수업할 학생들의 이름을 다 외워요.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외워서 불러주면 ‘저 사람이 내 이름을?’ 하는 생각이 들며 그 사람의 말에 좀 더 집중하게 되거든요.
‘요즘 애들은 다르다’고 느낄 때도 있겠죠?
요즘 학생들은 우리 때보다 훨씬 잘해요. 재주도 있고, 끼도 있고, 모든 걸 갖추고 대학에 오죠. 그런데 참 지독하게도 열심히 안 해요. 저는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너무 모르는 게 많고, 가진 게 없어서, 그게 무서워서 정말 치열하게 했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자꾸 열심히 하라고 해요. 지지고 볶고, 싸우고 있죠.
올해 드라마 출연 계획은 없나요?
최근에 엄청난 악역을 제안받았어요. 아들하고는 싸우고, 부인을 배신하는 캐릭터였죠. 결국 거절했어요. 연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예요. 박상원을 버리고 햄릿이 되거나, 햄릿을 박상원식으로 하거나. 그리고 드라마를 할 때는 박상원식 햄릿을 연기하는 게 좋고요. 완전한 햄릿이 되기엔 시간과 상황이 너무 촉박하거든요. 그런데 가족을 배신하는 캐릭터와 진짜 6개월 동안 오가고 싶지는 않더군요. 작가에게 ‘배우로서 자격이 부족한가 봅니다’ 하고 거절 의사를 전했어요.
아주 ‘나쁜 놈’이 된 당신의 모습이 궁금하긴 하네요.
이번 제안을 거절한 거지 ‘이런 역할은 하지 않겠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준비 기간이 길고, 완벽하게 나를 버리고 몰입하는 게 가능한 연극에서는 좀 더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는 연극 <레인맨>에서 자폐아 연기를 했죠.
세련되고 부드러운 이미지 때문인지 당신의 행동을 정치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꽤 많더군요. 위키백과에 당신을 검색하면 ‘탤런트 박상원, 주민투표 독려 1인 시위’가 링크되어 있는 걸 알고 있나요?
무상급식 관련한 주민투표였죠.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었는데 그 당시 저는 서울시 홍보대사직을 맡고 있었고, 홍보대사 입장에서 주민투표를 독려하자는 차원이었어요. 그 행동이 포괄적인 복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무상복지에 대해서 강력한 의견을 피력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죠.
당신이 하는 다른 사회적인 활동을 보면 그런 해프닝도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워낙 다양한 사회활동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으니까요.
가장 오래 인연을 맺고 있는 곳이 근육병재단과 월드비전이에요. 근육병재단은 27년, 월드비전은 이제 23년째네요.
당시에는 봉사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결심하게 됐나요?
처음 시작할 때는 고민이 많았어요. 꾸준히 활동하는 자원봉사자에 비하면 나는 일년에 한 번 얼굴을 비추고, 일은 혼자 다 한 것처럼 폼만 잡는 것 같았거든요. ‘내가 위선자인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보여지는 일을 담당하는 게 내 역할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한결 편해지더군요.
보여지는 역할만 한다고 말하기에는 직접 참여하는 활동이 무척 많은걸요?
하하. 거의 세계여행을 하고 있죠. 네팔에는 이문세, 엄홍길 등 마음 맞는 이들과 학교를 지었으니 자주 갈 수밖에 없고, 동티모르, 르완다, 짐바브웨 등 아프리카에도 수없이 갔고요. 작년에는 엘살바도르에도 다녀왔어요. 남북관계가 경직되기 전에는 대북친선대사로 북한에도 종종 갔죠.
당신이 가진 그 에너지의 근원이 궁금해요. 비결은 역시 사형수의 심정으로 사는 건가요?
하루는 길지만 일년은 짧잖아요. 하루를 듬성듬성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1초도 ‘똑딱’ 하고 세보면 제법 긴데, 그 1초가 8만6천4백 개가 모인 게 하루라고 생각하고 살면 하고 싶은 것도, 취미 생활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어요.
그렇게 살아온 결과는 만족스럽겠죠?
후회할 만한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 몸은 약해질 수도 있지만, 좀 더 깊고 무겁게 느낄 수 있는 것들은 많아지겠죠. 그러게요, 이만하면 만족스럽네요 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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