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출발점에 선, 키이라 나이틀리
1년 동안 휴식하며 달콤한 신혼 생활을 누린 키이라 나이틀리를 만났다. 갑판 위에서 칼을 휘둘렀던 그녀는 새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 노래도 부르고, 낭만적인 사랑에도 빠진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재채기를 하면서 인터뷰 장소에 들어섰다. 급하게 나온 듯, 마치 건초더미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기서는 보통 카푸치노를 마셔요.” 29세가 된 그녀를 만난 곳은 이스트 런던의 클럽보다 힙하다는 쇼디치 하우스(Shoreditch House). 그녀는 이 근처에서 밴드 클랙슨의 키보디스트인 남편 제임스 라이튼과 함께 살고 있다. 쇼디치 하우스는 아니었지만, 그녀와 나는 이전에도 마주 앉아 카푸치노를 마신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그녀는 TV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코르셋 속에 배꼽을 감춘 이야기를 늘어놓던 귀여운 아가씨였다. <캐리비안의 해적 : 블랙펄의 저주>와 <러브 액츄얼리>가 성공을 거두고, <오만과 편견>으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게 된 것은 그 2년 뒤의 일이다. 10년 전의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그녀는 그때 발렌시아가의 바이커 재킷을 걸친 채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TV 스타로 막 떠오르는 때였지만, 사람들은 분명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샤넬의 향수 코코 마드무아젤의 모델로 키이라 나이틀리를 선택한 칼 라거펠트는 이렇게 말했다. “키이라에게는 패션이 중요한 화두가 아니에요. 바로 그녀의 캐릭터가 모든 걸 더 근사해 보이게 하죠.” 그리고 지난해 5월, 남부 프랑스에서 조용히 올린 결혼식에서 그녀는 무릎까지 오는 샤넬의 드레스를 입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느다란 허리를 코르셋으로 한층 조이고, 시대극에 걸맞게 무거운 가발을 쓰고 다니던 그녀가 마침내 현대로 돌아왔다. ‘헐크’로 더 유명한 마크 버펄로, 그리고 마룬 5의 섹시남 애덤 리바인이 함께 출연하는 영화 <비긴 어게인(Begin Again) >에서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차인 후 한물간 음악 제작자와 엮이는 영국 출신의 뮤지션을 연기한다. 그녀가 직접 노래를 하냐고? 물론이다!
새 영화 <비긴 어게인>에 대한 얘기부터 해볼까요? 영화에서 노래를 부르던데 실제로 부른 건가요?
제 목소리예요! 다행히 목소리가 아주 끔찍한 편은 아니거든요. 물론 혼자서 흥얼거리는 것과 제대로 노래를 부르는 건 달라요. 어느 날은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다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레타가 혼자 곡을 쓰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캐릭터여서 다행이었죠.
<러브 액츄얼리>처럼 감성적인 영화를 보고 나니 마음이 따뜻해지더군요.
맞아요. 하지만 감성적인 영화를 촬영할 때는 캐릭터가 자칫 ‘오글거려’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해요.
로맨스 영화로 돌아온 이유가 있어요? 칼과 총이 나오는 시대극의 여주인공에 이제 지쳤나요?
<안나 카레리나>를 끝으로 그런 영화는 더 이상 찍지 않았죠. 흥미롭긴 하지만 매우 우울한 경험이었거든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체 나는 세상에 뭘 보여주고 싶은 걸까? 갈등과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스스로에게 작은 휴식을 주는 것도, 뭐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에요.
게다가 상대역인 애덤 리바인도 굉장한 역할을 맡았고요!
굉장히 재수 없는 캐릭터죠. 사실 그런 역할을 기꺼이 수락했다는 점에서 그를 존경해요. 말이야 쉽지, 그런 비호감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영화 속 멋진 주인공, 호감 가는 역할을 탐낼 때는 더더욱 그렇고요.
지구상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와 영화 작업을 하는 건 어떤 경험이었나요? 그를 모델 뒤만 쫓아다니는 바람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요.
아주 사랑스러운 남자예요. 정말정말 재미있고요. 제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신기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쳐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저예산 영화이니만큼 엑스트라를 기용할 돈조차 넉넉지 않았거든요. 오죽했으면 신문에 “애덤 리바인 팬인가요? 그렇다면 애덤 리바인과 한 영화에 출연할 기회를 드립니다”라는 광고까지 실었겠어요. 공연 장면을 촬영할 때에는 10시간 동안 두 번 화장실을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내내 관객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죠. 약혼녀인 베하티 프린슬루도 촬영장을 종종 찾았는데, 같이 있을 때 한층 특별해 보이는 커플이에요. 둘 다 잘 웃고, 또 상냥하고요.
당신의 어린 시절도 궁금해요. 레고 놀이를 할 때면 언제나 설명서대로 하는 착한 아이였나요?
그럼요! 전 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아이였어요. 모든 게 상자 안에 말끔하게 포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 좋아했지요. 그래서인지 저랑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일하는 걸 좋아해요. 작업을 할 때도 저와 최대한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어 하죠.
언젠가 당신이 한 말이 떠오르는군요. ‘나는 페미니스트다. 하지만 나는 여성인 나를 거부한다. 거기에서 괴리가 생긴다’고 했죠?
이를테면, 일상의 제 모습과 레드카펫 위의 저는 너무나 달라요. 그리고 영화 촬영 현장에 있는 저와 거리에서 본 저도 완전히 다르고요. 극과 극인 양면이 한 사람에게 공존한다는 건, 아마 건강하거나 아주 행복한 일은 아닐 거예요. 왜냐하면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순간, 정신분열증 같은 게 올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이게 제가 살아가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레드카펫 위에서 뭔가 재미있는 일은 없나요?
레드카펫에 서기 전이 가장 재미있죠. 누군가 헤어와 메이크업을 해주고, 샴페인도 가져다주니까요. 그리고 제 헤어, 메이크업 팀이 지난 10년간 제 시상식 메이크업을 전담해와서 지금은 아주 친한 친구들이 되었어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가끔은 말도 안 되는 드레스를 입기도 하잖아요. 레드카펫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그런 드레스를 입겠어요? 그것도 일종의 특권이죠. 드레스를 입고 잠시 그 드레스에 걸맞은 사람인 척해보는 거예요.
지난 4월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입은 드레스는 반응이 별로였던 걸 알고 있나요?
그건 제 드레스가 섹시하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요? 흔히 사람들은 레드카펫 위에서는 섹시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 드레스는 저를 섹시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해줬어요.
록스타의 아내로 산다는 건 어떤 건가요? 남편의 투어에 따라 나선 적도 있나요?
그루피처럼 말이죠? 음, 몇 번은요. 늘 함께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서로의 세계에 조금씩 발을 담그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잖아요. 한 명이 3개월간 투어를 떠나고, 또 다른 사람은 영화 촬영장에서 산다면 둘의 삶은 완전히 분리되고 말겠죠. 자기만의 것을 지키는 동시에 둘이 동등하게 삶을 꾸려나갈 필요가 있어요.
남편 성을 따르는 건 생각해봤나요? 키이라 라이튼도 꽤 멋지게 들리는데요.
남편 성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은 했어요. 여권에는 그렇게 사용해보려고도 했고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막상 그렇게 쓰인 이름을 보는 건 다른 문제예요. 차마 그렇게 쓰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아직까지는요.
결혼 생활에 대해 얘기해봐요. 늘 결혼을 꿈꿨나요?
아뇨! 전혀요! 부모님께서 늘 그러셨죠. “귀찮게 뭐 하러 결혼을 해?” 그래서 저는 두 분이 좋은 조건으로 담보 대출을 받으려고 함께 사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임스가 프러포즈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잖아? 한번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결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군요. 실제 해보니 어떤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데, 법적으로 반려자라는 게 증명되지 않으면 병원에 보호자로 갈 수 없잖아요? 하지만 이제 전 그런 자격이 생겼죠. 그게 제가 느낀 가장 솔직한 감정이에요. 결혼한 게이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너무나 소중하죠.
2012년에 벌어들인 연봉이 5만 달러에 불과했다고 최근 스스로 공표했는데, 사실인가요?
네, 맞아요. 실제 그 정도였어요. 제가 그 이상 벌기를 원했다면 더 벌 수 있었겠죠. 하지만 딱 그 정도 벌었어요.
남의 수입이나 캐묻는 것처럼 들렸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A급 할리우드 스타의 연봉이라기에는 너무 적어 보여서요!
라이프스타일이 화려하다는 건,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과는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아요. 삶이 고립된다고나 할까요? 저는 커리어의 정점에 있었을 때조차 화려하게 살아본 적이 거의 없어요.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사나요?
두 명의 친구와 작년에 파리에 갔는데, 하룻밤에 40달러인 호텔에 묵었어요. 한 친구가 직업이 없던 상태라 가능한 한 싼 곳을 찾았거든요. 두 개의 작은 싱글 베드가 놓인 방을 함께 나눠 썼어요. 방이 어찌나 작은지 현관문을 연 상태에서는 화장실 문을 열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도 아주 재미있었죠.
그러니까 당신은 씀씀이를 조절할 줄 안다는 거군요.
부모님이 배우이자 작가셨죠. 그러다 보니 지금은 이걸 가질 수 있지만 언젠간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돈에 둔감해질 수 있었죠. 이 발렌시아가 재킷처럼 가끔은 말도 안 되는 돈을 쓰기도 하고요.
10대, 그리고 20대 초반의 당신을 혐오한다고 들었는데, 왜죠?
행복하지 않았으니까요.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커리어 면에서는 나름 만족스러웠지만 개인적으로는 엉망이었죠. 10대와 20대를 아주 멋지게 보내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파티도 즐기고 실수도 저질러가면서, 세상이 자기 것인 양 취한 채 보내는 사람들요. 하지만 그러기에 전 너무 내성적이었어요. 어딜 가나 파파라치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니 더 최악이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스물다섯이 되고 나니, 더 이상 그런 것들이 신경 쓰이지 않더라고요. 그동안 꼭 쥐고 있던 고삐를 놓아버렸다고나 할까요? 그러자 모든 것이 놀랍도록 좋아졌어요.
더 나이가 들면 더 좋아질 거예요. 어쨌거나 당신은 대기만성형인 것 같죠?
물론이죠!
오랫동안 여배우가 되기를 갈망했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이상한 일이긴 해요. 세 살 때 소속사를 구해달라고 부모님에게 떼를 썼고, 여섯 살에 이미 소속사를 찾았잖아요.
네, 그랬어요. 두 분 모두에게 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러대는 매니저가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배우이자 각본가인 당신의 어머니 셰먼 맥도널드는 ‘넘사벽’으로 묘사되기도 해요.
엄마에겐 분명 자기만의 방식이 있어요. 동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천상의 목소리로 속삭일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철의 여인이기도 하죠.
당신도 엄마처럼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불행히도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엄마가 늘 이야기하는 거지만 제게는 못된 습성이 있거든요. 욱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화가 나면 아주 심할 정도로 냉정해지곤 해요. 그럼 엄마는 “그렇게 백날 해봤자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을걸? 바람이 아닌 태양이 되어야 해”라고 말씀하죠.
바람과 태양이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태양과 바람이 거리를 걷는 남자의 코트를 누가 먼저 벗기는지 내기를 하잖아요. 먼저 바람이 세게 입김을 불어요. 그러자 남자는 코트를 꼭 여며 쥐어요. 그 다음 태양이 내리쬐죠. 뜨거운 햇살 아래 남자는 코트를 벗어요. 엄마는 스스로도 태양 같은 그런 인생을 사셨어요.
결혼 생활을 한 지 이제 일년 남짓 되었는데, 지금쯤이면 아이도 갖고 싶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이가 생기면 남편과 육아를 반반 부담할까요? 당신은 예전에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규정한 적이 있는데….
그랬죠. 하지만 페미니즘은 좀 애매한 용어인 것 같아요. 평등, 동등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얼마 전 딸이 생긴 친구와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아내 대신 집에서 아기를 돌보는 친구인데, 어느 날 ‘엄마와 아기 교실’에 갔더니 거기 온 엄마들이 전부 그러더래요. “어머, 오늘은 아빠가 아기 보는 날인가 보죠?” 제 말은, ‘남자라서’ 그런 소리를 듣는 건 아기를 돌보는 건 여자들의 의무라는 말을 듣는 것만큼이나 불편한 일이라는 거예요.
이 말은 꼭 해야겠네요. 당신은 나이에 비해 아주 현명한 사람이에요.
현명한 게 아니라 현명한 척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당신에게는 뭐든 ‘연기’란 거군요. 하지만 ‘똑똑함’을 연기할 수는 없다고요!
인터뷰를 ‘잘하는 척’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음악이나 축구에 대해 잘 아는 척하는 것처럼요.
- 에디터
- 질리언 데이비슨
- 포토그래퍼
- Tom Mun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