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정아의 아름다운 시절
영화 <카트>의 개봉을 하루 앞둔 화요일, 염정아를 만났다. 마트의 유니폼 대신 화려한 옷을 입고 손목에는 다이아몬드 주얼리가 빛나고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그녀의 진짜 옷은 아니었다. 염정아가 가장 좋아하는 역할은 그녀 자신이었음에도 그녀는 <카트>를 두고 말했다. “선희는, 정말, 제 현실 같았어요.” 어쩌면 올해 최고의 영화.
내일 <카트>가 개봉해요. 영화는 2년 만이죠?
저로서는 안 할 이유가 없는 영화였어요. 의외의 캐스팅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지만, 캐스팅하신 분들도 저도 선입견을 버린 거죠.
안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 시원한데요?
정말로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작품과 제작사도 좋았고 스태프와 감독님도 좋았어요. 배우들 캐스팅도요. 사람들이 나를 미스 캐스팅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생각만 들지 않게 역할을 소화해낸다면, 성공적일 거란 믿음이 있었어요.
정치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사람 없었어요?
전혀요. 요즘 인터뷰하면서 많이 받는 질문인데, <카트>는 그 어떤 것도 선동하지 않는, 그냥 우리 이야기예요. 현실적으로 담담히 풀어냈어요.
작은 영화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면서요?
맞아요. 작은 영화가 아니에요. 마트를 통째로 빌릴 수 없는 상황이라 세트를 지었고, 세트를 짓는 데 들어간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하고 CG도 많이 들어갔어요.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개런티를 낮추어 제작비를 조절했지만 돈 많이 쓴 상업 영화예요.저희 잘돼야 해요!
요즘 여배우가 주축을 이룬 영화를 보기 힘들었는데, 여배우들의 영화라는 점도 기대가 되었어요.
거의 없었죠. 이렇게 모이기도 쉽지 않고. 서로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던 것 같아요. 마음껏 연기를 할 수 있는 작품이 많이 없다 보니까 배우들 모두 열정을 가지고 작품에 임했어요. 저는 촬영 장소와 집이 가까워서 ‘출퇴근’했지만 다른 배우들은 세트에서 먹고 자고 했고요.
여느 촬영장과 다른 재미가 있었을 것 같아요.
김영애 선생님은 거의 매일 음식을 해오셨어요. 휴대용 가스레인지 들고 오셔서 직접 조리도 하시고. 커다란 솥에 떡볶이를 만들어 스태프들과 다 나눠 먹었죠. 아침마다 다들 본인이 좋아하는 간식을 챙겨와요. 마트에 들러 장을 봐오기도 했고요.
주연 배우들이 직접 대기실과 세트 청소도 했다던데요?
주연 배우가 중요할까요, 다 우리 것인데. 한번 날을 잡아 물청소를 쫙 했어요. 속이 다 시원하더라고요. 처음엔 제가 시작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후배들도 합류했고, 나중에는 조를 나누어 당번을 정했어요. 함께 촬영장을 늘 깨끗하게 유지했어요.
여배우들의 청소당번이라니, 한 편의 예능이 되겠어요.
사람들은 여배우들이 화려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들도 별 다를 것 없어요.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해요.
이 영화가 건드리는 게 바로 그 지점이에요.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한데, ‘어느 날 내가 해고를 당한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지죠.
제가 맡은 역할 ‘선희’가 그래요. 선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데, 선희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라 어느 누구도 그녀와 공감할 수 있어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라는 일 열심히 하는, 아주 성실하게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다를 게 없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정규직 전환을 앞둔 선희가 해고되는 거예요. 선희는 잘못한 것도 없는 모범 사원인데 사람들과 똑같이요.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지죠. 그러다 모두 하나가 되어 힘을 모아 복직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노조에 들어가게 돼요. 그러면서 선희는 점점 성장을 하죠.
시나리오 처음 봤을 때 가장 마음에 와 닿은 장면은 뭐였나요?
영화에서 선희가 각성을 하는 지점이 있어요. 영화 속에는 동료애와 가족애가 있는데, 여기서 가족 이야기인 선희와 아들 이야기가 가장 커요. 그래서 아무래도 관객들은 선희의 감정선을 따라가게 되고요. 영화 거의 후반부로 가면 전기가 끊긴 어두운 밤, 촛불 하나를 앞에 두고 아들과 둘이 마주 앉은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은 책으로 읽었을 때도 많이 울었고, 촬영을 할 때도 울었어요. 아무래도 시나리오를 읽는 동시에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건 저도 아이들 엄마이기 때문일 거예요.
선희의 아들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편의점에서 부당한 일을 겪어요. 선희가 각성을 하는 것도 자신보다 ‘엄마’로서였죠.
아들이 잘못도 없이 엄청 얻어맞거든요. 그 순간 엄마로서 각성을 해요. 아, 이게 내 문제만은 아니구나. 우리 모두의 문제이구나. 지금 나의 앞길만 생각할 게 아니라는 걸,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죠.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장면 장면마다 울컥함을 만드는데, 아들도, 엄마도 성장을 해요. 디오(도경수)가 연기를 정말 잘했어요. 아이돌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영화를 보면 신인 배우라고 생각할 거예요. 참 잘했어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네요. 저도 예전 직장에서 월급이 밀렸는데 갑자기 폐업한 다음에야 다 함께 노동청을 찾고, 노동법을 찾아보게 되었거든요. 열심히 일하면 보상을 받는 게 당연한데, 사회는 종종 그 당연함을 배반해요. 영화를 보면 간접적이지만 그런 부당한 일이 대충 뭔지 알게 돼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아주머니들이 겪는 이야기예요.
어떤 평론가는 지금껏 당신의 모든 영화 중 당신이 가장 아름답게 나온다고 하더군요. 가장 수수한 모습이었는데 말이에요.
제일 사람 같았어요. 기미도 그리고, 다크써클도 안 가렸어요. 지금까지 극화된 역할을 많이 해오다 보니까, 사람 냄새가 물씬나는 연기를 많이 해보지 못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역할을 더 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다른 여배우들은 당신의 필모그래피를 많이 탐내던데요.
그런 배역들이 매번 저에게 주어진다는 건 정말 좋아요. 그렇지만 그런 연기를 많이 하다 보니, 다른 연기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선희 역할을 맡으며 어떤 연기 욕심이 생겼나요?
영화 속에서 선희의 성장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야만 했기 때문에, 누구도 공감할 수 있는 연기를 해야 했어요. 그 과정이 사실 쉽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영화를 순서대로 찍다 보니 선희는, 어느새 정말, 제 현실이 된 것 같았어요. 투쟁을 하면서 마음이 힘들었지, 몸이 힘든 줄은 몰랐어요. 물대포도 생각보다 괜찮던데요?
영화를 본 관객의 반응이 기대되는데요?
시사회를 많이 했는데, 기자분들이 그렇게 많이 우는 모습은 처음 봤어요. 보통 기자분들은 반응이 냉담한 편인데도 이 영화는 참 좋아하세요. 기자분들만 좋아하는 영화가 되면 안 되는데….
하하! 아닐 거예요.
정치인들이나 문화계 인사들도 관심을 가져 주시고, 인터뷰를 할 때도 의식 있는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분들은 눈을 분명히 마주치며 허공에다 ‘우리 같은 편 맞지’ 하고 눈으로 묻기도 해요. 시사회에 엑소 팬들이 많이 왔는데, 한 아이는 따라 나와서 저를 붙잡고 한참 울었어요. “우리 엄마 마트에서 일하세요”라면서. 그 아이는 아마 영화 속 제 모습을 보고 “우리 엄마가 저런 일을 겪는 게 아닐까?” 되물었던 것 같아요.
그 아이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부모님을 직업인으로서 이해하는 순간이 분명 있었어요.
그 순간만큼은 그 아이도 저도,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제 마트에 가면 전과는 다르게 보일 것 같아요.
혹시 내가 이분들에게 막 대하지는 않았었나. 나 때문에 기분 나쁜 일은 없었나. 그런 기억은 없는 것 같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일하는 분들을 자세히 보게 되요. 그러면서 장 보러 온 다른 사람들도 보게 되었어요. 저 아주머니는 왜 반말을 하지. 왜 인상을 쓰고 계실까, 하면서 돌아보죠.
결말은 마음에 들었어요?
시나리오 그대로였어요. 그런데 그렇게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 영화예요.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라 어떤 결말을 내기 쉽지 않죠. 그리고 시원하게 해결이 나는 사건은 세상에 드물고요.
올해에는 또 <트루 라이브 쇼>의 진행자가 되기도 했죠. 토크쇼를 진행하는 건 어땠어요?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제가 언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보겠어요. 보통 4~5시간 촬영을 하는데, 게스트의 이야기를 들으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요. 우리 게스트들만 다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자기만의 생활 방식이 정해져 있고 주관이 확실해요. 다들 똑똑하더라고요. 자신의 삶을 재미있고 현명하게 사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매주 같은 날 녹화하는 건 또 새로운 경험이죠?
일하는 게 아니라 숨 쉬러 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평상시에 가정에서 주부로 살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연예인이 되는 날.
하하. 일주일에 하루로는 부족하지 않아요?
충분해요. 즐거웠어요. 전에는 한 작품이 끝나면 바로 다음 작품으로 넘어갔고, 일이 없으면 불안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촬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갔을 때, 더 큰 일이 절 기다리고 있어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카트>처럼 좋은 작품을 만나는 건 선물을 받는 기분이에요. 귀하고, 즐겁고, 결혼 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기도 해요.
올해는 부산국제영화제에도 갔죠?
그런 먼 곳을 애들과 남편 없이 간 게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이라 조금 낯설었어요. 아이들과 남편 것 없이 내 짐만 싸니까 짐이 너무 조금이었어요. 내 몸 하나 챙기는 건 참 편한 일이구나 싶었죠. 남편이나 애들 챙길 일이 없으니 너무 이상했는데, 가볍더라고요.
오랜만에 선 레드카펫에서는 정말 여배우답게 아름다웠어요.
레드 카펫이야 뭐… 길더라고요.
참, 사람들에게는 <카트>는 ‘재미있는 영화’라고 말할게요.
정말요! 우리 영화는 입소문이 중요해요. 이건 정말 재미있는 영화예요. 재미있어요.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다면 재미있는 영화 아닌가요?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허윤선, 스타일 에디터 / 김지후
- 포토그래퍼
- 박지혁
- 헤어
- 백홍권
- 메이크업
- 오현미(바이라)
- 어시스턴트
- 유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