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라서 청소했다
단순한 삶을 원하십니까? 혹시 너무 많은 물건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당신도 청소를 시작해야 할 때. 가장 먼저 준비할 것은 쓰레기봉투와 박스, 그리고 단호한 결심입니다.
문득 내가 사는 공간을 돌아봤다. 언뜻 보기에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은 책장에 있고, 옷은 옷장에 있고, 모든 사물이 제자리에 놓여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왜 나의 하루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걸까? 그 물건, 그 옷, 그 CD만 필요할 땐 안 보였다. 줄자는 새것을 산 후에야 낯선 박스 안에서 나타났고, 참 좋아하는 그 옷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계절이 지난 후였다. 만약 당신이 정리정돈에 능하며, 무소유의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생에 필요한 딱 최소한의 물건을 두고 살고 있다면 앞으로의 이야기는 그냥 ‘가엾은 사람!’이란 마음이어도 좋다. 하지만 여기저기 쿡쿡 찔리고 이리저리 몸이 간지럽기 시작했다면 나와 함께 청소하길. 마침 새해기도 하니까.
피처 에디터, 청소하기로 결심하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행운은, 말 그대로 행운이었지만 가끔은 특권이기도 했고, 방종이기도 했다. 친구들이 오피스텔이나 투룸 빌라에 살며 딱 그만한 공간에 맞는 물건을 들이는 동안, 난 부모님이 내게 내준 침실과 거실, 욕실을 흥청망청 사용하고 있었다. 곳간에 곡식을 쌓듯 붙박이장에 옷과 가방, 신발을 그득하게 쌓았고, 늘어난 책 때문에 벽마다 책장을 세워야만 했다. 거짓말을 약간 보태면, 나는 당장 세상의 모든 방직공장이 문을 닫아도 평생 걱정 없이 살 만큼의 옷이 있다. 패션 에디터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자칭 ‘컬렉션’을 이루고 있었는데, 무채색이 주를 이루는 만큼 때 타서 못 입을 걱정도 없었다. 그러나 매일 아침이면 늘 입을 옷이 없어서 머리를 싸맸고, 원하는 옷을 찾지 못해서 애먹었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무심코 이 책을 손에 든 순간 내 머릿속에 종이 울렸다. <여자의 인생은 옷장 속을 닮았다>. 아니, 여자의 인생이 왜 옷장 속을 닮는단 말인가! 어쨌든 호기심과 죄책감을 자극한 제목 덕분에 끝까지 읽었다. 스타일 컨설턴트인 저자 브렌다 킨셀은 옷을 너무 많이 갖고 있거나, 제대로 정리 못하는 여자를 위해 이 책을 썼다. ‘당신만의 베이지 컬러를 찾아라’, ‘남자친구는 없어도 스카프는 있어야 한다’는 추상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오히려 짧은 분량을 할애한 정리정돈법이야말로 이 책의 빛나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이 책은 그 어떤 자기계발서도 해내지 못한 동력을 제공했다. 옷장 정리에 대한의욕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옷장 정리의 법칙
‘지금까지의 옷장 정리법은 잊어라’. 모두 합쳐 열 자짜리 붙박이장을 열어 젖히면서 되뇐 말이다. 저자는 우리의 옷장은 ‘갱생’의 대상이라고 표현했다. 즉, 완전히 뒤집어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옷장에는 옷이나 액세서리 등만 있어야 하며, 눈 감고 아무 옷이나 집어도 당장 입어도 될 만큼 최고로 좋아하는 옷만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이별’이다. 정리에 관한 많은 전문가들은 지난 2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은 버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3년 동안 입지 않은 옷만 버리기로 했다. 먼저 옷장의 모든 옷을 전부 꺼내야 한다. 침대 위에 깨끗한 시트를 깔고 그 위에 모든 옷을 꺼냈다. 침대로는 부족해서 바닥에도 쌓았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놓지 않아서 유감이다. 옷의 거대한 무덤, 바로 그것이었는데 검은색 옷이 많아서 더욱 그렇게 보였다. 그 많은 옷을 보는 순간 이미 질리기 시작했다. ‘모든 옷을 꺼내라’는 건 바로 이것을 깨닫기 위함이었던 걸까?
예상대로 내가 가진 옷의 80%는 휴면상태였다. 자, 그 다음이 정말 어렵다. 버리는 박스에 옷을 던져 넣는 것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거의 울고 있었다. 옷에 담긴 추억도 생각났지만 원래 얼마를 주고 샀는지가 생생하게 떠올라서였다. 이 옷이 원래 있던 현금의 모습으로 옷장이 아닌 계좌에 차곡차곡 쌓였다면 난 부자가 되었을 텐데. 저자는 바로 이 과정이야말로 고통을 통해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가슴이 찢어지는 마음으로 옷을 버리는 경험을 해야만, 앞으로 옷을 사는 데 신중해진다는 것이다.
버리는 박스에 옷을 넣었다, 다시 꺼냈다. 다시 넣었다가 꺼냈다를 반복하면서, 세 박스 분량의 옷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 다음에는 빈 옷장에 선택받은 옷을 다시 걸어야 한다. 브렌다 킨셀의 옷장 정리법은 명확하다. 파스텔처럼 컬러별로 정리하라는 것이다. 옷장 왼쪽부터 하양, 노랑, 주황, 다홍, 초록, 파랑, 보라 , 회색, 검정까지. 지금까지는 셔츠는 셔츠끼리, 카디건은 카디건끼리 종류별로 걸어두곤 했었는데 색깔별이라니. 어쨌든 베네통 매장처럼 보기 좋게 정리된다면 좋은 일 같았기에 컬러별로 걸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렇게 거는 것이 보기에 즐거우며, 옷에 대한 영감을 떠올리게 하며, 옷을 보다 더 발견하기 쉽게 만든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렇게 정리하고 며칠을 보내고 보니 예전보다 다양한 옷에 손이 가는 게 사실이었다! 이렇게 모든 옷을 한번에 꺼낸 게 얼마 만일까. 이 옷장 정리를 하면서 나는 나의 모든 옷을 적어도 한 번씩 만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세탁이 필요하거나 수선이 필요한 옷을 골라냈고, 새 생명을 안겼다. 유행이 지난 듯했던 새틴 드레스는 15cm가량 밑단을 잘라내는 것만으로 새것처럼 보였다. 내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옷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확은 또 있었다. 내게 필요한 것과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겐 ‘마린 룩’으로 불리는 줄무늬 티셔츠나 스웨터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이번에야 알았다. 브랜드가 다른 줄무늬 옷을 무려 9장이나 샀으면서도 그저 나의 ‘100% 줄무늬 티셔츠’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데님 팬츠도 그랬다! 나는 그냥 데님 팬츠가 안 어울리는 여자였다. 정말이다. 세상엔 베이식 중에 베이식이라는 줄무늬 티셔츠와 데님 팬츠가 안 어울리는 여자도 있다.
책장 정리의 법칙
옷장 정리에 대해서는 팔랑귀였지만 책장 정리는 달랐다. ‘옷장’은 사자와 마녀가 사는 블랙홀이다. 아무리 패션에 날고 기는 사람도 옷장 속 모습은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문만 닫으면 겉으로는 깨끗해 보인다. 책장은 반대다. 책장은 혼돈 그 자체여도 책이라서 멋스러운 구석이 있다. 책장이 충분치 않으면 사람들은 바닥부터 책을 쌓아 올린다. 먼지가 좋아해서 흠이지, 그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옷장 다음으로 내게 크고 많은 재산이며 다른 말로는 짐, 특히 이삿짐 아저씨가 최고로 싫어하는 짐인 책도 정리하기로 했다. 이건 이삿짐 아저씨가 실제로 한 말이었다. “아가씨 기자예요? 왜 이렇게 책이 많아요? 어휴, 난 기자랑 교수집이 제일 싫더라.”
책 역시 구분이 필요하고, 마냥 늘릴 수도 없는 ‘물건’ 임은 확실하다. 라틴 문학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책을 다룬 <위험한 책>에는 애서가의 끔찍한 죽음을 여럿 보여준다. 길 가면서 책을 읽다가 차에 치여 죽기도 하지만, 책이 너무 많아서 마루가 무너져서 죽기도 하고, 책으로 가득한 집에서 딱 한 권의 책을 찾지 못해 미치광이가 되기도 한다. 책을 정리할 때의 마음도 옷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 중에서도 다독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장정일의 독서노트 제목은 <산 책, 빌린 책, 버린 책>이다. 이걸 책장 정리 버전으로 바꾸면 ‘남길 책, 줄 책, 버릴 책’쯤 될까? 예를 들어 한때 소중했지만 이미 10년 이상 된 정기간행물이 있다면 그것은 버려야 할 책이다. 한번쯤 재미있게 읽은 책은 다른 사람에게 줄 책이 되고, 옆에 가까이 두고 언젠가 다시 펴보고 싶은 책부터 나중에 자식에게도 물려줘야 겠다는 각오까지 드는 책이라면 물론 남겨야 한다.
책을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도 애서가마다 분분한데, 그건 정답이 있다기보다 각자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이 맞다. 내 주변의 한 애서가는 키 순서대로 세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강박이 있고, 다른 애서가는 도서관분류법을 맹신한다. 난 단순하게 고전 문학은고전 문학, 현대 문학은 현대 문학, 그래픽 노블은 그래픽 노블끼리 함께 둔다. 존 어빙이나 이디스 워튼처럼 각별히 좋아하는 작가에게는 특별칸을 내주고, 전집은 되도록 전집끼리 모아둔다. 그 정도면 책 정리는 끝이다. 아마 책은 다음 이사를 갈 때까지 다시 몸집을 불려갈 것이다. 책장의 맨 아래칸에는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온 네 종류의 잡지가 놓여 있다. 이제 펴보는 일은 거의 없어졌지만 내 존재의 증명 같은 이 잡지를 보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언제까지 이 책을 안고 살까? 어쩌면, 영국에서 발 동동 굴러가며 주문해서 구입한 레인코트보다 더 버리기 힘들지 모른다.
기타 등등 정리법
당신이 정리에 소질이 있다면 이미 서랍이나 책상 등 모든 것이 가지런히, 구획되어 놓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안타깝게도 우리는 정리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인정할 수밖에. 하지만 이 정리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늘 항변하는 바가 있으니, 그카오스 속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온갖 물건이 뒤섞인 틈에서도 원하는 물건을 용케 낚아 올리는 기술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다. 어쩔 수 없다. 정리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최대한 적은 물건을 갖고 살아서, 그 물건들에게 우리가 거꾸로 점령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 있다면 과감하게 버리거나, 도저히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겠다면 곱게 리본을 묶어 타인에게 주길.
청소를 마치는 기나긴 과정 동안 가족들은 응원보다는 혀를 찼다. 나는 볼멘 소리로 항변했다. 에디터라는 직업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물건을 써보고 소개해야만 하는 직업이라고. 뷰티 에디터는 화장품, 패션 에디터는 패션이라는 카테고리라도 정해져 있지만, 피처에디터는 만물상 같은 존재라서 그렇다고. 책, CD, 아이패드 미니 같은 테크 제품부터 새로 나온 맥주와 샴페인의 새로운 빈티지, 수첩, 달력, 인형, 텀블러와 머그. 그것뿐일까. 비타민도 먹어보고 레드불도 마셔보고 정말 그을음이 나나 안 나나 향초에 불도 붙인다. 정리하면서 또 한 박스를 버리고, 아까워서 먹고 마시고, 그래도 아까워서 모아둔 게 한 박스를 이뤘다. 내가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이유는 너무 많은 물건이 필요한 직업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좋은 걸 아니까 못 버리고, 정이 들어 못 버린다. 그러니 정리정돈을 잘하기 위해선 딱 두 가지 방법뿐이다. 독해지거나, 후해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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