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집
혼자 사는 여자는 남자들의 이상형일까? 그 여자의 공간에 들어선 남자는 섹스 말고 또 어떤 것을 상상할까. 혼자 사는 여자의 방을 찾은 남자의 마음은 이토록 복잡하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해수(이영애)는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대사로 자신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연하남 상우(유지태)를 자연스레 집에 들인다. 그리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정확히 그 장면이 나오지 않았어도 우리는 알 수 있다. ‘했네, 했어!’ 남자들이 농담처럼 혼자 사는 여자를 이상형이라고 꼽는 이유는 현실적인 요소에서 기인한다. 온전하게 자신의 공간을 갖고 있는 여자와 남자에게 연애는 훨씬 쉽고 효율적인 일이 되니까. 기념일에 굳이 번잡한 길거리를 쏘다니지 않아도 되고, 택시비를 길에 뿌리며 늦은 밤 귀가하지 않아도 되며, 무엇보다 모텔비를 아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이 혼자 사는 여자를 무조건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얼루어> 페이스북을 통해 남자들의 의견을 물은 결과, 여자친구가 혼자 사는 것에 대해 ‘좋다’고 답한 사람들은 전체 응답자의 68%에 그쳤기 때문이다. ‘싫다’를 택한 이유로 ‘여자 혼자 살기엔 요즘 세상이 너무 위험하다’, ‘내가 곧 데리고 살고 싶기 때문에 싫다’ 등 닭살 돋는 댓글이 달리긴 했지만 어쨌든 ‘남자들의 이상형’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수치였다. 여자친구의 자취방에 대해 남자들이 선뜻 ‘좋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그 공간에서 벌어진 일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잘 취하고 자취하는’ 여자가 좋다는 말장난도 있지만, 그게 내 여자친구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혹시 다른 남자도 이곳을 찾지 않았을까, 내가 그녀의 침대에 누운 첫 번째 남자일까 하는 상상. 자취하는 여자친구가 ‘좋다’고 답한 이들도 ‘혼자 살면서 월세도 내고 공과금도 납부해봐야 돈과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 같다’,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다’라고 답하는 한편, ‘그녀의 첫 번째 남자가 나라면 더 좋을 것 같다’라며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니 혼자 사는 여자들이여! 생각보다 혼자 사는 여자라는 것은 연애에 있어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겉으로는 별 말 하지 않을지 몰라도 취향과 일상이 묻어날 수 밖에 없는 내 ‘공간’을 보며 남자들은 의외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혼자 사는 여자를 만난 여섯 명의 남자에게 그 여자의 방에 대한 기억을 시시콜콜 물었다. 그 여자의 집에 간 남자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Case 1 강남역의 그녀
부유한 아버지를 둔 그녀는 수입 없는 대학생임에도 월세가 1백만원에 육박하는 강남역 부근의 오피스텔에 살았다. 지방 출신으로 당시 같은 대학생인 내게는 오피스텔이 강남에 있다는 것 자체가 학교 근처의 친구 자취방을 찾아갈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마치 상류사회에 진입하는 것 같은 느낌? 내부 공간은 단순했지만 거실에 놓인 전자피아노, 그리고 냉장고 속 낫토가 그녀의 세련된 취향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집에 갈 때면 매번 요리 재료를 사갔다. 요리를 해달라는 핑계로 좀 더 그녀의 방에 머무를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밥을 먹은 뒤에는 청소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 공간을 꾸미는 데 참여함으로써 그녀와 좀 더 친밀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의 밥을 해먹은 후, 우리는 연인으로 발전했다. 비록 네 달 뒤 그녀는 강남의 오피스텔을 처분하고 어학연수를 가버리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처음 방문했을 때 내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녀가 미리 집 청소를 한 게 티가 났다. 그 사실이 매우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Case 2 너의 아파트가 좋았어
라오이넬 슈라이버의 소설 <내 아내에 대하여(So Much for That)>의 주인공에게는 철없는 여동생이 있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지만 운 좋게 맨해튼의 넓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여동생을 보고 주인공은 속으로 ‘네 아파트 때문에 너를 좋아한 남
자도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몇 년 전 만난 그녀의 아파트를 드나들며 주인공의 기분을 이해했다. 홍대 중심가에서 걸어서 15분 거리,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청소 아주머니. 함께 살던 친언니가 결혼해서 나간 이후 방 세 칸짜리 아파트를 혼자 차지하고 살던 그녀의 아파트에 가면 늘 호텔에 간 것처럼 쾌적했다. 그다지 맞는 게 없던 우리는 비록 몇 번의 섹스 후에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지만 확실한 건 그녀의 집이 아파트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만남은 한 번에 그쳤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완벽한 공간이었다. 샤워기 물의 온도, 화장실에 즐비한 보디 용품들, 샤워 후 입으라고 건네준 나이키 운동복과 커다란 TV까지! 집에 관한 것만 기억해서 미안할 정도다.
Case 3 그녀, 그리고 고양이
지금 여자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오래된 다세대 주택 건물의 투룸에 살고 있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쾌적하다’고 할 수는 없는 건물, 화장실에 세면대가 없는 것은 오래된 집이니까 이해할 수 있었지만 집 안 가득 날리는 고양이 털은 비염으로 고생하는 내게 치명적이었다. 기자라는 그녀의 직업에 걸맞게 한쪽 벽면이 책으로 가득했는데, 책이 많다는 것은 인상적이었지만 책 더미 위에 앉은 먼지가 내 기관지에 좋을 리 없다는 사실 역시 명백했다. 사귄 지 1년쯤 지나자 그녀는 신축 건물의 투룸으로 이사했다. 잘 치우지 않는 습관은 여전하지만 확실한 건 연애 초기보다 지금 그녀의 집을 더욱 자주 찾고 있다는 거다.
돌이켜보면 비염 때문에 고통스럽기는 해도 동물을 좋아하는 내게 그녀의 고양이 두 마리는 그녀의 집을 찾는 요인이 됐다. 고양이들을 챙기는 그녀를 보며 나중에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잘 볼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한 것도 사실. 내가 비염이 있다는 것을 안 이후 고양이 털 청소에 좀 더 신경 쓰는 그녀의 모습도 고맙다. 비록 코가 간지러운 건 여전하지만.
Case 4 그녀의 머리카락
작은 바의 오너였던 그녀는 나와 중학교 동창이다. 동창들과 술을 마신 뒤 잔뜩 취해 처음 그 집에 방문한 이후, 혼자 다시 그녀의 집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와 잘해보고 싶었다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몇 번 방문하며 처음에는 몰랐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침대와 주방이 분리된 분리형 원룸에 살던 그녀의 침실은 옷과 침대, 그리고 화장품 수십 가지와 고데기, 드라이어 선이 뒤엉킨 화장대가 전부였다. 이곳은 오로지 잠만 자고 화장하는 공간이구나. 주방은 다행히 깨끗했다. 그릇도 가지런했고 찬장 속에 진열된 처음 보는 수많은 양념통, 그리고 약간의 설거지 거리를 보며 밥은 해먹고 산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최악은 화장실이었다. 여자도 여기저기 제모할 곳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면도기가, 그것도 모텔에서 줬을 법한 일회용 면도기가 변기 위에 떡 하니 올려져 있는 건 좀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엄청난 머리카락이라니! 그녀에게 흑채를 선물해야 하나 생각했을 정도로 머리카락이 화장실뿐 아니라 집 안 곳곳에 떨어져 있었다. 왜 치우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원래 걸레질은 자주 하지 않고 가끔 테이프로 바닥의 머리카락을 떼는 정도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음부
터는 차라리 내 자취방에 가리라 다짐했다.
돌이켜보면 남자보다 여자가 지저분하다는 말,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눈앞에 펼쳐졌을 때의 쇼크란…. 자신의 물건을 만지는 것을 싫어하던 그녀 때문에 의자에 쌓인 옷가지를 옷장에 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청소하고 싶었는데!
Case 5 그녀의 반전 원룸
원룸이라고 하지만 고시원에 버금갈 만한 좁은 공간이었다. 스물한 살의 스타일리스트였던 그녀의 방은 상상 초월. 공간이 좁을 뿐 아니라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들어가자마자 당장 나오고 싶을 정도였다. 성인 여자의 자취방이라기보다
는 여동생의 정리 안 된 방처럼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앉을 만한 자리도 침대 위뿐이어서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앉아 있어야 했다. 덕분에 분위기는 야릇해졌지만 섹스를 하는 동안에도 중간중간 옷 더미들이 신경 쓰여 집중하지 못했다. 그녀의 민망한 비밀을 엿본 느낌. 다시 만난다면 바깥에서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돌이켜보면 부끄러울 만한 환경이었음에도 그 방에 간 것 자체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마 어리고 예쁜 여자의 침대였기 때문일 거다.
Case 6 준비된 여자
방송작가인 전 여자친구는 일을 일찌감치 시작한 덕분에 나이에 비해 꽤 긴 경력을 자랑했다. 그래서인지 또래에 비해 씀씀이가 넉넉한 편이었는데, 그녀가 살던 복층 오피스텔 역시 웬만한 신혼집처럼 잘 꾸며놓았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았지만 곳곳에 놓인 센스 있는 소품, 갖춰진 최신 가전 제품을 보며 ‘독립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자취를 시작해서인지 자취방이 아닌 가정집에 가깝게 느껴졌고, 그 안정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그녀와 헤어지기 전까지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그녀의 집에 들르곤 했다. 지금도 가끔 그녀의 집이 생각난다.
돌이켜보면 일본에서 사용하는 탁자형 난로인 코타츠가 집에 있었다. 코타츠 높이에 맞춰 TV가 낮게 배치되어 있고, 특별히 침대도 없어 겨울이면 둘이 코타츠에 들어가 앉아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녀의 집에 갈 때마다 만화책과 귤 한 봉지를 사가곤 했는데, 그녀는 내가 선물한 등받이가 있는 좌식 의자를 아직 갖고 있을까?
남자가 말하는 여자 방의 미스터리
신발장 가득한 신발 분명히 혼자 사는 집인데 현관이 신발로 가득하다. 다리가 지네처럼 많은 것도 아닌데 대체 왜! 누군가를 초대할 땐 적어도 현관은 정돈하자.
현관에 내 신발을 벗어둘 자리도 없을 정도라면 집 안은 더욱 상상하기 싫어진다.
옷장이야 방이야 어제 입고 나간 옷을 걸쳐놓은 정도가 아니다. 의자, 식탁, 침대 모서리, 벽 귀퉁이까지. 집 안 곳곳이 옷과 가방에 점령당했다. 화장실 수건걸이에
브래지어와 속옷은 대체 왜 걸어두는 걸까?
컴퓨터 책상이 없다 남자들에게 컴퓨터 책상은 침대만큼 중요한 가구다. 그곳에 앉아 게임을 하고, 동영상을 보는 것이 집 안에서의 활동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여자들은 침대에 누워서 노트북을 만지작거리거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컴퓨터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니 놀랍다.
곳곳에 놓인 캐릭터 인형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여자의 집에 캐릭터 인형이 범람하면 귀엽다는 생각보다는, 안 어울리게 왜 저런 걸 모으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특히 침대 위에 굴러다니는 인형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별로다. 침대에는 그녀와 나, 둘만 있으면 충분하다.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이마루
- 도움말
- 박한빛누리(<더 스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