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동행
일주일에 한 번, 양희은은 무거운 가방을 싸 들고 조금 멀리 집을 나선다. 발이 닿은 그곳에서 수많은 어르신을 만나고 그들이 알려주는 대로 밥상을 차린다. 팔도를 다니며 삶과 사람과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하루를 동행했다.
강원도 우천면의 작은 마을에 도착해, 주위를 한참 두리번거리던 참이었다. 저 멀리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금은 흥분된, 그러나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양희은의 목소리다. “꽃이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있을까, 정말 너무 예쁘구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어머 세상에, 저 나비 생긴 것 좀 봐, 저렇게 멋있는 나비는 또 처음 보네.” 양옆으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길을 걸으며 그녀는 연이어 감탄사를 쏟아냈다.
이윽고 도착한 아담한 한옥집. 90세가 넘은 노모와 50세 딸, 모녀가 정성스럽게 가꾼 꽃이 지천에 널린 이 집에서 오늘의 밥상을 차리게 된다. 어머니를 보자마자 반가운 인사가 오가고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수다가 이어진다. 대본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한번 촬영이 시작되면 멈출 줄도 모르는 <시골밥상>을 진행한 지도 벌써 3년이 흘렀다.
오늘의 메뉴는 메밀 수제비 장국과 열무 겉절이, 그리고 무청 장아찌. 어머니가 메뉴를 정하자 양희은이 역할을 분담한다. “태연이는 밀가루 반죽을 맡고 승현이는 나랑 같이 채소 따러 가자.” 편안한 신발을 빌려 신고 목에 수건까지 두르고는 배추를 따기 위해 뒷마당으로 나선다. 열 맞춰 자리 잡은 크고 작은 장독대를 지나 뒷마당으로 가니 빨간 고추와 배추, 수박과 방울토마토, 호박과 오이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밭이다. “열무에 구멍이 많이 났어요.” 한참을 고개를 박고 열심히 열무를 따던 승현의 말에 “유기농이라서 그래. 벌레하고 사람하고 나눠 먹어야지, 사람만 다 먹으면 쓰나” 하고 답을 한다. 채소를 따는 일에도 제법 손이 붙어 뭐든 금방이다. 열무는 따는 그 자리에서 아예 떡잎까지 다듬어 가지런히 정리한다. “풀벌레 소리가 달라졌어, 진짜 가을이 오나봐.”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는데도 아랑곳 않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종류별로 한 움큼씩 뽑아낸다. 길가에 핀 과꽃을 보더니 한 자락 노래까지 뽑는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함께 있던 스태프도 나지막이 그녀를 따라 노래를 흥얼거린다. 비닐 하우스에서 감자와 양파까지 꺼내 담으니 커다란 바구니가 벌써 한가득이다. 깨끗이 씻어 평상에 올리고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양파와 감자껍질을 쓱쓱 벗기기 시작한다. 태연이 반죽을 잘하고 있는지, 승현이 가마솥에 불을 잘 붙이고 있는지 감시를 하고 으름장을 놓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부린다 치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똑바로 해, 어르신이 말씀하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런데 너는 시골에 밥상 차리러 오면서 발톱 색깔이 왜 그리 요란해?” 카메라가 돌아가거나 말거나 하고 싶은 말은 바로바로 한다. 오랜 시간 동안 밥을 나눠 먹고 살을 맞대며 지내다 보니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두 젊은 친구들과는 허물이 없다. 사실 함께 하는 승현은 양희경의 아들, 그녀와 이모 조카 사이이니 허물이 없을 수밖에 없다. 영문을 모르시는 어머니가 느닷없이, “두 사람이 참 닮은 것 같아”라고 말씀하시자 “아유, 그런 말씀 마세요. 나 속상해요” 하고 답한다.
웃고 떠들면서 일하다 보니 요리에 들어갈 재료들이 제법 모양새를 갖췄다. 10년 넘게 숙성된 진한 된장을 풀고 곤드레와 감자, 양파, 송이버섯, 그리고 곱게 다듬은 야채와 채소를 넣는다. 세 사람이 나란히 서서는 반죽을 뜯어 솥 안에 풍덩풍덩 집어 넣기 시작했다. 어느새 목에 두른 수건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수제비가 익어가는 동안 태연은 열무 겉절이를 만든다. 어머니가 일러주는 양만큼 마늘과 매실, 고춧가루와 간장을 넣어 휙 휘저으니 금세 맛깔스런 양념장이 완성되었다. 밭에서 갓 따온 열무에 부어 오물조물 버무리니 새콤달콤한 냄새가 알싸하게 코끝을 찌른다. 메밀 수제비가 완성되어갈 무렵, 양희은의 우렁찬 ‘밥상 차려!’ 구호에 따라 오이고추, 오이지, 풋고추, 깻잎, 김치, 연근, 무청 장아찌가 상위에 오른다. “아유 어머니, 너무 많아요. 그만 내세요.” 객지에서 온 손님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어머니는 몇 번이고 부엌을 왔다 갔다하며 반찬통을 밀어 넣는다. 그중에서도 담근 지 3년이 되었다는 무청 장아찌는 수제비가 나오기도 전에 동이 날 판이다. 양파, 달래, 파뿌리, 무청을 넣고 간장 2, 식초 1, 설탕 1로 배합해 담갔다는데 씹었을 때 아삭한 질감과 청량한 끝 맛이 제대로다. 짜지 않고 달콤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있어 자꾸만 손이 간다. 메밀 수제비 장국까지 상 위에 오르자 드디어 오늘의 시골 밥상이 완성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준비를 하느라 다들 배가 고팠는지 촬영 중인 것도 잊고 말없이 먹기에만 바쁘다. 바삐 움직이던 수저를 내려놓고 양희은이 먼저 소감을 전한다. “된장이 10년 숙성된 거라 그런지 맛이 아주 깊네요. 특히 된장이랑 곤드레의 궁합이 좋아요. 된장의 좀 무거운 맛을 곤드레가 가볍게 띄워주네요. 메밀에도 잘 스며들어 구수하면서도 쫄깃쫄깃한 맛이 일품입니다.” 조그만 상에 사이좋게 둘러앉아 열무 겉절이와 한 번, 무청 장아찌와 한 번, 된장에 풋고추를 찍어가며 먹다 보니 어느새 밥 그릇이 깨끗이 비워졌다. “만날 밥상을 차리기만 했지, 이렇게 밥상을 받아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어머니가 <시골 밥상> 식구들에게 인사를 전한다. “아유, 어머니 저희가 도리어 감사하죠.”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는 막내들의 몫. 태연과 승현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양희은이 평상에 앉아 멀리 산을 올려다보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한다.
양희은의 소박한 꿈
<시골밥상>에 뻔한 레시피는 없다. 무조건 찾아간 집의 어머님 식으로 따라 하면서 배운다. 같은 메뉴일지언정 한 번도 똑같은 방식으로 만든 적도 없다. 물 맛이 다르고 장 맛이 다르고 손맛이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얼마나 넣을까요?”, “두어 번 넣어.” “어떻게 자를까요?”, “먹기 좋게.” “이건 왜 넣는 거예요?”, “맛있으라고.” 어머니들과의 대화는 대개 이런 식이다. 좀 두리뭉실하지만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또 그 맛이 나니 참 신기한 일이다. 사실 3년 전에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건 방송사도 피디도 아닌 양희은이었다. “요리 정보 프로그램에 리포터들이 나와서 하는 걸 보면 하나같이 높은 목소리로 ‘맛있다’만 연발하는 진행이 식상해 보이더라고요. 음식을 좀 아는 사람이 나가서 제대로 재료와 음식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어요. 마침 인연이있던 <잘 먹고 잘사는 법> 제작진에게 가볍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이 프로그램의 시작이 된 셈이죠.”
3년간 수많은 어르신의 댁을 방문했다. 촬영 장소를 어떻게 그렇게 매번 다른 곳으로 찾아내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다. 프로그램의 제작진들은 일주일 전에 미리 답사를 떠난다. 시에서 군으로, 군에서 면으로, 마을 이장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각 마을마다 10군데 이상의 집을 추천받아, 집집마다 방문해 창고와 곳간, 밭까지 들여다본 후에 최종 촬영 장소를 결정한다. 양희은은 그렇게 발로 열심히 뛰어주는 스태프들이 항상 고맙다. 이동 시간이 길고 외부에서의 촬영인 만큼 변수도 많아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한 번도 프로그램을 쉰 적도, 그만둘 생각을 한 적도 없다. 심지어 현장에 오면 몸이 불편한 것도 잊고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움직인다. 데뷔 40주년 기념 뮤지컬 <어디만큼 왔니>의 앙코르 공연을 연습하랴, 매일 아침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하랴 빠듯한 스케줄에도 늘 즐겁다. “좀 타고난 것 같아요. 우리 외가 쪽이 낙천적이고 뒤끝 없고 긍정적이고 일이나 사람에 대한 통찰이 있어요. 이거다 싶으면 열심히 하는 그런 기질은 다 엄마한테 물려받은 것 같아요.”
화학 조미료를 쓰지 않는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건강한 음식을 먹고 자라서인지 유독 조미료가 들어가는 음식에 민감했고 남편의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부터 더욱 건강한 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제껏 한 번도 부엌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적이 없다. 지금도 매일 아침 남편을 위해 도시락을 싼다. 정성을 담아 깨끗하게 담아낸다. “그릇은 화려한데 음식은 새모이만큼 담아주는 건 별로예요. 어머니들 만나면 깔끔한 오지 그릇에 이만큼씩 담아주시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이 땅의 어머니들을 만난다는 건 정말 행운이에요. 자식들 다 떠나보내고 적적하게 지내는 거 보면 가끔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참 다행이다 싶은 건 어느 어머니든 흐트러지지 않는 깐깐한 고집이 있다는거예요. ‘나는 내 힘으로 먹고산다. 내 식으로 한다’ 하는 깐깐한 기개가 참 좋아요. 요리하는 방법 외에도 배우는 게 많아요.” <시골밥상>은 화려하거나 자극적인 음식을, 완전히 새로운 음식을 보여주려고 애쓰지 않는다. “우리 전통 음식에 자극적인 것은 없어요. 재료의 고유한 맛을 살리기 위해 양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에요. 어머니들의 밥상 그대로를 꾸밈없이 보여주는 데 의미가 있는 거죠.” 이렇게 돌아다니며 꼼꼼히 배우고 메모한 내용을 정리해 몇 달 전에는 <양희은이 차리는 시골밥상>이라는 책도 발간했다. “서양 음식이 우리의 식단을 장악하는 것 같아서 유감이에요. 젊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을 많이 보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어머니들의 손맛을 보고 배워서 다음 세대에도 계속 이어지도록 말이에요.” 산에서 자란 어린 순을 따고 삶고 말려서 장아찌를 담는, 삶의 고비고비에서 전해지는 지혜 그리고 맵디매운 살림살이 솜씨를 가르쳐주는 어르신들과의 만남은 늘 여운이 길다. 그 여운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양희은이 꾸는 소박하고도 진실한 꿈이다.
양희은이 추천하는 다섯 가지 시골 밥상
1. 곰취 & 머윗잎 쌈밥
서산 운사면의 유서 깊은 종갓집 앞마당에서 곰취 어린순을 잘라 쌈을 준비했다. 아주 여렸다. 집 뒷산 기슭에 가니 노란 수선화가 밭을 이루고 있었고 한편으로 머윗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도 땄다. 잎이 넓고 곰털이 많고 큼지막한 게 머윗잎이다.
1. 팔팔 끓는 물에 머윗잎과 곰취를 넣고 데친다. 2. 씹히는 맛이 살도록 살짝만 데친 뒤 바로 찬물에 헹군다. 3. 된장, 고추장을 1 : 1 비율로 섞고 파, 마늘을 넣어 끓인다. 4. 밥에 강된장을 얹어 쌈에 싸 먹는다.
2. 버섯찌개
용두산 고지대에서 오미자를 재배하는 집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버섯찌개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버섯 따는 사람들은 버섯을 셀 때 ‘일 능이, 이 송이, 삼 표고’라 한다고 한다. 결대로 찢어지면 식용버섯이고 손에 힘주면 부스러지는 것이 독버섯이다.
1. 끓는 물에 버섯을 한데 넣고 한 김 끓어오를 때까지 푹 삶는다. 2. 삶은 버섯을 건져 찬물에 헹구고 굵게 찢는다. 3. 무 1/3개를 껍질을 벗겨 얇게 썬다. 4. 애호박은 반달 모양으로 도톰하게 썬다. 5. 달군 냄비에 들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돼지고기를 넣어 달달 볶는다. 6. 5에 양파와 다시마를 넣고 우려낸 육수를 넉넉히 붓는다. 7. 육수가 끓으면 버섯과 무를 넣고 푹 끓인다. 8. 호박, 양파, 파를 넣는다. 9. 오미자고추장을 2숟가락 넣고 고춧가루, 다진 마늘을 넣어 고루 젓는다. 10. 마지막으로 굵은 소금을 넣어가며 간을 맞춘다.
3. 노각볶음
단양 단성면 두항리의 할머니 댁 뒤켠에는 채마밭이 있다. 거기서 완전히 자라서 색깔이 누런 늙은 오이인 노각 두 개를 땄다. 칼슘과 섬유질이 풍부해서 피로회복에도 좋다고 한다. 노각에서 나오는 연초록빛 뽀얀 국물은 정말 감동이었다. 어느 유명하다는 집 곰국보다도 맛있고 여름의 향이 가득했다.
1. 노각은 껍질을 벗겨 반을 갈라 씨를 빼내고 반달 모양으로 썬다. 2. 냄비에 들기름을 두르고 노각을 넣어 볶는다. 3. 양파, 소금, 들깨가루를 넣고 국물이 생길 때까지 볶는다.
4. 국화잎냉국
영주의 한 마을에서 난생처음 먹어본 메뉴로 재래종 국화여야만 만들 수 있다. 어린 국화잎에 밀가루를 묻히면 서리 맞은 모양새가 된다. 국화 꽃잎을 끓여 노랗게 우러난 물에 머리를 감으면 두통에 좋다.
1. 국화에 밀가루를 고루 묻힌다. 2. 끓는 물에 밀가루를 묻힌 국화잎을 넣어 데친다. 3. 데친 국화잎을 재빨리 찬물에 헹궈 물기를 뺀다. 4. 국화잎에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무친다. 5. 4에 찬물을 넉넉히 붓는다. 6. 파를 1mm로 잘게 썬다. 7. 파, 실고추를 얹어 장식하고 간장과 식초를 넣어 간을 맞춘다.
5. 곤드레밥
평창 진부면 할머니댁 감자밭에는 감자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곤드레는 처음으로 보고 배웠다. 얼핏 보면 해바라기 잎사귀와 비슷한데 따서 먹어보니 첫 맛은 쌉싸래한데 씹을수록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삼겹살을 구워 쌈을 싸 먹어도 맛있다 하셨다.
1. 곤드레를 끓는 물에 넣어 삶다가 줄기를 눌렀을 때 스펀지처럼 쏙 들어가면 건져서 찬물에 헹군다. 2. 삶은 곤드레를 한입 크기로 잘게 썬다. 3. 곤드레와 쌀을 한데 넣고 밥을 짓는다. 4. 밥에 소금을 뿌려 간을 맞추고 마지막에 들기름을 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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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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