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기억하다

올봄에도 기어이 흐드러진 꽃이 쏟아져 내린다. 언제나처럼 아른하고 아득하게 흔들리다가 이내 사라져버릴 것이다. 아찔하게 피어나 봉오리를 추어 올리다가도 흔적도 없이 소멸하는, 그러나 존재하는 그 순간만큼은 눈부시게 찬연한 그것을 두고 봄날의 꽃이라 부르기로 한다.

2011년 4월의 벚꽃, 안웅철

봄을 기다리며

입춘 무렵이다. 아직 겨울이다. 며칠 전에는 친지를 방문했다. 그 집에는 화분이 많았는데 그중 두 개의 화분에서 꽃이 피어있었다. 남쪽으로 낸 커다란 유리창이 충분한 햇빛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겨울에 꽃을 피운 그 꽃들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데 그 느낌이 무엇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 집을 방문한 목적을 잊고 싶었고 어떤 도취의 기분 속에 있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집의 화분에 꽃이 피었다고 친지를 초대해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는 풍습은 멋이 있다. 말로만 초대하겠다고 하고는 그런 일로 누구를 초대한 적이 아직 없다. 이제 좀 그러고 싶다.

몇 해 전이었다. 벚꽃이 만발한 때였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우리는 순간이나마 행복감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환하게 불을 켠 벚나무 아래 서서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벚나무 아래에 있는 소년이라고 느꼈다. 벚나무 위로 올라갔다. 꽃이 예쁘게 달린 가지를 꺾어 친구에게 주었다. 친구는 활짝 웃었다. 그런 날이 다시 올까. 꽃은 어느 곳에 놓여도 꽃이다. 깨끗하고 넓은 마루에 커다랗고 우아한 꽃이 한 다발 놓여 있어도 아름답지만 냄새 나는 재래식 변소 앞에 저절로 자란 들꽃도 아름답다. 꽃과 함께 있으면 어떤 단어도 서정적 뉘앙스를 가진다. 꽃과 죽음 같은 것마저 그렇다. 산에 가면 대부분의 사람이 산에 있는 동안 착해지듯이 꽃을 보는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이 누구든 꽃을 닮아간다. 그것이 삶을 견디게 한다. 세상에 아름다운 꽃이 많지만 가장 아름다운 꽃은 당신과 나만의 꽃이리라. 그런 소유욕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내가 너에게 주었던 그때의 노란 프리지어.

나는 거의 모든 종류의 꽃을 좋아한다. 온실에서나 볼 수 있는 열대의 화려한 꽃에서부터 말린 꽃, 버려진 꽃, 심지어 상상의 꽃까지 좋아한다. 그런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꽃이란 역시 들꽃이고 그중에서도 도시의 콘크리트나 보도블록, 건물의 벽과 도로의 경계에서 그 틈을 어렵게 뚫고 꽃을 피운 것이다. 그런 것들을 보면 걸음을 멈춘다. 그런 꽃들의 상황 때문에 어떤 인간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역경을 뚫고 살았다는 식의 의미 말이다. 꽃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저 아름다운 것이다. 그 꽃들은 보통 작고 이름이 덜 알려져 있으며 위태롭다. 하지만 예쁘고 싱싱하고 밝고 환하다. 나는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다니는 일이라기보다는 자기 주변을 아끼는 일이라고 믿는다. 아파트 사이에 저절로 난 샛길들은 어떤 ‘걷고 싶은 길’ 못지않게 소중하다.

봄이 온다. 꽃을 좋아한다는 것은 자기를 아끼는 길이 될 수 있다. 자기를 아낄 때 남을 깊이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올봄에는 응봉산의 개나리를 꼭 가까이에서 보리라. 아차산의 진달래도. – 이준규(시인)

2009년 4월의 매화 꽃잎. 한홍일

어머니의 꽃

어머니는 꽃을 싫어했다. 이 세상에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정말 있냐고? 어릴 때 내가 본 어머니가 꼭 그랬다. 어머니는 꽃집에서 꽃을 사다가 집 안 여기저기를 장식하는 법이 없었다. 처음에 나는 어머니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지레짐작해버렸다. 누가 꽃이라도 사 들고 방문하는 날에는, 어머니는 어김없이 꽃을 가리켜 ‘거추장스럽다’고 표현했다. 그 말을 들었는지 꽃은 이내 울상을 지었다. 꽃이 금세 시들어버린 이유는 자신의 미모에 기가 눌려서 그런 거라며 어머니는 호들갑을 떨었다. 말이 끝나면, 어머니와 나는 사이좋게 울적해졌다.

봄이 왔다. 대청소를 하고 집 안은 한결 깔끔해졌지만, 화사하지는 않았다. 뭔가가 꼭 하나 빠진 것 같았다. 바로 꽃이었다. 튤립은 수줍어서, 목련은 너무 하얘서, 모란은 노란색이 아니어서, 찔레꽃에는 찔릴 것 같아서, 수선화는 이름과 꽃의 생김새가 매치되지 않아서, 나도바람꽃은 덩달아 바람이 날 것 같아서, 어머니는 그것들을 사지 않았다. 어머니가 꽃을 싫어하는 이유는 정말이지 한도 끝도 없었다. 마치 집 안에 꽃 한 송이도 들이지 않겠다고 목청 높여 선언하는 것 같았다.

어버이날이었다. 푼푼이 용돈을 모아 구입한 카네이션을 보고도 어머니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걸 샀어. 엄마는 어린이날에 네게 변변한 선물 하나 못 줬는데.” 한 손으로 가슴에 단 카네이션을 살살 쓰다듬을 때 어머니의 손가락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어머니는 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꽃을 좋아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신 자신의 욕심은 항상 뒷전으로 미뤄둔 사람. 꽃에 물을 주며 얻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도 자진해서 포기해버린 사람. 아낀 그 돈으로 자식들에게 고기라도 사먹이고 싶어 안달한 사람. 장미꽃을 화병에 꽂아두는 대신, 눈에 잘 보이는 곳에 행운목을 두고 오갈 때마다 슬며시 고개 숙이는 사람. 그렇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사람.

어느 봄날, 행운목에서 기적처럼 꽃이 피었다. 어머니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우리 식구가 곧 이사를 할 것 같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우리는 정말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사를 하고 나서도 어머니는 여전히 꽃을 사지 않았다. “꽃은 나중에 더 여유가 있을 때 사도 돼. 그때에도 꽃은 여전히 예쁠 테니까. 걔들은 한결같잖니.” 축하할 일이 있을 때에도 어머니는 꽃을 극구 사양했다. 당연히 식탁 위에 꽃이 놓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머니는 꽃보다 더 한결같았던 것이다. 봄날의 꽃을 생각하면 설레면서도 짠하다. 그 꽃이 어머니가 못다 이룬 어떤 꿈처럼 생각되어서, 아직도 어머니에게 꽃을 살 여유가 찾아오지 않은 것만 같아서, 꽃이 시들면 어머니의 얼굴에 예의 그 그림자가 드리울 것 같아서. 그래도 더 늦기 전에 마음 하나를 단단히 먹는다. 2012년 봄, 나는 그녀에게 꽃을 보낼 것이다. 꽃을 받아든 어머니가 수양버들처럼 흐드러지게 웃는 모습을, 그 꽃에 정성스레 물을 주며 콧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한다. 봄이 온 것처럼 따뜻하다. 문득 웃음이난다. 새싹처럼 봉긋, 개나리처럼 수줍게. – 오은(시인)

2010년 4월의 자목련, 김용철

꽃은 왜 봄을 선택했을까?

봄은 일 년 중 가장 기다리는 계절이다. 가장 좋아해서가 아니라 가장 싫어하는 계절을 직전에 두고 있기 때문에 더 기다려지는 계절. 겨울 다음에 오고 겨울을 밀어내고서야 도착하고 겨울이 완전히 밀려난 자리에서야 비로소 봄은 겨울의 다음 계절이 아니라 여름의 직전 계절이 아니라, 앞과 뒤가 모조리 생략된 오로지 한가운데만 남은 어떤 공간을 보여준다. 어떤 시간을 보여준다. 그 공간과 시간은 물론 영원하지 않다. 오히려 한순간에 가깝기 때문에 역으로 영원에 잇닿아 있는 봄의 한때. 봄의 절정. 봄의 완연한 기운 속에서 나는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긴다. 집 안에서 집 밖으로, 실내에서 거리로, 공원으로 시장으로 매일 걸음을 옮기면서 봄을 지나왔고 또 살아왔다. 소요하듯이 소요하듯이.

그것은 산책. 그것은 산보. 내가 그렇게도 겨울을 싫어하고 기피했던 이유이기도 한 산책의 몰입을 위해서도 봄은 반드시 와야 하고 겨울의 흔적조차 남지 않아야 한다. 춥거나 무더운 날씨의 간섭을 모조리 잊은 채 오로지 걸음에만 집중할 수 있는, 걸음의 매력에만 푹 빠질 수 있는 순간을 맛보기 위해 봄은 다시 와야 한다. 오고 있다. 멀리서 가까이서 어느덧 제 한가운데서 봄은 봄이 되기 위하여 나머지 모든 계절의 흔적과 징후를 껴안으면서 동시에 밀어내버린다. 봄은 봄 이외에 다른 어떤 계절의 이름도 허용하지 않는 순간을 만끽한다. 만끽할 것을 권유한다. 한순간이라도 좋다. 봄에 점령당한 이들이 봄 바깥의 세계를 완전히 망각하는 지점에서 봄은 자신의 절정을 완성한다.

점령당한 이들의 내면마다 다른 시점일 수도 있는 봄의 절정은 이상하게도 하나의 형상과 향과 생리를 닮았다. 그것은 꽃이다. 모든 꽃은 순간의 꽃이다. 지속의 꽃이 아니라 순간의 꽃으로서 꽃은 자신을 만개한다. 활짝 열어 보이는 그 순간 역시 영원에 잇닿을 수 있지만, 지속은 아니다. 꽃은 순간이며 지속을 거부하면서 영원에 잇닿는다. 세상에서 만개하는 꽃의 대부분이 봄의 시기와 관련되어 있는 이유를,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수명을 가진 수많은 생명체 중 유일하게 인간만이 밥도 집도 옷도 되지 않는, 심지어 번식과도 직접 연관되지 않는 꽃의 만개한 순간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를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궁금하고 궁금한 만큼 짐작하고 추측할 뿐이지 봄과 꽃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비밀의 전모를 알 길이 없다. 인간은 왜 꽃을 좋아할까? 꽃은 왜 봄을 선택했을까? 당연한 질문이면서 이상한 미궁인 이들의 신비를 파헤치기 전에 누군가는 이미 꽃에 마음을 빼앗겼다. 또 누군가는 봄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정신없이 걸어 다닌다. 걷고 또 걸으면서 그는 생각한다. 봄에 둘러싸여서 거리 곳곳에서 만개하는 봄꽃들의 순간에 도취해서 그는 노래한다. 흥얼흥얼 콧노래라도 좋다. 들리지 않아도 좋고 향처럼 번져나가다가 사라져도 좋다. 그러면서 가장 멀리까지 간다.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맴도는 방식으로 자신을 완성하고 또 기다리는 꽃. 가장 수동적인 자세이자 가장 적극적인 형태와 색깔과 냄새로 유혹하는 꽃. 그것은 판단 이전에 행동을 부르며, 분석 이전에 이미 매혹된 지경을 부른다. 지나고 보면 덧없기 짝이 없는 무수한 사랑의 순간이 왜 하필이면 꽃을 동반하는지, 동반해야 하는지를 곰곰이 뜯어보기 전에 내 몸은 다시 사랑 쪽으로 기운다. 어느새 꽃집 앞에 당도해 있다.– 김언(시인)

(왼쪽 부터)2007년 6월의 연꽃, 김용훈, 2009년 5월의 들꽃, 민희기

진달래 분홍 꽃그늘 아래

어렸을 때, 나는 항상 철쭉과 진달래를 혼동했다. 그러니까 실은 진달래를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아파트촌에서만 자라온 아이가 진달래를 볼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나는 걸스카우트 단원이었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걸스카우트에 새로 입단한 아이들은 개나리반에 속했던 것 같다. 그 다음 단계가 진달래반이었을 것이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걸스카우트 열기가 잠잠한 편이었고, 그래서 진달래반으로 올라가는 아이들도 많지 않았다. 걸스카우트는 어떠한 소속감도 느끼게 해주지 않았다. 단지 학생기록부에 걸스카우트 단원이라는 허울 좋은 내용을 한 줄 더 적어 넣을 수 있을 뿐이었다. 아파트 화단에 피어난 철쭉을 볼 때마다 그 붉고 커다란 꽃이 진달래라고 생각했다. 나의 걸스카우트 이력은 개나리반에서 끝났다. 나는 항상 분홍색 에나멜이 칠해진 진달래반 배지가 갖고 싶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라는 노랫말은 완전한 허구로 느껴졌다. 어디를 가나 개나리는 많이 피어 있었지만 진달래는 아파트 단지는 물론이고 학교 운동장 한구석의 조그만 정원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살던 동네 근처에는 산도 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이름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꽃들은 진달래만이 아니었다. 누구나 봄이 오면 진달래를 이야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꽃을 직접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묘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나는 어디선가 진달래를 처음 보게 되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처음 본 진달래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열아홉 살 이후의 기억은 분명히 남아 있다. 산이 아니라 대학 입학으로 인해 새로이 살게 된 동네에서였다. 2층집 앞마당에 진달래가 피어 있었다. 진달래는 철쭉보다 작고 연하고 부드러운 꽃잎을 지니고 있었다. 아직 쌀쌀한 날씨를 타고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을 때마다 진달래의 연한 분홍색 꽃잎이 투명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나는 진달래를 볼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꽃잎을 조금 먹는 버릇을 들였다. 옛날에는 진달래를 먹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탓이었다. 게다가 꽃을 먹는 일은 다소 유치하지만 낭만적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혀끝에 올라앉은 진달래의 맛은, 진달래의 맛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학교 2학년쯤 친구들과 가평으로 여행을 떠났다. 대낮부터 어울려 맥주를 마시고 민박집 주변의 강가를 따라 산책을 하고 있을 때, 먼 언덕에 피어 있는 진달래꽃이 눈에 들어왔다. 술기운이 오른 친구들 몇이 언덕을 기어올라 진달래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가지는 꺾지 마.” 밑에서 기다리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친구들은 몇 점의 진달래꽃을 손에 쥐고 다시 언덕을 내려왔다. 그날도 작고 연하고 부드러운 진달래 꽃잎들은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그 꽃을 먹었던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의 꽃잎들은 대부분 곧 불어온 봄바람에 실려 친구들의 손바닥을 떠나갔다. 혹시 꿈이었을까. – 한유주(소설가)

남쪽의 섬

작년 이맘때 그녀는 제주에 있었다. 봄이 막 시작될 무렵이어서 길가 어디에서든 유채꽃을 볼 수 있었다. 그 노란빛이 너무 선명하고 강렬해서 그녀는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한동안 그녀는 성산포 근처에서 지냈는데, 다른 지역보다 바람이 매섭기로 유명해서 자전거를 타고 갈 때면 늘 거친 바람을 맞아야 했다. 해안가에는 유채꽃뿐 아니라 수국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챙이 긴 모자를 쓴 그녀는 이따금 수국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보다 수국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연보랏빛이었다. 세상을 삼킬 듯 아름다운 보랏빛이었다. 한동안 그녀는 망설였다. 꽃을 꺾고 싶다는, 자신의 방에 가져다놓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수국을 꺾어버렸다. 아름다움은 대체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사람을 홀리게 하는 그 부드러움은.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면서 그녀는 내내 생각했다.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페트병을 잘라 그 안에 물을 채워 넣고 수국을 꽂아두었다. 꽃은 시들지 않고 그녀 곁에 있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좁은 방에서 며칠을 넘기지 못했다. 그녀는 시든 꽃을 내다버리지 못했다.

한동안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거세졌다. 파도가 잠잠해질 무렵 그녀는 누군가의 전언을 들은 것처럼 두툼한 옷을 입고 바닷가로 나갔다. 방파제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실종된다 해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다만 멀리 등대의 불빛이 보일 뿐이었다. 세상은 고요했다.

그녀는 마음이 몹시도 아파 요양을 하러 내려온 소년과 함께 바닷가로 나간 적이 있다. 안색은 어두웠고 근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만 대답을 할 뿐 소년은 말이 없었다. 걸음은 한없이 느렸고 그 느린 세상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아픈 소년에게 고요한 바다보다는 세상에 존재하는 꽃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살아 있는 식물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소년은 좀처럼 꽃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걸으면 수국을 볼 수 있는데 그저 바다 앞에서 멍하니서 있는 것이었다. 소년은 바다가 익숙한 듯했다. 그녀의 마음은 스산해졌다.

소년은 떠나던 날에도 말이 없었다.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새벽녘 부모의 차에 올랐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그 모습을 오래 지켜보았다. 소년은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따금 그녀는 생각하곤 했다. 아프지 않을 장소.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소년의 마음은 치유될 수 있을까. 그 후 몇 사람이 다시 조용한 바닷가를 찾았고 서둘러 다른 길로 떠났다. 꽃이 질 즈음, 그녀도 커다란 가방을 메고 그 섬을 떠나왔다. 결국 오랫동안 살았던 도시로 돌아온 셈이었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늦은 저녁을 먹으며 이따금 남쪽의 섬을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문득 수국의 꽃말이 궁금해졌다. 변덕스러움, 성남, 진심…. 결국 자신의 아름다움을 기억해달라는 뜻일까. 지나가는 이들의 마음을 그토록 간절히 붙잡고 싶었던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한 사람의 마음은 충분히 붙잡은 셈이라고. 그 후 그녀는 이따금 해안가에서 꽃을 들여다보는 긴 꿈을 꾸었다.– 윤보인(소설가)

    에디터
    조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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