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악몽 또는 추억
별일 없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지내야 할까? 떠나야 할 이유는 많고 지구는 넓었다. 제주에서의 사건 사고부터 옐로나이프의 오로라, 런던 서바이벌 등 크리스마스 여행의 악몽 또는 추억.
판타스틱 점등쇼
취객의 구토가 넘실대는 서울의 크리스마스이브는 음탕한 소돔 같다. 나는 혼자있고 싶었다. 크리스마스 캐럴, 꼴 보기 싫은 연인, 오늘 같은 날 약속도 없냐는 엄마의 핀잔이 없는 곳이 간절했다. 제발 올 크리스마스는 서글픈 싱글 친구들의 한탄과 싸구려 와인이 나뒹구는 레지던스 호텔 룸에서 보내지 않길! 출장의 은총 덕에 가까스로 이 도시를 탈출했다. 행선지는 캐나다 노스웨스트 준주(Northwest Territories)의 주도 옐로나이프(Yellowknife). 북극권에 속하는 이 지방은 겨울 기온이 영하 30~50℃를 웃도는 극한 지역이다. 도착 전까지 나는 저 숫자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추위를 의미하는지 상상도 못했다. 눈물과 콧물, 혈관을 흐르는 피가 셔벗처럼 서걱이는 기분을 느껴본 적 있는지? 나는 서울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지 지옥을 원한 건 아니었다. 발열 내복 2장, 핫팩 6장, 얇은 티셔츠 2장, 폴라폴리스 재킷, 윈드브레이커, 오리털 내피 재킷 위에 무게가 5킬로그램은 족히 넘는 캐나다 구스 점퍼를 껴입었는데도 젖은 맨몸으로 눈 들판 한가운데 선 것처럼 추웠다. 오직 ‘오로라’를 보기 위해 남들은 이 고통을 참는다. 옐로나이프는 오로라 관찰 확률이 연평균 95퍼센트에 육박하는 오로라 오벌(Aurora Oval, 오로라가 자주 목격되는 영역)지대. 여행자들이 이 생지옥으로 기어들어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망칠 비행기가 없어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밤까지 호텔방 안에만 있을 수는 없으므로 인내심을 쥐어짜서 밖으로 나왔다. 오로라를 기다리며 할 일이란 추위 속으로 돌진하는 일뿐. 좀비가 휩쓸고 간 유령도시 같은 다운타운은 버리고 교외로 향했다. 오로라 관찰 기지인 오로라 빌리지에서는 낮 시간 동안 할 일 없는 여행객을 위해 놀거리를 제공한다. 인적 드문 얼음 호수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해서 딱히 신난 이들이 하나도 없었다. 변덕이 들끓었다. 나라도 흥분해야지. 썰매를 타고 칼바람을 맞기로 했다. 루돌프 대신 개 어깨에 가죽끈이 드리워져 있었다. 채찍 맞은 시베리안 허스키는 광분해서 달렸다. 개썰매에 앉아서 보는 한겨울의 자작나무 숲은 생각보다 낭만적이었다. 설피를 신고 눈밭 위도 걸었다. 눈 밟는 소리, 숨소리만 간간이 침묵을 깼다. 간절했던 고요. 이곳 도착해서 처음으로 행복했다. 장작불에 마시멜로를 구워 먹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었다. 드디어 ‘오로라 타임’이 왔다. 제 시간에 막 오르는 쇼가 아니므로 호수 위에 자리 잡고 앉았다. 달무리가 구름 없는 하늘을 독식하고 있었다. “언제 나올지 몰라요. 한눈 팔지마세요.” 가이드가 으름장을 놨다. 죽을 힘을 다해 지독한 추위를 견디며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해야 극적이겠지만 옐로나이프의 오로라는 착해서, 안그래도 고생 중인 관찰자들을 골탕 먹이지 않았다. 저녁 아홉 시. 밤하늘 한자락에서 삐져나온 푸른빛은 시저를 만난 클레오파트라처럼 갖은 교태로 인간을 홀렸다. 섬광처럼 나타나서 하늘을 가로지른 후 폭죽처럼 허공에서 명멸했다. 넋 놓기 무섭게 자취를 감추더니 동쪽 하늘에서 용암처럼 콸콸콸, 초록가스를 뿜어냈다. 그 아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얼음판 위에 벌렁 드러눕는 일뿐이었다. 등짝이 얼어서 얼음 바닥에 엉겨 붙거나 말거나, 새벽 한 시까지 지상 최고의 점등쇼에 영혼을 팔았다.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이브였다. – 류진 (<더 트래블러> 에디터)
크리스마스 파산 선고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25일을 통째로 사라지게 만든 밤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바비빌의 노래, ‘알코올로 얼룩진 성탄절’의 그 가사 그대로. 산타도 싫다 트리도 싫다를 외치며 친구들과 부어라 마셔라를 반복하다 아침 햇살을 기어이 보고 나서야 집으로 기어들어갔던 밤들. 여행 잡지에서 오래 일을 했으나, 나는 파리나 뉴욕보다도 서울의 술집들에서 2차, 3차로 옮겨가는 여정을 사랑했다. 한 해 중 가장 거한 술자리가 벌어지는 크리스마스에 서울 바깥에 있고 싶은 욕망 따위 가져본 적 없었다. 그해 홍콩에서 연말을 보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홍콩 가이드북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 나는 사전 조사를 위해 사진가와 함께 쇼핑과 향락의 도시로 향했다. 12월23일 비행기로 우리는 첵랍콕 공항에 도착했다. 홍콩은 물론, 동남아시아에 발을 디뎌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숙소가 있는 몽콕으로 향하는 버스 안, 한국보다 훨씬 따스하고 눅눅한 바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털 파카로 몸을 꽁꽁 싸맨 사람들의 풍경이 그저 생경했다. 연말의 홍콩은 샴페인 기포처럼 부박하고 화려한 매력으로 넘치는 곳이다. 크리스마스는 물론 12월부터 2월까지 이어지는 메가세일이 정점을 향해가기 때문이다. 다음 날, 우리는 취재를 위해 IFC 몰과 하버시티로 향했다. 애초의 목적을 잊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동행한 사진가는 나만큼 쇼핑을 좋아하는 남자였고, 30%, 40%, 80%를 넘나드는 세일 포스터들을 몇 번 지나친 후 우리는 조용하게 합의했다. 사전 조사? 그게 그렇게 중요해? 체험해보는 것보다 확실한 조사가 어딨어? 물론 삼시세끼 챙기는 것보다 취재가 중요한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이미 이성의 끈을 놓은 상태였다. 출판사에서 받은 인세를 몽땅 쇼핑에 쏟아붓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달까. 딱 세 시간만 돌고 안내 데스크에서 만나자는 약속은 세 시간 후, ‘세 시간만 더’라는 문자 한 통으로 봄눈처럼 스르르 녹아버렸다. 그날 우리의 전리품은 상당했다. 나는 하이힐 일곱 켤레와 블라우스 2벌, 드레스 2벌을 사들였고, 사진가는 이탈리아산 가죽 구두와 가방을 쇼핑백에 우겨넣은 채 나타났다. 행복했지만 피곤했다. 내일부터는 취재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오갔고, 크리스마스에 들뜬 도심을 뒤로하고 숙소로 향했다. 호텔방에서 무사히 세관을 통과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데, 사진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좀 우울하지 않아?’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다음 날 내내 숙취에 시달려도 후회하지 않았던 밤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서울이 아니라 해서, 내일부터 정말 일을 해야 한다 해서 도시 전체가 파티장으로 변하는 이 밤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대전제가 다시 내 머리를 사로잡았다. 우리는 그날 산 구두를 신고 홍콩 나이트라이프의 중심지인 란콰이퐁으로 향했다. 주말의 란콰이퐁에 가본 사람이라면 바는 물론 거리까지 빼곡하게 채운 술꾼들의 행렬에 혀를 내둘러본 적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란콰이퐁의 체감 인구 밀도는 그 20배쯤은 되는 것 같았다. 맥주 3병씩을 단숨에 들이켠 후, 우린 인파에 내몰려 윈드햄 스트리트로, 다시 소호로 향했다. 옛 건물들과 아기자기한 바, 감각적인 간판들이 어우러진 거리는 더없이 매혹적이었으나, 24일의 바에서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터덜터덜 호텔로 돌아오다, 우리가 들어선 곳은 몽콕의 아래쪽 템플 스트리트의 길거리 식당이었다. 12월의 노점이라니, 살짝 이상한 조합이지만 홍콩의 기후는 사계절 내내 노천석을 허용할 정도로 따뜻했다. 현지인들로 가득한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아 우리는 닭고기 요리와 재료를 올려 밥과 같이 쪄낸 팟라이스와 함께 칭따오 맥주를 천천히 마셨다. 거리는 시끌거렸고 멀리서 아득하게 캐럴이 들려왔다. 하루 종일 해야 했던 것들은 조금도 하지 않고, 하고 싶었던 일만 실컷 해버린 ‘사전 조사’의 한나절이었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토록 홍콩과 사랑에 빠지지 못했을 것이다. 몇 년이 흐른 지금도 캐럴이 들려오면 홍콩에 가고 싶어 좀이 쑤신다. 다시 한 번, 하이힐이 든 가방을 주렁주렁 들고 징글벨이 들려오는 허름한 노점에 앉아 25일을 맞을 수 있다면 ! – 정미환(프리랜스 에디터)
키위식 크리스마스
1년 전 이맘때였다. 약속한 듯 한꺼번에 시집가버린 친구들은 같은 집에 사는 남자와 희희낙락거리며 보낼 크리스마스. 결단이 필요했다. “너, 언제 한번 와볼래?” 뉴질랜드로 이민 간 지 한참 된 이모가 서운하다며 던진 예전 한마디가 구세주처럼 떠올랐다. 그래, 따뜻한 나라로 가자. 그곳엔 파릇한 대자연도 있고, 나를 품어줄 친척(얼굴 보는 걸 핑계 삼아 홀로 하는 해외여행을 정당화해줄 존재)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감 때는 발견한 적 없는 기민함이 마구 발휘됐다. 그렇게 뉴질랜드 북섬과 남섬을 휘젓는 7박 8일 속성코스를 짰다. 이모네 가족이 있는 북섬에서 3일, 홀로 남섬에서 5일. 크리스마스에 보고 들은 건 ‘마오리족 전통 쇼와 민요’였다. 조카를 위해 이모와 이모부가 마련한 특별 스케줄이다. 유명 관광지에 점 찍는 ‘에지’ 없는 여행도 오랜만에 보는 친척들과 함께할 때에는 할 만한 것이다. 우리는 나름 기승전결 없이 잔잔한 로드무비도 찍었다. 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가다 지치면 호수가 보이는 잔디밭에 누웠다. 세상에서 가장 한가한 양들이 노니는 들판 앞에서 피시 앤 칩스를 먹거나 했다. 북섬에서의 주제가 ‘가족과 함께 하하 호호’였다면, 남섬에서의 시간은 ‘거침없이 외로움’이었다. 혼자 배낭 여행 중인 여행자가 많을 거라는 예상은 착각이었다. 만년설 풍광이 경이로운 피오르드 국립공원에서도, 코발트빛 바다 위 크루즈에서도 혼자인 사람은 나뿐이었다. 빙하 한번 찾아보겠다고 얼음산길을 따라 1시간 이상 걷기도 했다. 빙하는 보이지 않고, 이대로 조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사방에 생물이 나 혼자인 것 같았다. 백인 젊은이들이 무리 지어 떠들썩하게 놀던 퀸스타운에서도 역시 걷고 또 걸었다. 몸은 투쟁적이었지만, 정신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물론 여행지에서 예상치 못한 일은 일어나는 법이다.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했을 때, “혹시 휴대폰 잃어버리지 않았어요?”라고 영어로 말을 거는 동양 남자. 그곳에 혼자 사는 한국인이었다. 내 휴대폰을 찾아준 그는 ‘크라이스트처치 섬에 연초 큰 지진이 난 이후, 모든 교통편이 다 변했다’는 엄청난 정보를 주며 1일 가이드를 자청했는데…. 그건 <비포 선 라이즈>와 비슷한 무엇이 아니라, 순도 높은 동포애였다. 동네 사람만이 알 만한 카페, 지진의 전과 후에 관한 상세 묘사, 재건을 위해 곳곳에 둘러싸인 천막 어딘가의 ‘개구멍’까지, 남자 동포의 정보력이란! 동포와 나는 마주 앉아 얘기했다. 연말연시에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나는 여행을 택하기에 앞서 ‘도망’을 먼저 택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새해는, 비행기 안에서 맞았다. – 권은경(<보그> 피처 에디터)
짝 없는 사람들은 여행을 하지
내 인생에 드라마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사귀기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헤어지거나. 혹은 자연스럽게 같이 살다가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거나. 그런 종류의 평범한 날들이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네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애로 갈아탔대’라는, 삼류 드라마의 조연이나 겪을 법한 일이 내게 생길 줄은 정말 몰랐다. 남 일일 때는 뻔하더니 막상 내 일이 되니 어찌나 열불이 나고 복장이 터지던지! 남자친구는 같은 과 후배였다. 드라마는 남자친구의 새 여자친구 역시 나와 같은 과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네 남자친구가 너보다 다섯 살 어린 여자애로 갈아탔대’라는, 더 뻔한 설정으로 거듭났다. 안 그래도 초라하고 비참한 드라마의 조연을 한층 더 쪼그라들게 만드는 목격담이 이어지며 결국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식상한 대사가 매일 밤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슬픔과 배신감에 빠져 정신이 나간 나는 삼류 드라마의 조연 역할에 충실히 임했고, 결국 셋 다 당분간은 학교 앞에 얼굴 들고 다니기 민망한 상황에 이르며 사태는 종결됐다. ‘심신이 피폐하다’는 말을 온몸으로 절감하고 있던 그때, (내 눈에) 완벽한 사람이 나타났다. 소개팅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경로였지만 타이밍, 그 사람의 취향, 그 사람의 말투, 직업, 그 사람과의 대화, 어른들 말로는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의 나이 차이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마냥 완벽하게 느껴졌다. 당시의 나는 평생 조연만 하다가 주연급으로 발돋움한 배우처럼 들떠 있었다. 말하자면 드라마도 병인 셈이었다. 두 달 동안 스무 번을 만나고도 결국 나랑 사귀지는 못하겠다는 그 사람의 대답을 들었을 땐 이미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들떴던 만큼 추락의 충격도 컸다. 그때 떠오른 것이 서해였다. 초등학교 시절을 서산과 태안에서 보낸 나에게 익숙하기 그지없는 희뿌연 황색 바다가 그리웠다. 사람들은 안면도와 꽂지, 만리포 해수욕장은 알아도 만리포 다음에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로 점멸하듯 이어지는 또 다른 해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꿈처럼 예쁜 이름의 몽산포는 모른다. 수많은 바다 중에서 내가 향한 곳이 몽산포였다. 마침 겨울 바다를 보고 싶어 하던 친구를 ‘내가 예전에 살던 집도 보여주고, 바다도 보여줄게’라는 말로 구슬려 크리스마스이브에 우리 둘은 태안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추운 날이었다. 겨울바다에 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눈이 쌓여 있을 것을 생각했지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을 상상하지는 못했던 우리는 세차게 휘날리는 눈발 사이로 눈을 겨우 뜨고 걸었다. 운동화를 신고 온 친구는 발이 젖어 걷는 것조차 힘들어했지만 텅 빈 바닷가에 유일하게 따뜻한 것이라고는 슈퍼에서 파는 미지근한 캔 커피뿐이었다. 그럼에도 바다는 아름다웠다. 나는 바다를 만나면 그 바다를 향해 고래고래 실컷 소리를 지르겠다고 결심했다. 욕할 것도 많았다. 아무리 서로 좋아서 만났다고 해도 나를 속인 놈이나 나를 안 좋아한 놈이나 나한테는 똑같이 나쁜 놈이었다. 다른 날도 아닌 크리스마스이브에 눈보라를 뚫고 바다까지 간 내가 세상에 욕하지 못할 존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러기엔 바다는 너무 추웠고, 나는 진이 빠지기도 했고, 쑥스럽기도 해서 그냥 중얼중얼 염불 외듯 말을 뱉은 후에 조금 울었을 뿐이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오후 6시를 조금 넘어 있었다. 친구는 내게 술 마시러 가자고 졸랐지만 이미 피곤할 대로 피곤해진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새빨개진 발을 주무르며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그때 그 친구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 시간, 그 겨울 바다에 존재했던 방향 잃은 마음들이 지금도 안쓰럽다. – 이마루 (<얼루어> 피처 에디터)
루돌프도 산타도 다 개나 줘
누군가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망치지 말고 끝까지 맞서 싸워야 성장한다는 인생의 충고를 했다지만, 실연에서만큼은 예외임이 분명했다. 억울함과 분노의 감정을 오가며 마감이라는 큰 산을 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사랑이 넘치다 못해 분출하는 12월이라니, 루돌프도 산타도 다 개나 줘버려. 3년 전 겨울, 여름휴가도 쓰지 못하고 겨울까지 마감과 실연의 상처에 허덕이던 나는 런던에 있는 친구를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크리스마스 휴가에 연말, 연초 휴일까지 합쳐 10일간의 긴 일정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크리스마스 시즌에 아시아권이 아닌 유럽으로 떠난다는 건 다소 무모한 계획이기는 했다. 평소에도 저녁 6시가 되면 즉각 문을 닫아버리는 유럽의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한국의 추석이나 설날연휴처럼 ‘가족’을 위한 연휴인 이 시즌에는 쇼핑센터도, 레스토랑도, 심지어 런던 그 흔하디흔한 맥주집도 문을 닫을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에겐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유럽의 냄새 한껏 들이마시며 힐링 타임을 가지리라. 그러나 이게 웬걸, 12월 23일에 나의 짐을 함께 들어주며 게스트 룸을 열어준 친절한 친구 커플은 이렇게 말했다. “런던이 너무 추워서 우리는 내일 두바이로 떠났다가 며칠 후에 올거야. 크리스마스 시즌이 너무 지루해서 말이야. 그래도 우리 함께 새해는 맞을 수 있어. 집은 맘껏 사용해도 좋아!” 그리하여 나는 한국이 아닌 머나먼 이국 땅 런던에서 나 홀로 크리스마스를 지내게 됐다. <로맨틱 홀리데이>의 카메론 디아즈의 마음이 이랬을까? 그래도 그녀는 급작스럽게 방문한 주드 로와 사랑에 빠지기라도 했지만 며칠 동안 내 친구의 집을 방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런던의 크리스마스 시즌은 적막하고 우울했다.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이 새로 산 청록색 어그 부츠를 너저분하게 만들었다. 웰링턴 부츠나 살걸. 도대체 크리스마스 때 내 끼니를 해결해줄 곳은 어디인가. 그러나 기자들의 잔머리란 위대했다! 스스로 감탄하며 결정한 곳은 무슬림 지역이었다. 크리스마스와 전혀 상관없는 이슬람 지역 출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거리 말이다. 지하철도 버스도 운행하지 않는 런던의 크리스마스 날, 나는 천천히 걸었다. 적막한 런던의 곳곳을 지나, 불빛이 흘러나오던 반가운 그곳. 나는 저녁식사 해결을 위해 장을 보고, 서브웨이 샌드위치 집에서 홀로 질긴 빵을 씹었다. 내 아이팟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블루 크리스마스’를 열창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우울한 크리스마스 시즌은 3일 만에 막을 내렸다. 26일에는 모든 런더너와 관광객들이 백화점으로 향한다. 복싱 데이(Boxing Day)라고 불리는 겨울 폭탄 세일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외로움은 조금 달랠 수 있었지만, 마음이 허한 만큼 주머니는 가벼워졌다. 그리고 친구 커플이 돌아와 나를 꼭 끌어안으며 그들의 행복한 소식을 처음으로 나에게 전한다. “나 두바이 공항에서 프러포즈 받았어! 이 소식을 들은 친구는 네가 처음이야.” 실연한 친구에게 결혼소식을 전해서였는지, 크리스마스 시즌에 나를 버리고 두바이로 간 것이 미안해서였는지, 작은 로펌을 운영하는 변호사와 갤러리의 아트 디렉터인 런던의 전형적인 중산층인 그들은 나를 수많은 연말 파티로 인도하며 우울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12월 31일에 나는 장장 세 개의 파티에 참석했다. 처음 도착한 누군가의 집은 레스토랑으로 변해 있었다. 알음알음으로 아는 사람들이 레스토랑에서처럼 돈을 계산하고 그날의 메뉴를 먹는다. 그곳에서 나는 일본계 영국인인 패션 마케터이자 음식평론 블로거를 만났는데 그는 이런 언더그라운드 레스토랑을 평가하는 글을 블로그에 올린다고 했다. 물론, 한국에서부터 예약해둔, 아레나에서 열리는 연말 콘서트 이야기 역시 빠뜨릴 수 없겠다. 캘빈 해리스, 저스티스, 데드 마우스, 디지털리즘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렉트로닉 파티라니, 오로지 런던이기에 가능한 라인업 아닌가! 새해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중요한 라인업의 공연이 끝을 향해 달려가자 나의 친구들은 이 광란의 콘서트홀에서 나를 건져내 그들의 친구들이 여는 콘셉트 파티로 향했다. 이날의 콘셉트가 ‘SF 스페이스’였는지 모르지만, 이 넓은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는 호스트 언니는 런던의 부잣집 딸이라고 하는데 화이트 컬러의 원더우먼 복장이라고 해야 할까, 스타트렉 복장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한, 런던 코어 힙스터들의 파티라 할 수 있었다. 아시아 작은 나라에서 온 나는 예거밤과 보드카토닉, 그리고 스페이스의 알 수 없는 에너지에 힘입어 누군가의 스튜디오에서 맘껏 춤을 추며 놀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에, 런던에도 자정이 넘어서도 문을 여는 24시간 베이글 가게가 있음을 알았다. 햄과 치즈가 잔뜩 들어간 느끼한 야식 및 아침식사를 친구와 함께 나누어 먹으며 생각했다. 내년에는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 날 런던에 와야지. 어그 부츠 대신 웰링턴 부츠에 겨울 삭스를 신고. – 손혜영(프리랜스 에디터)
그리스에서 보낸 일주일
사람들은 에디터에게 정말 다양한 것을 묻는다. 이번 주에도 나는 일 잘하는 홍보대행사부터 일 잘하는 4년 차 에디터와 프러포즈용 반지와 홍콩에 막 문을 연 코스(Cos) 매장의 위치 등 온갖 것에 답했다. 그중 나를 온통 그립게 한 질문도 있었다. “그리스에 가도 될까? 경제 위기잖아.” 그리스가 이렇게 걱정스러운 이름이 되기 전에, 나는 그리스에 있었다. 여행 잡지 기자였을 때 나는 동남아 전문 기자처럼 아시아 일대를 그렇게 다녔다. 그리스는 여행이 아닌 최초의 ‘유럽 출장’이었고, 1년 중 가장 로맨틱한 날을 빼앗긴 그의 시무룩한 얼굴과 반대로 난 그냥 좋을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뭔데. 365일 중 하루일 뿐이었다. 도하에서 한번 경유해서 아테네로 가는 동안, 동료인 사진가가 기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워서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융통성이 있었다. 화장실에 있는 스모킹 사인에 불이 들어와서 피워도 되는 줄 알았다는 변명을 받아들여줬다. 그리스인들이 대부분 헤비 스모커라는 건 비행기에서 내린 후부터 알았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마구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말했다. “괜찮아, 올리브 덕분에 우린 암에 안 걸려.”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먹고 마신다. 그게 그리스식 생활이었다. 그럼 일은 언제 해? 진심으로 그렇게 물어봤다. 아테네에 내린 직후부터 계속 먹었다. 점심은 3시간, 저녁만찬은 5시간도 걸려서, 카림 라시드가 디자인한 세미라미스 호텔에서 저녁을 먹을 때에는 앉은 자리에서 꿈을 꿨다. 루프톱 바나 클럽의 영업시간은 언제나 “아침이 올 때까지.” 그래서인지 그 어떤 출장보다 흥이 있었다. 취재인가 여행인가 헷갈리는 하루을 보내고 자정 넘어 들어와선, 침대 위에서 기절하는 식이었다. 그 흥에 취해 아크로폴리스에 올랐다. 아테네란 도시는 방사선 모양으로 퍼져 있었다. 길은 좁고 지독하게 막혔지만 그보다 오래된 거리 플라카를 걷는 건 참 좋았다. 요트를 타고 작은 섬에 들렀다가 그리스의 두번째 도시 테살로니키까지 갔다. 그곳으로 갈 땐 경비를 아끼기 위해 6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길을 따라 펼쳐지던 올리브 숲을 기억한다. 사막 같기도 한 건조한 흙 속에서 자라던 올리브 나무. 테살로니키는, 바다를 안고 있는 도시가 그렇듯 바람의 냄새가 났다. 이곳에서 찍은 앙게로풀로스의 영화 <영원과 하루>를 좋아했지만 영화처럼 쓸쓸한 곳은 아니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미적 감각이 있었고, 카페며 부티크 호텔, 갤러리의 감각적인 색채는 세계 최고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월드 뮤직’으로 등장하곤 하는 렘베티카를 들으러 갔다. 터키의 지배를 받는 동안 충돌한 문화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냈는데, 그게 렘베티카였다. 민중의 음악이 그렇듯 서정적이고 구슬펐으며 가슴을 얼얼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곳에선 음악이 마음에 들면 장미꽃을 사서 뮤지션에게 던진다. 밴드 앞에는 붉은 장미가 수북했다.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건 그리스 어디에서도 안 나왔다. 매일 비옥하고 신선한, 눈물나게 맛있는 그리스의 음식을 먹었고, 장미향이 나는 달콤한 디저트를 즐겼고, 다 마셔버려서 수출할 것도 없다는 알 수 없는 그리스 이름의 와인을 마셨지만 ‘크리스마스라서’는 아니었다. 그리스에서 크리스마스는 노는 날이 아니라 차라리 안 노는 날이었다. 그날은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와인과 물을 섞으면 하얗게 변하는 우조를 마시는 날이었다. 내 가족은 서울에 있었으므로 대신 호텔에 머물며 그 호텔의 갈라 디너에 참석했다. 여행, 아니 출장은 12월 25일 저녁에 끝났다. 8일 동안 그리스를 함께 여행한 그리스 관광청의 나타사, 페트로스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스에서의 마지막 하늘을 보러 가자.” 아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들은 다 큰 나를 공항 카트에 태우고 온통 유리 벽인 공항의 끝으로 달렸다. 그곳엔 조금씩 해가 지고 있었다. 그리스 기사를 신문에서 볼 때마다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리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부디 그곳의 겨울이, 크리스마스가 그때만큼 따뜻하길. – 에디터 허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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