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가는 길
겨울과 안녕을 고하기 아쉽다면 강릉으로 떠나면 된다. 태백산맥과 동해 사이에 자리한 이 평온한 도시는 겨울의 마지막 자락까지 눈이 녹지 않는 곳이니까.
서울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은 또 다른 겨울로 향하는 것 같았다. 내비게이션이 강릉과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릴수록 산은 점점 더 높아지고 나무는 키가 커졌지만 이상하게도 공기는 점점 따스해졌다. 태백산맥이 지나는 곳. 평창군과 경계를 이루는 대관령과 선자령이 있는 곳이지만 겨울의 강릉은 춥지 않다. 태백산맥이 추운 북서풍을 막아주고 동해에는 난류가 흐르기 때문이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 파도의 흔적이 그대로 얼어버린 해안가의 바위, 새하얗게 뒤덮인 산, 모든 풍경이 지금은 겨울이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강릉에 도착한 순간 알 수 있었다. 겨울의 강릉은 따뜻했다! 온도계가 알리는 기온 자체는 낮았지만 빌딩 사이로 부는 칼바람과 딱딱하게 언 눈의 흔적으로 가득한 도시의 겨울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포근함이 강릉의 공기에 맴돌고 있었다.
바다를 달려라
강릉에 도착했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푸른 바다를 보러 달려가는 것이다. 강릉의 겨울 바다는 놀랍도록 새파랗다. 짙은 코발트블루부터 에메랄드까지 층층이 채도를 이루는 바다가 해안을 향해 끊임없이 다가오는데, 이토록 다채로운 색의 물결을 보기 위해서라면 매서운 겨울 바닷바람은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행히 강릉에는 이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걷고 달릴 수 있는 길이 있으니 이름하여 ‘헌화로(獻花路)’다. ‘꽃을 바친다’는 낭만적인 이름표를 단 헌화로는 바다와 가까운 길을 달릴 수 있는 해안도로다. 유서 깊어 보이는 이름과 달리 이 해안도로가 생긴지는 15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1995년, 강릉군과 명주군이 합쳐져 강릉시가 되며 관광활성화를 위해 군사지역이었던 바다를 막아 길을 냈고, 헌화로가 탄생하게 된 것. ‘헌화로’라는 이름은 고려가요인 ‘헌화가’에서 가져왔다. 헌화가의 배경이 되는 설화에 묘사된 절벽의 풍경이 헌화로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자줏빛 바위 끝에 잡아온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아름다운 수로 부인을 위해 절벽에 핀 꽃을 바치려고 했던 노인이 읊은 헌화가의 내용은 위와 같다. 다행히도 20세기에 생긴 이 해변 드라이브 코스는 21세기에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강릉의 트레킹 코스인 바우길 9구간의 이름이 ‘헌화로 산책길’로 지정된 것이다. 심곡항과 금진항을 잇는 헌화로는 2.4km로 짧지만 바우길은 정동진역부터 심곡항, 금진항을 지나 옥계까지 총 14km의 구간을 연결한다. 바우길 코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모래시계공원과 일출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드는 정동진과, 헌화로를 잇는 심곡항과 금진항은 멀지 않다. 이토록 조용하고 아름다운 해변 마을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정동진으로만 향한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펜션과 식당 간판으로 가득한 정동진과 달리, 민박과 식당을 겸하는 몇 채의 건물을 제외하면 골목마다 장독대가 놓인 심곡항은 진짜 어촌 같다. 숨은 보석 같은 이 마을에 도착했다면 꼭 들러야 할 식당이 있으니 그 이름은 ‘시골식당’이다. 전형적인 시골 주택을 고쳐서 만든 시골식당의 주인공은 바로 못생긴 망치. 날씬한 아귀처럼 생긴 망치는 아귀보다 가시가 많아 먹기에 조금 불편한 것을 제외하면 맛도 식감도 아귀와 비슷하다. 무엇보다 망치의 가장 좋은 점은 1년 내내 잡히기 때문에 무척이나 저렴하다는 것이다. 6천원에 이토록 맛있는 매운탕을 먹을 수 있다니! 꼭 망치 매운탕을 먹지 않더라도 심곡항에 온 이상 시골 식당은 한번쯤 들러야한다. 어떻게든 알고 찾아오는 외지 손님들에게 지쳤을 법한데도 ‘어서와, 들어와’라고 자리를 안내한 후에 말린 밀감 껍질과 생강을 우려내서 만든 뜨끈한 차를 가져다주는 주인 할아버지가 있는 이곳은, 이름 그대로 시골 식당의 정취가 남아 있는 보기 드문 곳이니까.
강릉은 어떻게 커피의 도시가 됐을까
최근 몇 년 사이 강릉은 커피의 도시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2009년 시작된 ‘강릉커피축제’를 찾는 발길이 꾸준히 늘고 있는데다가, 안목항은 이제 커피 거리로 더 유명하다. 모르긴 몰라도 카페가 횟집만큼 늘어선 해변은 우리나라에서 안목항이 유일할 거다. 경포대의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던 ‘유리집’, 커피숍 ‘카페 윌’과 인목해안의 커피 자판기 등 1980년대 초반부터 강릉은 커피와 인연이 깊은 곳이긴 했지만 2000년대 이후, 강릉을 커피의 메카로 만든 원동력의 정체는 바로 사람이다. 한국의 1세대 커피 문화를 이끈 바리스타들이 강릉에 정착하면서 좋은 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강릉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강릉에는 프랜차이즈 커피숍보다 독립 브랜드의 커피숍을 찾는 일이 더 쉽다. 세계의 커피 산지를 여행하며 직접 찾은 최상급 원두와 로스팅 기술을 보유한 커피 공장 ‘테라로사’와 왕산면 산자락에서 직접 원두를 재배하고 커피 박물관을 운영하는 아메리카노 전문점 ‘커피커퍼’가 강릉에서 태어난 커피 브랜드다. 커피를 먹는 게 이제는 일상이 된 우리에게 인적이 드문 연곡 해안에 자리잡은 ‘보헤미안’은 아주 특별한 경험을 약속한다. 일본의 커피학교에서 커피를 배운 후 혜화동과 안암동, 대학가에서 카페를 운영했던 박이추 선생은 일본식 핸드드립의 1인자다. 언뜻 보기에도 편치 않아 보이는 몸으로 직접 로스팅을 하고, 커피를 내리는 그의 모습을 실제로 지켜보는 것은 감동이었다. 테이블 7개 남짓의 작은 카페 보헤미안은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만 문을 열고, 그나마도 오후 5시면 문을 닫는다. 매일 커피를 내리기에 25년간 커피를 내려온 그의 손목이 지쳤기 때문이다.‘좀 더 오래 커피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멀리보고 내린 결정이니 이해와 협조를 바란다’는 카페 입구의 글을 보면서 아주 오랜만에 신중하게 원두를 골랐다.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이 경건했다. 이렇게 ‘장인’, ‘명장’ 같은 언뜻 무거운 단어들만 오가는 강릉의 커피가 최근 달라지고 있다. 강릉의 중심지인 교동, 그리고 상대적으로 한적한 해변인 사천항에 젊은 카페들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강릉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유명한 카페보다 한적하게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교동과 사천항으로 향하는 추세다. 강릉의 부부 미술교사가 차린 ‘교동 899’는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카페다. ‘오래된 기와 한 장도 소중했다’는 말처럼 한옥의 골격을 최대한 살린 이곳에서는 커피와 함께 미숫가루, 전통차를 맛볼 수 있다. 머그잔에 그림을 그리는 수업도 진행하고, 옛날 만화영화의 포스터를 전시하기도 하는 ‘교동 899’의 주인공은 커피가 아닌 공간 그 자체다. 사천항에 문을 연‘ 카페 카모메’ 역시 앤티크한 소품이 주를 이루는 강릉의 클래식한 커피 전문점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다. 새하얀 외관에 파란 지붕을 얹은 이 깜찍한 카페의 가장 큰 매력은 아주 가까이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 것. 사천항을 바라보며 와플에 얹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떠먹다 보면 지금이 겨울인 사실조차 잊게 된다.
최신기사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이마루
- 포토그래퍼
- 안형준
- 기타
- 취재협조 | 운유촌(www.안반데기.kr), 라카이 샌드파인 리조트(www.lakaisandpi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