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리 섬의 어느 멋진 날
1910년 카프리 섬을 찾았던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카프리 섬에서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카프리 섬은 여전히 고유의 색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티레니아 해 가운데에 솟아 있는 멋진 석회암 섬인 카프리 섬은 로마시대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악명 높은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는 절벽 꼭대기에 위치한 빌라 요비스(Villa Jovis)에서 제국을 통치했고, 19세기 중반 카프리 섬은 예술가와 지식인, 예술 애호가, 특히 작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카프리 섬의 풍경과 온화한 기후,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에 매력을 느꼈다. 1910년, 망명 중인 막심 고리키를 만나기 위해 카프리 섬을 찾았던 레닌은 “카프리 섬에서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고 말했다. 1950년과 1960년대에는 유명인사들로 북적였다. 재클린 케네디가 카프리 섬의 골목골목을 카프리 팬츠와 티셔츠 차림에 오버사이즈 선글라스를 쓰고 배회하는 사진은 당시 이 섬이 젯셋족에게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이 되었다. 재클린 케네디가 현지의 구두 디자이너 칸포라에게 부탁해 만든 샌들 또한 ‘카프리 샌들’이라 불리며 큰 인기를 얻었다.
카프리처럼 아주 유명한 여행지를 방문할 때는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기도 한다.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던 12년 전 여름, 카프리의 마리나 그란데(Marina Grande)에 내렸을 때, 나는 무척 실망했었다. 선착장은 촌스러운 기념품 가게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싸구려 술집, 레스토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풍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성수기에는 하루 평균 2만여 명의 당일치기 관광객이 카프리 섬을 방문한다. 당일치기 관광객은 늦은 오후쯤이면 모두 떠난다. 따라서 카프리 섬과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우선 며칠 동안 이 섬에 머물러야 하고, 성수기를 피해 찾아야 한다. 5월에는 야생 꽃이 이 섬을 환상적인 색으로 물들이지만 바닷가는 아직 쌀쌀하다. 저녁시간에도 바닷물이 따뜻하고, 여행객들이 빠져나가 주변이 차분해지는 9월 말이나 10월 초가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다.
카프리 타운의 대부분 지역은 걸어서만 들어갈 수 있다.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는 적고, 차는 그보다 더 적다. 그러니 조금 먼 거리를 이동하고자 한다면 지붕이 없는 긴 피아트 택시(분위기 내기에는 좋지만 가격이 비싸다)를 부르거나, 아주 작은 주황색 버스(붐비지만 가격이 싸다)를 이용해야 한다. 카프리 섬의 자연 그대로의 매력이 살아 있는 외딴 곳을 방문하려면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다. 카프리를 진정으로 느끼고 싶다면 바닷가로 내려가기를 권한다. 섬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거닐다 보면 육지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숨겨진 해식동굴과 작은 해변을 발견할 수 있다. 절벽에 가려져 있는 별장과 짙은 파란색 물 위에 멋지게 솟아 있는 암석도 만날 수 있다.
카프리 섬에는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거나 낚시를 하는 주민이 많다. 육지와 바다에서 공수한 신선한 재료를 본연의 맛을 살려 요리하되, 이탈리아 남부의 햇살 가득한 풍미가 느껴지는 요리를 내놓기로 유명한 카프리섬의 음식문화는 이들에서부터 온 것이다. 인살라타 알라 카프레제 같은 요리는 버팔로 모차렐라, 태양광에 익은 토마토, 경사가 높은 곳에서 자라는 후추맛 나는 바질 등으로 만들어져 그 어디에서도 맛본 적 없는 새로운 맛을 선사한다. 카초타 치즈와 신선한 마조람으로 속을 채운 뒤 토마토 소스를 얹은 라비올리 카프레제와 아몬드를 갈아 만든 촉촉한 초콜릿 케이크인 토르티야 카프레제 역시 맛이 뛰어나다. 이곳에서는 3천 년 가까이 포도나무도 재배하고 있는데, 단순한 이곳의 요리와 곁들이기에 좋다. 저녁식사 후에는, 레몬 껍질을 술에 재워 만든 얼음처럼 차가운 리몬첼로를 한잔하면 천국이 따로 없다.
마리나 그란데
카프리 섬을 방문한다면, 여행의 시작과 끝을 마리나 그란데에서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앞서 얘기했듯이 성수기에는 당신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러니 무거운 슈트케이스는 대기하고 있는 현지의 짐꾼들에게 맡기고(몇 유로만 내면 호텔에 짐을 배달해준다), 택시를 타거나 가파른 카프리 섬을 올라가는 열차인 푸니콜라레를 타길. 늦은 오후에는 블루 그로토(Blue Grotto)를 방문해도 좋다. 이 수중 동굴은 1826년, 독일의 시인인 아우구스트 코피치가 발견한 곳이다. 작은 배에 타고 내리기를 여러 번 해야 하고 오랜 기다림도 견뎌내야 하지만 동굴 속에 들어가면 푸른 무지갯빛에 넋을 잃게 될 테니 그 가치가 충분하다. 이 동굴에 들어가는 또 다른 방법은 아나카프리 아래에 있는 바위를 따라 헤엄쳐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관광용 배가 철수한 후에 시도하는 게 좋다. 운이 좋으면 동굴을 혼자 둘러보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항구 주변의 약간은 지저분한 분위기와는 차원이 다르게 멋진 JK 플레이스 카프리(JK Place Capri)는 항구 바로 위쪽의 절벽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세련되고 아늑한 인테리어는 바닷가에 자리한 이 호텔의 지역적 특성과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깊은 바다의 푸른빛을 닮은 블루와 화이트 컬러로 꾸민 호텔 프런트와 22개의 객실에는 햇살이 내리쬐고, 대부분의 객실에는 환상적인 티레니아 해변을 감상할 수 있는 테라스가 있다. 간단한 식전 음식과 식사를 할 수 있는 테라스 식당도 있고, 적당한 크기의 수영장, 산타 마리아 노벨라 제품을 사용하는 작지만 훌륭한 스파도 있다. 호텔에 속한 J 키친 레스토랑도 훌륭하지만, 조금 더 소박한 요리를 즐기고 싶다면 다 파올리노(Da Paolino)를 방문해보길. 레몬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 아래에 놓인 테이블에서 봉골레 스파게티와 소금으로 감싸 구운 농어구이, 그리고 레몬 푸딩을 먹으며 진정한 카프리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카프리 타운
피아체타(Piazzetta)는 이 중세 도시의 심장부에 위치한 광장이다. 작가 노먼 더글러스는 이곳을 ‘세상을 보여주는 작은 극장’이라 칭했는데, 그의 말에 걸맞게 이곳을 네모난 무대라고 봐도 무리는 없다. 이곳에는 교회와 종탑, 네 개의 라이벌 술집의 테이블이 가득 차 있는데, 크림 색상의 재킷을 입은 웨이터들이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경쟁적으로 호객행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카프리 섬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 광장을 지나게 되는데, 아페리티보를 먹을 시간이 되면 값비싼 주얼리와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으로 멋을 부리고 아페롤 스프리츠를 주문하는 사람들을 원 없이 볼 수 있다.
낮의 피아체타와 이곳을 둘러싼 좁은 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붐빈다. 하지만 인파를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가장 유명한 산책길 파세지아타(Passeggiata)는 조용한 비아 트라가라(Via Tragara)를 지나 벨베데레 디 트라가라(Belvedere di Tragara)로 이어지는데, 이곳에서는 카프리 섬의 동남쪽 끝에 있는 세 개의 들쭉날쭉하게 솟은 석회석 타워, 파랄리오니(Faraglioni)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수백 개의 계단이 있는 둥근 원형의 길을 걸으면 해안가의 환상적인 경치가 길목마다 펼쳐진다. 붉은색으로 칠한 현대풍의 빌라 말라파르테(Villa Malaparte)와 침식 바위로 인해 형성된 아치 모양의 아르코 나투랄레(Arco Naturale) 또한 놓쳐서는 안 될 구경거리다. 독일 기업가의 이름을 딴 비아 크룹(Via Krupp)에서 급커브를 하면, 어렴풋이 보이는 절벽으로 가려진 사랑스러운 작은 해변인 마리나 피콜라(Marina Piccola)가 나타난다. 작은 모래사장까지 있는 라 칸초네 델 마레(La Canzone del Mare) 비치 클럽에서 선베드를 빌려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타운의 북동쪽에 위치한 빌라 요비스(Villa Jovis)까지는 꽤 많이 걸어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일단 그곳에 도착하고 나면, 그레이엄 그린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 중 하나’라고 설명한 풍경을 직접 눈에 담을 수 있다.
숙소를 찾는다면, 5성급의 눈부신 대궐 같은 호텔과 옛 카프리 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전통적인 펜시오니에 이르기까지 선택의 폭이 다양하다. 피아체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스칼리나텔라(Scalinatella) 부티크는 절벽 위에 자리해 카프리 섬의 화려함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숙소, 푼타 트라가라(Punta Tragara)는 파랄리오니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위치해 있다. 르 코르뷔지에가 지은 빌라 안에 있는 이 호텔에는 두 개의 소금물 수영장과 하나의 레스토랑이 있으며, 모든 객실의 뷰는 환상적이다. 타운 중심에서부터 꽤 멀리 떨어져서 시골 느낌까지 나는 곳에 자리한 카프리 티베리오 팰리스(Capri Tiberio Palace)는 최근 화려한 색감의 인테리어로 유명한 디자이너 지암피에로 파네핀토의 손길을 거쳐 반짝반짝 빛이 난다. 스위트룸에는 객실 내부만큼이나 넓은 외부 공간이 딸려 있는데, 그곳에서 바닷가를 바라보며 하루를 보내도 될 만큼 아름다웠다.
아나카프리
아나카프리는 카프리 섬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섬 동쪽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카프리 타운보다 한적한 모습이다. 1872년에 이 두 도시를 잇는 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서로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마리나 그란데로 향해 있는 경사진 계단을 900개나 오르내려야만 했다. 카프리와 마리나 그란데로부터 어지러울 정도로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는 버스는 언제나 관광객을 가득 싣고 운행한다. 이들 관광객 중 대부분은 스위스 의사였던 악셀 문테가 여러 가지 스타일을 뒤섞어 만든, 절벽 위에 위치한 빌라 산 미켈레(Villa San Michele)로 향하거나, 고도 600미터의 몬테솔라로(Monte Solaro) 정상으로 가기 위해 의자형 리프트에 몸을 맡긴다. 다행히 이들 중 아주 적은 수만이 18세기에 만들어진 작은 규모의 산 미켈레 아르칸젤로(San Michele Arcangelo) 교회를 방문한다. 이곳에서는 에덴 동산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모습과 특이한 동물들이 그려져 있는 마욜리카 타일 바닥을 구경할 수 있다.
아나카프리는 카프리 섬 본연의 모습을 잘 보여주면서도 고급 호텔들이 위치한 곳이다. 셀러브리티들이 좋아하는 카프리 팰리스 호텔&스파(Capri Palace Hotel&Spa)는 71개의 꿈같이 아름다운 객실과 일부 스위트룸은 개인 수영장까지 갖추고 있다. 이 호텔의 스파에서는 얼굴과 전신 마사지뿐 아니라 치료 목적의 트리트먼트도 제공한다. 카프리 팰리스 호텔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방이 7개 딸린 빌라 레 스칼레(Villa Le Scale)가 나온다. 이곳은 호텔이라기보다는 럭셔리한 프라이빗 하우스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푸른 정원 속에 자리한 이곳에는 수영장이 있으며, 박물관에 있을 법한 예술품과 앤티크 가구가 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최근 발견한 새로운 숙소는 카프리 스위트(Capri Suite)이다.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민박집인 이곳은 빛바랜 프레스코화와 아치형의 천장이 아름답게 드리워져 있다. 빈티지 소품과 디자인 소품이 어우러진 스위트룸 두 개는 안뜰과 거실, 부엌을 함께 사용할 수 있어 장기 투숙자에게 안성맞춤이다. 미슐랭 3스타를 받은 아나카프리의 레스토랑들은 모두 카프리 팰리스 호텔 안에 있다. 미슐랭 2스타를 받은 롤리보(L’Olivo)에서는 로로피아나 캐시미어로 덮인 소파에 앉아 입맛 당기는 요리를 맛볼 수 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느긋하게 점심 식사를 하고 싶다면, 카프리 팰리스 호텔의 비치 클럽에 있는 일리치오(Il Riccio)만 한 곳이 없다. 나폴리 만에서 갓 잡아 올린 신선한 해산물로 요리하는 이곳에서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치형 정자에서 로맨틱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포도나무와 채소밭으로 꾸며진 테라스 사이에 자리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좋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다 젤소미나(Da Gelsomina)도 빠뜨릴 수 없다. 이곳은 카프리 섬의 모든 곳이 남에게 보여지는 것만을 중요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베란다에 단정하게 자리잡은 테이블에서 파스타, 토끼 고기, 와인을 원 없이 맛볼 수 있다. 훌륭한 풍경과 맛있는 요리 덕분에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시게 되었다면 수영장에서 쉬거나 이곳의 멋진 6개의 객실에서 머물러도 좋다. 오감을 만족시켜주는 지구상에 몇 안 되는 여행지인 만큼 카프리 섬에서 불가능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으니까.
- 에디터
- 글 / 니키 스왈로(Nicky Swallow), 피처 에디터 / 조소영
- 포토그래퍼
- Matthew Buck
- 아트 디자이너
- Illustration | Neil G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