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집, 오래된 맛.1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 맛을 이어가는 맛집이 있다. 문화재가 따로 있을까. 우리의 추억 과 현재 속에 살아 있는
오래된 식당은 살아 있는 유산이다. 종종걸음으로 이 집 저 집의 문을 두드리는 동안 행복했다. 그 맛 변치 마시고 대대손손
이어가세요. 나중에 손주들과 가야 하니까요.
장원 한정식
‘한정식의 대모’라고 불리는 여인이 있었다. 음식 맛있기로 소문난 목포의 부잣집 며느리로 살며 익힌 까다로운 손맛으로 서울에 남도식 한정식을 최초로 선보인 분. 여러 대통령과 정, 재계 인사를 단골로 두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에만 신경을 쏟았고, 지금은 독립한 수많은 셰프를 가르친 스승이자, 음식으로 돈 버는 거 아니라고 믿었던 자부심 강한 여주인.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 조문을 왔다. 작고한 ‘장원’의 창업주 주정순 여사의 이야기다. 1958년 청진동에 문을 연 장원. 역대 대통령부터 이병철, 정주영 회장까지 ‘5공’ ‘6공’으로 일컬어지는 격변기에 우리나라를 손에 쥐고 흔든 사람들이 모두 이 집 단골이었고, “군인끼리 다 해먹냐”는 말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술잔을 집어 던진 곳도 이곳이다. 중요한 결정이 늘 청와대나 국회에서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장원 정치’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는데, 손님에 관한 그 어떤 말도 새나가지 않게 단속한 여사의 별명은 ‘헌병(MP)’이었다. 주정순 여사가 별세했을 때, 유력 신문은 ‘한국 현대 정치사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을 단골로 둬 ‘막후정치’ ‘밀실정치’라는 말을 탄생시켰던 고급 한정식집의 본산 ‘장원’의 창업주 주정순 씨가 향년 86세로 별세했다’고 적었다. 회고록을 내자는 숱한 제의를 거절한 대쪽 같은 성품은 가시는 날까지도 그대로였다고 한다. 마지막 유언도 “장원에서 있었던 일을 밖에 말하지 말라”였다고 하니.
격변의 우리 역사처럼 장원도 많은 이야기를 겪었다. 장원이 종로구 계동에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많은 사람이 기뻐했다. 지금 장원은 딸 문수정 대표가 이어가고 있다. 곳곳에는 오래된 골동품이 걸려 있다. 집안 대대로 모은 병풍, 도자기, 가구 중에는 5백 년이 넘은 것도 있다고. “원래는 더 많았어요. 그림도 2백점이 넘었었죠.” 과연, 음식 하나하나가 정갈하고 맛있다. 남도음식에서 빠트릴 수 없는 삼합도 나온다. 못 먹는 것 없이 다 먹는다는 내게도 홍어만큼은 두려운 존재. 냄새를 맡아보니 지금까지 만난 홍어 중에 삭힌냄새가 가장 강했다. 홍어회에 돼지수육을 얹고 묵은지에 싸서 눈을 질끈 감고 입에 넣었다. 그런데 맛있었다! 일등공신은 묵은지. 여느 식당의 묵은지와는 차원이 다른, 곰삭으면서도 맛이 시원하면서 깊은 묵은지로 나는 삼합의 맛에 눈떴다. 점심 정식 3만 5천 원을 주문하면 삼합은 물론 꾸덕하게 잘 마른 보리 굴비, 낙지볶음, 제철 생선회 등을 차례로 받을 수 있다. 요리도 요리지만 깔끔한 찬에 반했다. 설컹설컹한 호박을 넣은 민물새우찜은 밥도둑이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북엇국은 더 청해 먹었다. 문수정 대표는 장원의 대를 이으면서 다음과 같은 시조를 곳곳에 새겼다. ‘오동은 천년을 살아도 그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 추위 속에서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문수정 사장에게 다음 대를 이을 사람을 생각해놨냐고 물었다. “글쎄요, 아이들이 다 미국에 가 있는데, 누가 적당할지 지켜봐야겠지요.”
석산정
일요일의 을지로는 무척 한가롭다. 10년 전만 해도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복작거렸지만 지금 일요일에 영업하는 곳은 거의 없다. 을지로4가에 위치한 ‘석산정’은 밖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은 지금도 익숙한 발걸음을 옮긴다. 아버지대에서 아들에게 대물림되는 사이 벌써 50년이 흘렀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근처에 있는 석산정과 진고개는 비슷한 점이 많다. 나이도 비슷하고, 특기도 비슷하다. 불고기와 곱창전골을 주 메뉴로 내세우고 있지만 오랜 한식집처럼 무엇이든 주문하면 맛있고, 오래된 음식점의 구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점도 같다. 특히 곱창전골은 요즘 곱창전골과 달리 깊고 부드러운 맛을 낸다. “세 시간 동안 곱창과 내장을 삶아서 따로 양념을 해 재워둬요. 보기보다 시간과 수고가 많이 들어가는 음식이에요.” 작고한 창업주 최술봉은 ‘돌’이 가진 무궁무진한 힘과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아는 분이었던 것 같다. 창업주는 서울에 돌솥으로 지은 돌솥밥을 처음 선보이고 대중화한 주인공이고, 곱돌로 만든 불판에 불고기와 전골을 끓이기 시작한 최초의 곳이다. 석산정 내부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대형 수조는 산에서 발굴했다고 하는데 무게만도 몇 톤이다. 석산정이라는 이름과 돌수조, 돌솥밥 같은 일관된 콘셉트와 맛있는 음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정말 돌이 주는 힘 때문인지, 한번쯤 겪는 이전이나 휴업 같은 사건 하나 없이 석산정은 같은 자리에서, 맛과 멋을 이어간다.
매화
연남동 중국 식당 ‘매화’의 안에 들어서면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이다. 오래된 흑백사진과 중국 옷을 입은 종업원들이 자아내는 풍경이 10년 전에도, 70년 전에도 펼쳐졌을 것같다. “최대한 바꾸지 말고 이어가라고 하셔서, 거의 손대지 않았어요.” 밝은 표정의 여주인은 3대째의 부인이다. 메뉴에 적힌 인사말처럼 할아버지 때부터 지켜온 전통 중국 식당. 연남동의 중국 식당 매화의 입구에는 액자에 든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3대가 함께 찍은 정겨운 가족 사진이다. 그 사진 속의 꼬마가 지금 매화를 책임지고 있는 3대인 것. 사진 속 인물 뒷 편 하얀 간판에 적힌 ‘금락원’은 매화의 옛 이름이다.1930년대부터 명동을 주름 잡았던 시절을 뒤로하고 1980년대 연남동으로 옮기면서 매화로 이름을 바꿨다. 대대손손 이어온 오래된 집에서는 여지없이 가풍이 느껴진다. 매화에서는 부지런함과 심미안, 유쾌함이 보인다. 아래층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에서 모았을 빈티지 카메라 등이 장 안에 잘 전시되어 있고, 위층에는 각국의 화폐와 피규어가 가득 놓여 있다. 벽에 특별 메뉴를 적어 놓은 호탕한 필치도 3대의 솜씨다. 이러한 멋은 음식으로도 이어진다. 탕수육 하나, 짬뽕 하나를 시켜도 참 예쁘다. 당근으로 매화를 만들고, 취잎으로 이파리를 만들어 보기 좋게 장식해 내놓는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식당으로 손꼽히는 집답게 음식 맛도 좋다. 여름 동안 선보이는 비취 중국냉면을 유행시킨 것도 이 집이다. 겨울에는 냉면 대신 굴짬뽕과 메생이짬뽕이 계절 특선으로 나오는데 국물이 시원하다. 중국 냄새를 확 느끼고 싶다면 오향장육을 한번 주문해보길. 송화단과 장육에 파채를 터프하게 올린 오향장육은 정말이지 매력 있는 맛이다. 역시 나이란 그냥 먹는 것은 아니다.
하동관
<대통령의 맛집>이라는 책이 있다. 중앙일보에 연재된 역대 대통령들의 단골 맛집을 쭉 소개한 칼럼을 모은 이 책에 ‘신안촌’은 김대중 대통령의 맛집으로, ‘토속촌’은 노무현 대통령의 맛집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여기에 역대 대통령이 모두 좋아했다는 70년이 넘은 곰탕 명가 ‘하동관’이 빠질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는 대단해서, 헬기로 제주도까지 30인분의 곰탕을 공수한 적도 있단다. 오랜 역사를 가졌기에 이야기도 많은 곳이다. 70년 동안 딱 한 번 외상손님이 있었는데, 바로 ‘장군의 아들’ 김두한 의원이었다.
본래 하동관을 열고 25년을 운영해온 김씨 부부는 살뜰하게 돌봐온 가게를 친한 친구인 장씨 부부에게 넘겼다. 지금 하동관의 주인은 이 두 번째 주인의 아들과 며느리다. 하동관은 21세기에 들어 많은 변화를 겪었다. 재개발에 밀려 정든 수하동을 떠나 명동에 보금자리를 찾은 것이 그렇고, 시동생이 운영하는 강남점이 생긴 것도 그렇다. 아쉬운 것도 있지만 젊은 사람들의 발길은 더 잦아졌다. 요즘에도 하동관은 저녁 장사를 하지 않는다. 그전에 곰탕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여전히 선불제이고, 바쁜 점심에는 합석이 예사다. 하동관에 오면 그냥 그런 줄 안다. 대신 맛있게 먹으려면 몇 가지 암호를 숙지하는 게 좋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보통’이 나오는데 뭘 모르는 사람들만 그렇게 먹는다. 내장을 좋아하면 ‘내포’, 차돌을 좋아하면 ‘차돌’, 기름기가 부담스러우면 ‘기름 빼고’, 고기 없이 국물만 먹겠다면 ‘민짜’, 밥 양은 ‘넌둥 만둥’부터 좀 더 많은 ‘맛배기’도 있다. 달걀을 넣어 먹으려면 ‘통닭’을 찾을 것. ‘차돌, 내포, 기름 빼고, 통닭, 맛배기’로 주문을 하고, 테이블 위의 파를 엄청 넣곤 한다. 반 정도 먹다가 ‘깍국’을 부르면, 주전자째 깍두기 국물을 부어준다. 보기에 아름답지는 않지만, 깍두기 국물의 시고 개운한 맛과 곰탕과 진한 맛의 조화가 새롭다. 하동관에 가보면 2대인 며느리 김희영 사장과 꼭 닮은 딸이 함께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하동관이 사라질 일은 없을 거란 생각에 안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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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허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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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