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집, 오래된 맛.2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 맛을 이어가는 맛집이 있다. 문화재가 따로 있을까. 우리의 추억 과 현재 속에 살아 있는 오래된 식당은 살아 있는 유산이다. 종종걸음으로 이 집 저 집의 문을 두드리는 동안 행복했다. 그 맛 변치 마시고 대대손손 이어가세요. 나중에 손주들과 가야 하니까요.

주소 중구 을지로4가 61 문의 02-2266-54091 식성 좋은 둘이 먹어도 다 먹지 못할 정도로 푸짐하다. 2, 3 열무와 동치미의 맛이 유난히 시원하다.

춘천막국수

1962년 문을 연 이곳의 이름은 ‘산골면옥’이다. 하지만 을지로에서 막국수 먹자고 해도 다 알아듣는다. 서울에 막국수란 음식을 처음 선보인 집이니까. 그래서 이름보다 ‘춘천막국수집’으로 통하는 집이다. 입구에 늘어선 수십 개의 붉은 통이 뭔가 싶어서 열어 보면, 막국수에 빠질 수 없는 동치미가 가득이다.자리에 앉으면 인사처럼 내주는 것도 이 동치미 한 그릇. 후르륵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면 흡사 평양냉면집과 비슷한 분위기다. 모자와 재킷으로 멋을 낸 할아버지들이 막국수를 맛나게 비우고 있다. 할아버지 손님이 많아서 가격을 거의 올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4천 원에 맛있는 국수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 이렇듯 수십 년을 이어오면서도 크게 욕심 내지 않는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모든 재료는 국내산만 사용하고, 찾는 사람들에게는 메밀가루도 판다. 여전히 작동 중인 낡은 공중전화 옆에선 3대째 며느리가 카운터를 본다. 막국수는 양념장에 잘 비벼 먹다가 주전자째 주는 닭육수를 조금 넣어 물국수로 만들어먹는 게 단골의 입맛이다. ‘막국수 쟁반’을 처음 만들어낸 집도 이곳이라고 하는데, 야채와 차갑게 식힌 찜닭의 쫄깃한살이 듬뿍 들어 있다. 쫀득하게 삶아서 먹기 좋게 찢어 주는 꿩, 오리, 찜닭 등 별식도 준비되어 있다. 방금 만들어먹고, 막 내려서 먹는다고 막국수라는 이름이 붙은 음식처럼, 소박하고 투박하지만 정겨운 곳이다. 을지로에서는 이 집을 모르면 간첩이다.

주소 종로구 부암동 245-2 문의 02-379-26481 색색의 소만두를 띄운 조랭이 떡만둣국. 2, 3 여주인이 모으는 그릇 4 기품 있는 맛의 편수.

자하손만두

‘자하손만두’의 간판은 밤에 보면 더 예쁘다. 색색의 꽃이 잎에 둘러싸여 있는 그림 아래로 손글씨로 ‘자하’라고 써 있다. 집안에서 모아온 그릇과 다기가 가득한 장식장. 한구석에 놓인 오래된 재봉틀도 이곳이 여주인이 정성껏 운영하는 곳이라는 걸 말해준다. 대를 이어 반가의 만두를 선보이는 자하손만두. 손녀딸인 박혜경 대표는, 할머니를 손맛이 있는 고운 분으로 소개한다. “장사하는 분이 아니었어요. 저희를 곱게 길러낸 다정한 할머니세요.” 90세가 넘었다는 할머니는 지금도 건강하시다고. 고운 할머니와 지금 자하를 운영하는 손녀의 가족은 노을이 예쁘다는 자하동에 살며 집안 별미인 만두를 만들었고, 그 맛을 나누게 되었다. 이곳의 터줏대감인 셈. 담담하지만 곱씹어보면 깊은 맛이 개성과 서울의 반가 음식을 이어오고 있다. 개성식 만두를 선보이는 대표적인 만두집인 이곳에서 꼭 맛보아야 할 음식은 시금치와 당근, 비트로 물들인 색색 만두가 곱게 떠 있는 떡만둣국과 편수다. 떡만둣국에는 흔한 가래떡 대신 개성식 조랭이 떡이 들어 있다. 떡만둣국을 주문해도 만두 먹기 바빠 떡은 남기기 일쑤지만, 이곳 조랭이 떡은 말캉말캉한 식감이 좋아서 남김없이 건져 먹고, 국물도 남김 없이 떠 먹는다. 네모난 모양새가 정갈한 편수는 야채를 많이 넣어 시원하고 담담한 맛이 일품인 여름 만두. 오이의 향긋함이 코끝에 감돌고, 한 접시를 다 먹어도 느끼함이 없다. 편수는 사계절 선보이고 있지만, 차게 먹는 만둣국 ‘편수찬국’은 여름에만 한다. “<규합총서>처럼 오래된 요리책을 보면 편수찬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하지만 정확한 레시피는 없어요. 그래서 나름으로 만든 음식이에요. 양지머리를 푹 삶아서 기름을 걷어낸 국에, 고명도 색색 예쁘게 얹었죠.” 한 번이라도 만두를 만들어본 사람은 안다. 만두는 유독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만두피를 반죽해서 밀어놓고, 소를 만들어서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빚어야 한다. 귀 하나라도 대강 붙이면 삶다가 흩어지고 만다. 그래서 만두는 얌전하고 정갈한 여자들의 손이 아니면 안 되는 음식이다. 자하손만두의 박혜경 사장은 추억 속에서 오늘도 고운 만두를 빚는다. 만두가 주인과 꼭 닮아 있었다.

주소 종로구 종로1가 24 르미에르빌딩 1층 문의 02-735-16901 단순한 메뉴. 2 해장국 한 술에 마음까지 노곤해진다.

청진옥

“주모, 국밥 주소!” 해장국의 역사는 주막의 역사와 이어진다. 주막에서 팔던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국밥. 안주로도 먹고, 해장을 위해서도 먹고 그러다 근대에 와 생겨난 음식이 해장국이다. 과거 도성의 양반들은 새벽 종이 칠 때 먹는 국이라는 뜻의 ‘효종갱’이라는 고급 해장국을 즐겼는데, 소고기와 해삼, 전복, 표고버섯 같은 고급 재료를 넣고 푹 끓인 이 음식을 배달해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해장국은 그때그때 구할 수 있는 값싼 재료로 만들어졌다. 쇠고기와 선지, 시래기, 우거지, 콩나물과 같은 야채를 넣고 푹 끓여 넉넉히 퍼주는 해장국은 오랫동안 서민의 속과 가슴을 따뜻하게 채워줬다. 이렇듯 서민의 음식이자, 해장국을 대표하는 청진옥은 1937년에 문을 연 해장국 전문점이다. 처음에는 가게 이름도 없었다고 한다. ‘청진옥’이란 이름을 단 건 6.25전쟁 이후다. 이 집이 어찌나 유명했는지 ‘청진동 해장국 골목’이 생겨났을 정도. 유독 ‘민심정치’를 꾀하는 정치인의 출입도 잦다.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공식선거일 첫날 아침 식사를 한 곳도, 김태호 총리후보자가 총리 내정 후 첫날 일정을 시작한 곳도 이곳이었다. 그는 기자 회견에서 말했다. “밤새 속 쓰리고 열 받은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서민이 자주 가는 식당에서 그들의 표정을보면 대충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알 수 있다.” 할아버지에서 아들, 손자로 3대째 전승되면서, 손님도 3대째다. 청진동에서 70년을 영업해온 청진옥은 재개발에 밀려 종로의 주상 복합 빌딩으로 마지못해 이전을 했는데, 이전 전날까지 그 집에서의 마지막 해장국을 먹으려는 사람들의 발길과 기념 촬영이 이어졌다. 지금의 청진옥은 최신식 건물에 위치해 있지만 오래된 집의 운치를 자아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구석구석보인다. 과거 청진옥의 흑백사진이 오랜 추억을 길어 올리고 있다. 기본이 되는 해장국은 6천 원인데, 6천 원으로 이렇게 맛있는 한 그릇을 먹어도 되나 싶게 맛있다. 8천 원짜리 특해장국은 내장과 건더기가 훨씬 풍부하다. 시뻘건 고추기름이 둥둥 떠 있고 맵기만 한 해장국과 달리 얼큰한 맛과 구수한 맛의 균형이 잘 잡혀 있고, 내장과 선지도 부드럽게 삶겼다. 여자들에게는 선지가 좋다지. 싱긋 웃으면서 선지 더 먹고 싶다고 하면 흔쾌히 더 큰 덩어리를 가져다준다. 이것이 바로 명가의 인심인 것 같다.

주소 강남구 역삼동 736-37 소정빌딩 1층 문의 02-537-3387 1 모둠순대 작은 접시. 2 시원하고 개운한 가자미 식해.

아범순대

아범순대 역시 서울역 부근에서 시작한 곳이지만, 강남으로 옮겨 장사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역삼동, 대치동 부근에서 자란 사람들이 ‘아버지와 함께 먹던 맛’으로 기억하는 이 순대집은 순대의 본고장 함경도식 순대를 선보인다. 모둠순대를 주문하면 막창순 대 한 줄, 대창순 대 한 줄, 머리고기와 내장까지 도합 세 줄이 나온다. 식용 비닐을 사용하는 값싼 순대와는 생김도 맛도 다르다. 대창순대는 부드럽고, 막창순대는 고소하고 쫄깃하다. 씹으면 씹을 수록 차진 맛이 혀에 착 감긴다. 지금은 돌아가신 창업주가 함경도 분. 고기를 입에도 못 대는 큰 딸 대신 둘째 딸 이성희 사장이 가업을 물려받았다. 파리 유학 중 가업을 잇기 위해 돌아왔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들리지만, 이 집이 뭔가 다르다는 건 명태 순대, 가자미식해 같은 별미가 메뉴에 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특히 가자미식해는 이북 음식에 통달한 사람들이 찾아 헤매는 음식. 가자미를 좁쌀에 넣고 발효시킨 음식으로 홍어처럼 희한한 가스는 없고 사이다처럼 톡 쏘는 시원함만 남아 있어, 묵직한 맛의 순대와 곁들이면 개운하게 입안을 씻어준다. 손맛이 어디 가지 않듯이 무김치도 시원하다. “함경도순대는 다른 지방 순대와는 달라요. 당면 대신 찹쌀을 넣고, 야채를 아주 많이 넣어서 담백한 맛이 특징이죠. 명태 순대는 신선한 생태로 만들고요.” 명태로 순대를 만든다? 명태의 내장을 긁어내고 배 속에 담백한 소를 채워 먹는 명태 순대는 순대계의 고급메뉴. 이북에 고향을 둔 노부부도 좋아하지만, 안줏거리를 찾는 젊은 사람들에게도 인기다. 겨울에만 명태 순대전골을 선보인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허윤선
    포토그래퍼
    정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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