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그림자와 겨울날의 주안상

겨울의 낭만이라면 따뜻한 모처에 들어앉아 소중한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최고다. 음식 맛 좋고, 술 맛도 좋다면
얼큰하게 취해보는 것도 괜찮다. 겨울은 밤이 길고 아침이 오려면 한참 멀었으니까.

디저트처럼 달콤한 인생

컬리너리아+위스키
위스키올해 등장한 파인다이닝 중 단연 최고인 컬리너리아. 젊은 셰프의 패기와 재능이 돋보이는 프렌치 퀴진은 세련되면서도 깊이가 있다. 차이브 오일을 곁들인 굴 요리, 삶은 뒤 시즈닝하고 구워내서 두 가지 맛을 즐길 수 있는 돼지고기 요리를 먹고 난 후에는 디저트가 나오는데, 디저트에 곁들이는 위스키 맛은 최고다. 위스키는 흔히 남자의 술로 여겨지지만 호박색의 스코틀랜드산 싱글 몰트 위스키 글렌리벳은 꿀처럼 달콤하다. 셰프가 마지막으로 건네준 접시에는 비터스위트 초콜릿 무스와 화이트 초콜릿 소스, 구운 바나나, 캐러멜, 소금과자, 바닐라 케이크, 아이스크림 등이 어우러져 있는데, 이 맛들은 정확히 위스키의 복잡미묘한 향을 읽는 코드가 된다. 실제로 위스키는 식욕을 돋우는 아페리티프와 대칭점에서 식사를 마무리하고 소화를 돕는 디제스티프(Disgestif)다. 프랑스식 만찬을 끝내는 완벽한 마침표. 지루한 커피 대신, 디저트엔 위스키다.

젓가락으로 한입, 술 한 모금

차우기+일본 소주
요리가 맛있던 일본 주점 스미스 선생의 정창욱 셰프가 종로구 재동에 작은 한옥 레스토랑을 마련했다. 일본식요리를 내려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서양식 요리를 한다. 하지만 테이블엔 칼과 나이프 대신 젓가락이 놓여 있다. ‘젓가락으로 먹는 서양 음식’이 바로 이곳의 모토. 일본식 서양 요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유자향의 치킨과 와사비를 곁들인 스테이크 덮밥처럼 이곳은 우리 것과 일본 것, 서양 것이 멋지게 어우러져 있다. 작은 레스토랑에 어울리는 작은 술 냉장고에는 셰프가 선별한 술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우리나라에서 찾기 힘든 산토리 맥주, 샴페인과 샤도네이 품종 와인, 시소잎을 넣어 만든 일본 소주, 캡틴 럼이 또 사이 좋게 놓여 있다. 채끝살을 손으로 죽죽 찢어 5일 동안 만든 스튜와 토마토 소스를 곁들인 모차렐라 만두, 독감도 뚝 떨어쳐낼 줄 것 같은 어니언 수프는 추운 날 시린 가슴에 따뜻한 위로가 된다. 이곳에서는 각자 내키는 술을 마시면 된다. 향이 웬만한 우디 계열 향수 못지않은 시소 소주나 터프한 남자에게 어울릴 럼을 멋대로 시켜도 괜찮다. 차우기에선, 신기하게도 모든 게 잘 어울린다.

뉴욕에서 온 두부집

교토푸+스파클링 사케
교토푸는 두부와 디저트로 유명한 곳이지만, 알고 보면 술 맛이 참 좋은 곳이다. 무엇보다 여자들이 마시기 쉬운 술 리스트가 충실한데, 게다가 이 술들은 예쁘기까지 하다. 사케계의 샴페인 격인 스파클링 사케는 분홍빛 병에 담겨 있는데, 작아서 둘이서 두런두런 반주하기 딱 좋다. 흰 토끼와 달 일러스트가 그려진 사사라 츠키 사케는 달콤한 아마구치 계열 사케라 술술 넘어간다. 다양한 술을 맛보고 싶다면 사케 플레이트를 주문하길. 대나무잎 한 장 척 깔고 각각의 사케를 담은 네 개의 잔이담겨 오는데 묵직한 가라구치 계열 사케부터 달콤한 아마구치 사케, 일본식 탁주, 플럼으로 만든 사케까지 비우다 보면 세상이 한층 아름다워져 있다. 두부를 주 재료로 하기에 담백하고 저칼로리 음식이 많은 것도 장점이다. 씁쓸한 내장 대신 두부로 속을 채워 튀기고 간장 젤리를 곁들인 소프트셸 크랩은 담백하고 고소한 맛으로 최고의 안주 자리를 노린다. 셰프의 오마카세 메뉴를 주문하면 이 소프트셸 크랩과 미니 두부 버거, 오니기리 등 식사와 안주를 겸할 수 있는 주안상이 펼쳐진다. 먹기 전이나 먹은 후나 깔끔해서 좋다.

술 마시러 가요

마카로니 마켓+보드카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레오 강이 정식으로 마카로니 마켓의 오너 셰프가 된 지 한 달째. 마카로니 마켓에 술 마시러 간다. 굴과 시푸드 플래터 때문인데, 단순하고 캐주얼해 보여도 먹어보면 특별하다. 사진 속에 보이는 굴은‘프렌치 오이스터’다. 프랑스에서 수입한 굴이 아니라 프랑스식으로 소량 재배한 우리나라 굴로, 여느 굴과 생김도, 크기도 다르다. 이렇게 재배한 굴은 굴 특유의 바다 향은 적지만 식감이 탱글하고 좋아, 생굴을 즐기지 않는 사람의 생애 첫 생굴로 추천하고 싶다. 여기에 샬롯을 넣은 레드와인 비네거 소스를 뿌려 입안에 넣으면 순간 말이 안 나온다. 터프한 듯 섬세하게 구워낸 시푸드 플래터에는 도미 한 마리가 척 올라와 있고, 딱 부드럽게 구운 소라와 대하, 연어가 담겨 있다.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술은 샴페인도 아니요, 샤블리나 샤도네이 같은 화이트 와인도 아니요, 바로 보드카다. 굴과 샴페인이 안전한 선택이라면, 굴과 보드카는 신세계를 열어준다. 많은 셰프가 실제로 즐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단, 보드카가 아주 맛있어야 한다. 프랑스산 밀로 만든 프리미엄 보드카 그레이구스면 안심이다.

꽃처럼 맛있다

팀버 하우스+칵테일
G20이라는 태풍을 치러낸 파크 하얏트 서울의 바 팀버 하우스는 한층 여유로워졌다. 팀버 하우스는 한식을 비롯한 아시안 푸드를 꽤 진지하게 풀어내는 바 레스토랑이다. 바텐더는 늘 새로운 레시피에 골몰하고, 셰프는 보기 좋고, 맛도 좋은 제철 음식에 몰두해 있다. 많은 칵테일 중에 화요로 만든‘ 플라워’를 택한 것은 우리나라 술을 이용해 만든 칵테일이 이렇게 이국적이고 맛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살짝 계피향이 스치는 듯하지만 그것은 머들링한 식용꽃에서 우러난 독특한 풍미다. 흑설탕과 화요, 꽃, 라임, 부순 얼음이 어우러진 싱그러운 칵테일은 일조량이 떨어서 우울해진 마음을 다시 한껏 올려놓는다. 남해에서 올라온 고등어회와 고등어초밥은 혀의 미뢰를 하나하나 일으키고, 버터에 익힌 전복은 달고, 어두육미의 어원이 된 쫄깃한 살을 숨겨놓은 커다란 도미 머리 두 개는 빨리 먹을 수 없기에 더 느긋하다. 추천하고 싶은 또 하나의 칵테일은 ‘파라’라는 이름의 칵테일. 유산균 음료를 얼려 깎아낸 큰 얼음을 녹여가며 마시는 특별한 마티니로, 녹는 데만 1시간쯤 걸리기 때문에 빨리 헤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과의 술자리에 추천한다. 참, 12월에 막 첫 출근을 했다는 새 셰프가 배우 정찬을 닮은 훈남이다.‘파라’ 한 잔 더 시킬 수밖에.

당신은 모르는 곳

텐카이 + 샴페인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JJ 마호니스와 파리스 그릴을 수없이 드나든 사람도 모르는 곳이 있다. 바로 텐카이다. 텐카이는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일식당 아카사카에서 함께 운영하는 작은 술집이다. 독특하게 입구에서 모두 평등하게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호텔에서 신발 벗고 들어가는 술집이라니!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이곳은 그래서 퍽 로맨틱하다. 정중앙에선 셰프복을 단정하게 입은 셰프가 참숯에 온갖 꼬치를 굽고, 질 좋은 사시미와 튀김요리도 좋다. 편안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정찬인 음식을 내기에, 여느 이자카야와는 비교 불가의 맛이다. 흔하지 않은 전복과 장어 꼬치를 먹을 수 있는 곳도 이곳이다. 맥주보다 특별해지고 싶을 땐 샴페인을 시킨다. 사시미와 샴페인은 사케보다 더 훌륭한 매칭인데, 아름다운 보틀에 담긴 페리에주에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가자미를 통째로 튀긴 가라아게는 텐카이에서도 단골들만 시켜 먹는다. 셰프의 설명처럼 머리부터 꼬리까지 홀랑 다 먹을 수 있다. 튀김의 기름진 맛도 씻어주고, 사시미의 미묘한 맛, 꼬치구이의 터프한 맛까지 모두 살려주는 페리에주에는 역시 마성의 샴페인이다.

자리가 없습니다

스타셰프+진토닉
진토닉은 가장 고전적인 칵테일 중 하나다. 빌리 조엘의 노래 속에서 피아노맨에게 한 곡을 신청하는 남자가 마시고 있었던 것도 바로 진토닉이었다. 칵테일과 음식을 조화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 우리나라지만, 스타셰프 레스토랑은 예외다. 그곳에 가면 모두 테이블에 한없이 투명하고 푸른 봄베이사파이어 한 병씩을 올려두고 있다. 모두 김후남 셰프의 전도 때문이다. ‘진토닉의 깔끔한 맛이 어떤 요리의 맛도 살려준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라지만 셰프가 술 문화를 주도한 사례는 이곳이 유일하다. 셰프의‘심플하고 선 굵은 요리’는 아시안 푸드와 웨스턴 푸드를 넘나드는데, ‘사진발’ 잘 받는 웨스턴 메뉴 대신 굳이 아시안 푸드를 찍은 것은 너무 맛있어서 혼자 먹기 아까워서다.한 시간 이상 조리해 묵은지를 곁들인 부드럽고 개운한 삼겹살찜, 한입 먹으면 바삭함이 입안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북경식 탕수육, 고수를 듬뿍 넣은 해물라면이 그렇다. 주니퍼 베리를 비롯해 10가지 허브가 들어간 봄베이사파이어는, 토닉 워터와 레몬 조각만으로도 싱그럽고 상큼한 향을 즐길 수 있고, 먹다 남으면 가나다순으로 진열된 키핑 박스에 두 달 동안 재워둘 수 있다. 새벽까지 문을 열지만 사전 예약은 7시 반까지만 가능한데, 미안하지만 연말까진 모든 예약이 완료.

백 년 동안의 허기

시추안 하우스 + 중국술
맵싸한 고추 향기가 콧속을 파고든다. 마른 행주로 말린 태양초를 싹싹 문지르던 엄마 곁에서 언젠가 맡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달고 풍만한 향이다. 정통 사천 음식을 선보이는 시추안 하우스에서만 이 고추 향기가 제대로 난다. 중국에서도 내륙에 자리한 사천 지방은 겨울이 길고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기나긴 겨울을 나기 위해서 열이 많이 나는 매운 음식이 발달했다. 튀긴 닭 요리인 라즈지, 담백한 도미살을 가득 넣은 마라탕에는 약속이나 한 듯이 고추가 한 무더기다. 차가운 닭고기 요리인 샤오키와 정통 마파 두부는 누구나 한입 먹으면 반한다. 청양 고추, 사천 고추, 태국 고추, 랜턴 고추, 베트남 고추 등 다섯 가지 고추가 만들어내는 매운 맛의 향연. 사천요리에서 빠질 수 없는 산초가 만들어내는, 코가 뻥 뚫리는 얼얼한 맛은 중독성이 대단해서 먹고 돌아 나오면 또 먹고 싶어진다. 여름에는 칭따오 맥주를 곁들이고 겨울에는 백년고독을 곁들인다. 38도의 도수는 긴장되지만, 그 달고 풍만한 향기를 맡으면 말릴 수가 없다. 그렇게 또 하나의 겨울밤이 익어간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허윤선
    포토그래퍼
    정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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