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맨, 김래원

그는 목적이 없는 욕심이 얼마나 무의미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좋은 남자가 되고 싶다고 했고, 지키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많은 표정과 움직임이 없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 건 김래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웨터는 보테가베네타(Bottega Veneta).

스웨터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영화 <마이 리틀 히어로>의 개봉 날짜가 늦춰졌어요. 덕분에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되어서야 이렇게 만났네요.
아, 뉴욕 로케이션 촬영이 있어서, 그거 때문에 좀 늦어졌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더 잘된 것 같아요.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완성도 있게 나온 것 같아요. 즐겁게 탈 없이 촬영했어요. 현장 분위기도 무척 좋았고요.

드라마 <천일의 약속>이 끝나자마자 영화 촬영에 들어갔죠. 이제야 한숨 돌리는 건가요?
촬영은 끝났는데 후반 마무리가 안 된 상태라 마음 편하게 어딜 가거나 하지는 못했어요. 당분간은 홍보 활동하느라 바쁠 테고, 개봉을 하면 좀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에 연기한 유일한은 어떤 지점에서 당신의 마음을 흔들었나요?
시나리오를 봤을 때 유쾌하면서도 따뜻한 감동이 있었어요. 가장 큰 매력을 느낀 건 어린 친구와 함께 호흡을 맞춘다는 거였고요. 지대한 군과 연기를 하면서 하얀 도화지에 함께 그림을 그려나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 이미 색깔이 채워져 있잖아요. 다른 성인 배우도 마찬가지고요. 그걸 지우고 다시 채우는 게 아니라 대한이의 하얀 도화지가 채워지고 저 역시 그 색깔에 반응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대한이와 저는 환상의 호흡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 기대 이상이었어요.

그러한 느낌이 간절했던 순간을 떠올려본다면요?
전혀 슬픈 장면도 아니고, 울어야 하는 장면도 아닌데 대한이가 갑자기 오열을 하는 거예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제가 그 장면에 대해 생각한 감정이 있는데, 대한이의 오열로 인해서 그 감정들이 무너지는 거예요.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저 역시 제 안의 뭔가를 더 끌어내게 되는거죠. 계산되거나 만들어진 연기가 아닌, 생생한 감정을 끄집어내고 표현할 수 있었어요.

기자 간담회 때 지대한 군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죠. 대한 군을 다독이는 모습에서, 두 사람만의 우정 같은 게 느껴졌어요.
굉장히 감성적인 아이예요. 그러니 그 높은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이 되었겠죠. 제가 그 감정을 아는데, 그 자리가 낯설고 어려웠던 거예요. 자존심이 강한 아이인데 말을 못하는 자신이 싫고, 거기다 촬영할 때 힘들었던 시간을 물으니까 감정이 복받친 거죠.

이번 영화는 김성훈 감독의 입봉작이기도 하죠. 서로 의지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 같아요.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감독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한, 그분만의 특별한 리더십이 있었어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데 열려 있으면서도 중심을 잡고 있어 흔들림이 없어요. 편안한 상태를 유지시키면서 제게서 본인이 원하는 연기를 끌어내시더라고요. 굉장히 영민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스웨터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카디건은 시슬리맨(Sisley Men).팬츠는 엠포리오 아르마니(Emporio Armani).

스웨터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카디건은 시슬리맨(Sisley Men).
팬츠는 엠포리오 아르마니
(Emporio Armani).

유일한 앞에 ‘허세와 속물근성으로 똘똘 뭉친’이라는 수식어가 나와요. 이제까지 당신이 보여준 캐릭터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죠.
한물간 음악 감독, 유일한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우승해서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고 싶어 해요. 그런데 노래 외에는 별 특기가 없는 영광이와 한 팀이 되어 오디션을 치르게 된 거예요. 인생 역전을 꿈꾸는 중에 영광이라는 걸림돌을 만나게 되었으니 영광이를 굉장히 미워하죠. 감독님도 저도 그 부분을 너무 과하지 않게 조정하는 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속물, 허세, 그런 표현은 처음에는 없었고 나중에 만들어진 캐릭터예요. 단순히 영광을 미워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허세가 들어가면서도 유쾌하고 위트 있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풀어내려고 노력했죠. 끊임없이 수위를 조절해가면서 전체적인 이야기의 균형을 맞추려고 고민했어요.

예능 프로그램에 잘 나오지 않는 건 의도된 건가요?
오늘처럼 이렇게 인터뷰를 할 때는 말주변이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카메라를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건 좀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이번 영화 앞두고 몇 개 계획이 잡혀 있긴 해요.

일찍 연기를 시작했고, 무명시절이랄 것도 없이 주목을 받았어요. 걸어온 길에 만족하나요?
내 청춘을 연기에 바쳐서 아쉽다거나 그런 생각은 없어요. 할 건 다 했고,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지냈던 것 같아요. 사실 <옥탑방 고양이> 이후에 제가 없었던 시간이 잠깐 있었어요. 그냥 대중이 바라는 스타로 지냈던 것 같아요. 곧 빠져나오긴 했지만요. 아,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원로 배우같네요. 나이 든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거 싫은데.

어느 순간 장난기 넘치던 표정을 거두고 진지한 남자가 되었어요. 물론 캐릭터의 영향이 크겠지만요.
20대 초반부터 30대 연기를 했어요. 굳이 그런 작품을 찾았던 것 같아요. 무모할 정도로 패기와 열정이 넘치는 역할은 사실 그때 아니면 못하는 것들인데, 그때는 더 어른이고 싶고 더 큰 남자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야 아는 것들이죠.

그걸 알게 된 지금이라서 욕심 나는 역할이 있다면요?
이번 영화에서의 유일한이 제가 찾던 캐릭터였어요. 지대한 같은 파트너를 만나 호흡을 맞춘 것도요.

데뷔할 때만 해도 지금까지 이렇게 배우로 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겠죠?
어렸을 때 제가 연기를 참 못했어요. 난 정말 이거밖에 안 되는 걸까, 하며 괴로워했죠. 그 괴로운 와중에 오기가 생겼어요. 다른 일들은 웬만큼 하면 1등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이 보여요. 그럼 딱 내려놓거든요. 그런데 연기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1등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고, 이를 악물고 했어요.

당신을 보면 아직도 <눈사람>의 차성준이 생각나요. 치기 넘치는데 온전한 남자이기까지 했죠.
차성준은 다시 해보고 싶은 역할 중 하나예요. 제가 22살 때 그 역할을 했거든요. 그것도 30대 역할이었어요. 멋있는 남자였는데 그땐 아마 멋있는 척이었겠죠. 지금 하면 척이 아니라 진짜 멋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공효진을 벽으로 밀어붙이면서 하는 대사 “내가 힘이 없어서 이러는 줄 알아?”가 압권이었죠.
아, 뭔지 알아요. 제가 했던 것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데 그 장면은 기억해요. 그 감독님이 지금은 은퇴하고 미국 가셨는데 제게 맨날 ‘너 나이 속였지?’ 그랬어요. 제가 좀 조숙하긴 했나 봐요. 그 장면을 기억하다니, 제가 고맙네요.

최근에 당신에게 일어난 사건 중에는 어떤 걸 기억하나요?
조인성 씨를 자주 만나요. 예전부터 친구하자면서 가끔 연락만 하다가 군대 다녀와서 느지막이 친구가 되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술도 마시고 이런저런 얘기도 하는데 그 친구를 만나는 시간이 참 좋아요. 배려심도 있고 카리스마도 있고, 동지로서 함께 가는 든든한 느낌이 있어요.

어떤 모습의 내가 되어야겠다, 라고 다짐하는 게 있나요?
후배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목적이 없는 욕심이 많아지는 것 같다고요. 정말 그래요. 그래서 그걸 잘 구분해서 걷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목적 없이 그냥 단순하게 ‘이게 갖고 싶다’, ‘이 작품에서 내가 잘되고 싶다’, ‘영화를 천만 관객이 봤으면 좋겠다’ 같은 생각들 말이에요. 그걸 통해서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게 뭔지, 어떻게 하면 진짜 행복해질 수 있는 건지 고민하는 시간이 늘었어요.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요.

코트는 곽현주(Kwak Hyun Joo).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슈즈는로맨틱 무브(Romantic Move).

코트는 곽현주(Kwak Hyun Joo).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슈즈는
로맨틱 무브(Romantic Move).

그렇다면 당신에게 목적이 있는 욕심이란 어떤 건가요?
좋은 작품을 만나는 거요. 계속 성장하고 싶고, 인간적이고 싶고, 더 굵고 깊이 있고 싶고, 또 그런 역할을 만나고 싶어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은퇴하기 전까지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작품을 한두 편 남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배우로 15년 정도 활동했는데 아직까지는 그런 작품이 없었어요. 모두가 인정을 하지는 않더라도 제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작품을 만나면 진심으로 행복할 것 같아요.

서른두 살의 남자로서는요?
가정에 대해 생각을 하죠. 20대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통도 크고 누가 어렵다 하면 쉽게 돕기도 하고. 그때는 버는 돈에 대해서 개념이 없었어요. 이제는 미래에 대한 설계를 하는 건 당연한 것 같고, 좋은 배우이면서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그게 정말 중요해요. 저에게는.

어떤 여자를 만났을 때 좋은 남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나요?
완벽한 여자를 바라는 것 같지만 또 어떻게 보면 그게 아니에요. 먼저 여배우 같은 외모를 바라는 건 아니고요. 옛날 여자친구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예전에도 그렇게 외모를 보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분위기 있고, 자신만의 매력이 있으면 돼요. 확실히 여성스럽고 고상한 스타일보다는 밝고 현실감 있고, 친구 같은 그런 사람이 좋아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것만큼은 공유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하는 게 있다면요?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어요. 같이 영화를 보면 영화에 대한 각자의 느낌이 있잖아요. 저는 영화에 대한 잔상이 남아 있고, 그걸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데 같이 본 친구가 여주인공이 입은 옷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예전에는 그래도 예쁘면 용서가 되는 게 있었다면 이제는 예뻐도 용서가 안 되는 게 있는 거죠. 아, 제가 너무 솔직했나요? 하하.

    에디터
    조소영
    포토그래퍼
    이정훈
    스탭
    메이크업 | 나래(에스휴뷰티살롱), 헤어 | 백가영(에스휴뷰티살롱), 스타일리스트 | 김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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