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에서 삼시세끼 <2>
고창 황토밭엔 돌만 심어도 작물이 자란다. 고창의 비옥한 땅을 가리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모든 게 가장 무성한 계절, 그 풍요로운 땅을 밟았다. 튼튼하고 건강한 고창식 삶의 방향을 찾아서.
삼시세끼 구경
어디를 가도 푸르른 풍경과 한가한 도로 때문에 넓게 느껴질 뿐, 고창은 크지 않은 동네다. 고창까지 왔으니, <삼시세끼 고창편>의 촬영지인 송곡리를 들러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어 마을 노인정 앞에 차를 대고 굽이굽이 좁은 길을 걸어 올랐다. 어느새 다 자란 오리형제들을 멀찌감치서 지켜본 뒤, 근처 시내인 혜리읍의 중식당에 가서는 출연진들이 먹은 ‘특짜장’ 도 주문했다. 매콤한 짬뽕 소스와 짜장 소스를 잘 섞어 후루룩 먹어보니 꽤 별미였다. 풍천장어는 아직 먹지도 못했는데 1박 2일만 머물기에는 먹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고창 사람들은 전라도에서도 유별나다고 할 정도로 고집이 있다고 해요. 그런데 이게 농사에도 반영되는 것 같아요. 흔들리지 않고 소신 있게 농사짓는 분들이 유독 많다고나 할까요?” ‘마켓 레이지 헤븐’의 안리안 대표의 말이다. 마켓 레이지 헤븐은 고창의 농가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알리고 판매한다. “사람들은 백화점이나 고급 식료품점에 납품되는 농산물이 가장 좋은 농산물일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곳들은 그만큼 수수료가 높아서 웬만한 농가는 감당하지 못해요. 덜 알려졌지만, 정말 좋은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들을 찾고 있어요. ‘사람 입에 들어가는 것을 만드는 데 농약을 치겠냐’고 말하는 분들이 정말 계시거든요”. 자부심을 갖고 농사를 짓는 농가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신뢰와 유대감이다. 처음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서 5분이 늦었다고 크게 혼난 적도 있다. 20대 때부터 농사일과 작물에 관심이 많았던 두 대표가 운영하는 마켓 레이지 헤븐의 현재 활동은 크게 두 가지. 계절에 맞춰 엄선된 농산물을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소비자에게 배달하는 ‘마켓 레이지 헤븐 꾸러미(이하 꾸러미)’와 고창에서 공연과 간단한 식사, 제철 농산물을 비롯한 다양한 소품을 판매하는 ‘마켓 레이지 헤븐’ 두 가지다. 올해 ‘마켓 레이지 헤븐’은 두 번의 행사를 치렀고, ‘꾸러미’는 얼마 전 세 번째 발송을 마감했다. 두 젊은 대표에게 듣는 농사는 재배뿐 아니라 판매까지 해야 완결되는, 또 다른 일이었다. 날씨의 영향을 받다 보니 당연히 변수도 많다. 우리가 가장 쉽게 농산물을 만나는 대형마트와 계약 재배를 맺고, 수요를 딱딱 맞출 수 있는 농가는 일부에 불과하다. “정말 맛있는 고구마를 재배하는 농가를 발견했는데 ‘꾸러미’의 발송 날짜에 맞춰 배달할 수 없게 됐어요. 고구마를 캐는 일은 대부분 할머니들이 하시는데 폭염이 온 거예요. 결국 수확을 일주일가량 미루시더라고요.” 아스파라거스 길이의 비밀도 들었다. 유통되는 아스파라거스의 길이는 25cm로 규격이 정해져 있는데,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규격만큼 자란 순간 바로 잘라 출품하다 보니 속이 끝까지 꽉 찬 아스파라거스를 찾기 힘들다는 것. 하지만 ‘꾸러미’에 포함된 아스파라거스는 넉넉하게 자란 것을 25cm 길이에 맞춰 잘라내 훨씬 달고 알차다. 들으면 들을수록 농사라고 하면 벼, 감자, 배추 등 몇몇 작물만 막연하게 떠올렸던 게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작물 종류도, 품종도 다채로웠다. 궁금해졌다. 마트 쇼핑몰에 들어가 클릭 몇 번만 하면 식재료가 집 앞까지 배달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소비일까? 이렇게 자부심을 갖고 좋은 농산물을 키우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벌어짐에도 무작정 ‘외식’에 기대는 식사 습관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닐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인생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팽개치고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제철 나물과 작물이 풍성한 농가 식당에서의 저녁상이 내 앞에 차려졌다.
고창의 건강한 기운
다음 날 아침, 근처 ‘맛집’에서 식사를 해결하자는 생각을 버리고 과감하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제 상하농원에서 선물 받은 농산물을 꺼냈다. 수박을 자르고, 빵과 소시지도 굽고 달걀은 삶고 부쳤다. 복분자와 블루베리를 씻어 소쿠리에 담고 잼도 식빵에 듬뿍 펴 발랐다. 딱히 엄청난 식사를 차린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오랜만에 내가 먹을 것을 내가 차렸다는 것, 그리고 사용한 재료가 모두 신선하고 믿을 만한 것이라는 게 묘한 기쁨을 주었다. 마침 TV에는 <삼시세끼 고창편>이 나오고 있었다. 차승원처럼 복분자로 아이스크림을 뚝딱 만들고, 겉절이와 나물을 쉽게 무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TV 속의 ‘세 끼’ 중 ‘한 끼’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사방이 푸르고 모든 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고창에서하 룻밤을 지내고 난다면.
고창에서 왔어요
상하농원 홈페이지(www.sanghafarm.co.kr)에서 유정란과 잼, 소시지를 주문하면 이틀 뒤면 받을 수 있다. 4만원 이상 주문 시 배송비는 무료. 유정란은 정기 배송 신청도 가능하다. 마켓 레이지 헤븐의 소식은 홈페이지(understandcreative.co.kr)에서 확인하길. 지난 7월 말 발송된 세 번째 꾸러미에는 복숭아, 수미 감자, 양파, 아로니아, 아스파라거스, 호랑이콩, 고구마젤리, 그리고 백미 1kg이 포함됐다. 모든 재료는 유기농법으로 재배됐다. 양쪽 모두 맛은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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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이마루
- 포토그래퍼
- Cha Hye K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