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오래되고 새로운
3년 전, 양림동에서 근대건축물 여행을 떠났던 <얼루어>는 다시 짐을 꾸려 광주로 향했다. 그 사이 광주에 새로운 곳들이 생겨났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곳이 멋지게 공존하는 오늘 광주.
버스로 떠나요. 난생처음 스마트폰에 고속버스 앱을 깔면서 생각해보니, 지방 촬영을 제법 많이 했지만 버스를 타는 건 처음이었다. 광주는 운전을 해서도, KTX를 타고서도 갈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속버스를 선택한 것은 지난 11월 말 처음 시작된 ‘프리미엄 우등 버스’가 궁금해서였다. ‘버스계의 퍼스트 클래스’라는 소문은 과연 사실인가. 현재 서울-부산, 서울-광주 구간을 운영 중인 프리미엄 우등 버스는 KTX와 경쟁하기 위해 만든 고속버스 업계의 야심작이다. 최대6 10도까지 좌석 등받이를 뒤로 젖힐 수 있고, 등받이와 발판 등을 버튼으로 조정할 수 있다. 좌석 수는 28인승인 우등버스보다 적은 21개. 그만큼 개인 공간이 넓어졌다. 특히 광주행은 부산행보다 자주 운행해서,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 호남선에서 밤 시간을 제외하고 매시 출발한다. 기대감 속에 탑승한 프리미엄 우등버스. 새롭게 시작하는 만큼 운전기사도 친절하고, 차 안도 쾌적하다. 등받이를 젖히면 뒷좌석 승객이 불편한 기존 고속버스와 달리 코쿤형으로 개별 공간을 확보해, 뒷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다. 또 모든 좌석에 가림막 역할을 하는 커튼을 설치해 개별성을 확보했다. 탑승 후에는 일회용 슬리퍼와 안대, 이어폰을 제공하기도 한다. 신발을 벗고 일회용 슬리퍼를 신으니 정말 비즈니스 클래스 같은 기분이 들긴 했다. 부산이 고향이라 우등 버스를 종종 탄다는 사진가는 뛰어난 만족감을 표시하곤 10분 안에 잠들었다. 커다란 모니터로 영화와 TV를 볼 수 있는 것도 장점. 지금은 별다른 콘텐츠가 없지만 점점 늘어날 것으로 기대해본다. 스마트폰 세대에게 가장 좋은 건 USB 포트를 활용해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다는 점이다. 3시간 30분이 지난 후 광주에 도착했다. 광주행 프리미엄 우등버스의 가격은 3만3천9백원. 밤 10시 이후에는 10% 심야 할증된다.
펭귄과 시계가 있는 마을
양림동은 광주로 여행을 떠난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르는 곳이다. 양림동, 당시 양림리는 광주에 도착한 미국인 선교사가 자리를 잡은 곳이다. 유스퀘어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잡은 택시 기사는 “양림동은 그러니까 점잖은 동네여”라고 설명했다.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의 가혹한 시절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지식인들이 숨어들기도 했다. 그 시절은 지금도 여러 근대 건축물로 남았다. 1911년에 완공된 수피아 여학교,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인 우일선 사택, 오웬 기념관과 구한말에 건축된 주택인 이장우 가옥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점잖은’ 동네에 나타난 펭귄마을은 도대체 무엇일까? 펭귄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푯말이 서 있는 오래된 담벼락에는 오래된 벽시계가 달려 있다. 집 안에 두곤 하는 커다란 벽시계가 걸린 담벼락은 꽤나 고풍스러운 멋을 자아내는데 그 담벼락 앞에는 푸성귀 등을 재배하는 텃밭이 있다.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갈수록 담벼락은 점점 더 다양한 표정을 드러낸다. 괘종시계, 오래된 그림, 한 20년 전쯤 유행한 퀼트 액자, 빛바랜 거울, 역시 아주 오래전 유행한 황동 장식품들이 누군가의 손길로 아무렇게나 걸려 있다. 펭귄 장식품과 시계는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작은 골목이 끝나면 슈퍼 앞이 나온다. 그곳에는 한 뼘만큼의 빈 공간도 없이 수십 개의 시계가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밖에 공터나 정원에도 수집품이 한가득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때 우리 집에도, 친구 집에도 걸려 있었던 것들. 집주인의 안목을 뽐냈던 그 많은 장식품들은 어디 갔을까? 모두 이 마을로 흘러 들어와 자리를 잡은 듯했다. 펭귄마을은 수집과 공예를 좋아하는 마을이장님의 솜씨라고 한다. 덕분에 이곳은 인스타그래머가 사랑하는 광주의 명소가 되었다. 사진을 찍다 보면 또 무엇인가를 뚝딱 만들고, 쓸고 닦는 이장님을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충장로에 남은 것
충장로에는 광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추억을 쌓아둔 장소가 있다. 궁전제과와 광주극장이 그것이다. 이들이 위치한 충장로는 광주의 명동으로 불리는 곳으로 광주 문화의 중심이기도 했다.“ 궁전제과 앞에 삼복서점이라는 큰 서점이 있고, 그 옆 사거리에는 25시음악사라고 음반집이 있었죠. 거길 우체국 사거리라고 불렀어요.” 광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시인 서효인의 말이다. 음반사가 사라진 후 서점도 사라졌고, 지금은 궁전제과만 남았다. 1973년에 문을 연 궁전제과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꽤나 호기심이 동하게 하는 타이틀인 ‘전국5대빵집’으로 불리며 유명해졌다. 리본 모양의 페이스트리인 나비빵과 빵 속을 파내고 달걀 샐러드를 채운 공룡알이 인기지만 무심코 집어 든 부추빵과 팥빵도 꽤나 맛있다. 충장로 한복판에 있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빵과 커피 등을 즐기다가, 종이쇼핑백 안에 빵을 가득 담아 다시 어디론가 향한다. 서효인 시인은 광주에 가면 꼭 광주극장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면 여덟 명 정도가 영화관에 앉아 있는데 어쩐지 낯이 익어요. 그리고 그날 저녁 어느 술집에 가면 또 그들과 마주칩니다. 독립 영화를 보고, 시를 읽고 철학 세미나 등을 하는 사람들이 갈 곳은 지방에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죠.” 문학평론가로, 역시 광주에서 태어난 김형중의 에세이인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는 광주 시민의 눈으로 본 광주를 차분하게, 때론 능청스럽게 소개한다. 이 책에서도 광주극장은 빠지지 않는다.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면 검표소가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여전히 종이로 된 영화표를 판매한다. 매표원은 낯익은 얼굴일 때가 많다. K의 제자이거나 제자의 친구이거나, 어쨌든 여차저차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젊은이다. 광주가 좁아서이기도 하지만, 광주극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뭔가 이상한 취향의 연대 같은 걸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 광주극장은 1935년에 문을 연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상당히 큰 규모지만 단일 상영관을 고수하고 있다. 이제는 어렴풋한 극장의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오래된 매표소며, 화가가 그린 포스터같은 것들이 그렇다. 2층에는 오래된 포스터와 영사기를 볼 수 있다. 현재는 예술영화관으로 운영 중이다. 오래되었지만 광주극장의 자부심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타임머신을 탄 1913 송정역 시장
아직 광주의 택시 기사들은 이곳을 잘 모른다. 송정역 시장에 가자고 하면, 오일장인가 삼일장인가를 묻는다. 하지만 우리가 가려는 곳은 다시 태어난 ‘1913 송정역 시장’이다. KTX가 서는 송정역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만날 수 있는 송정역 시장의 원래 이름은 ‘송정역전 매일 시장’이었다. 양동시장, 대인시장과 함께 광주의 전통시장으로 유명했던 이곳은 1990년대를 지나면서 쇠락하기 시작한다. 시장은 상인과 손님이 많아야 신이 나고 흥한다. 불이 꺼진 상점이 늘어날수록 남은 상점가는 쓸쓸해지기 마련이고 시장 특유의 생기를 잃는다. 그 시장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자는 취지로 ‘광주창조경제혁신센터’와 현대카드가 함께 작업한 결과물이 올해 4월 문을 연 ‘1913 송정역 시장’이다. “시장의 빈 점포 14곳을 청년들에게 내어준 것이죠. 기획서를 제출해서 채택된 14곳이 새로운 가게고 나머지는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가게들이었습니다.” 김부각과 수제 식혜로 유명한 ‘느린먹거리’ 노지현 대표의 설명이다. 이곳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가게들과 새로 입점된 가게들은 한눈에도 구별할 수 있다. 오래된 가게에는 영광굴비나 오리, 들깨와 같은 식료품을 주로 판다. 미용실이나, 의상실도 있다. 시장은 오래된 가게에도 이야기를 불어넣는 걸 잃지 않았다. ‘서울에서 미용을 배우고 온 사장님이 운영하는 동네 사랑방’이라는 개미미용실이나, ‘감칠맛으로 으뜸인 생젓갈 끓여드려요’라는 옥정젓갈 같은 곳이 그렇다. 그 사이사이 새로운 가게도 눈에 띈다. 이 새로운 가게들이 1913 송정역 시장의 지금 인기를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우선 취재진을 반겨준 느린먹거리의 김부각은 주문량이 판매량을 따라가지 못하는 까닭에 매장에서는 시식만 가능하다. 이곳을 운영하는 젊은 부부도 지금의 인기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그래서 놀고 있는 넓은 가게 공간을 활용해 부각 클래스 등을 열어볼까 한다고 하니, 이곳에서 직접 김부각을 배워볼 수도 있겠다. 자주 동이 나서 시간을 맞춰야 하는 또야 식빵, 고로케 삼촌, 갱소년은 시장의 인기 점포 중 하나다. 시장 중간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기 시작하면 빵과 고로케가 나오는 시간이다. 갱소년의 양갱은 하루 두 번 나온다. 오전에 만든 양갱이 전부 판매되면 저녁 6 시가 되어야 다시 맛볼 수 있다. 과일 등을 이용해 여덟 가지 맛의 양갱을 맛볼 수 있다. 동그란 모양으로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많다. 또한 이곳의 팝업 스토어인 ‛누구나 가게’에서는 누구나 신청을 하면 평일 하루 1만원에 가겟자리를 빌릴 수 있다. 시장놀이를 하다가 기차를 놓치지 않도록 시장 중간에는 대합실이 있다. 이곳에서는 현재 시각과 함께 열차 이름, 열차 번호, 출발시간과 플랫폼을 안내하고 있다. 광주식 국밥을 맛보고 싶다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영명국밥과 현대국밥집의 문을 열면 된다. 광주식 국밥은 돼지고기와 부속물을 이용하지만 안에 콩나물이 가득 들어있는 맑은 국밥이 특징이다. 머리고기와 순대, 수육과 함께 국밥 한 그릇을 말아 먹으면 빨갛게 언 코끝이 금세 녹는다. 멋진 사람들과 멋진 이야기가 가득한 1913 송정역 시장. 덕분에 쇠락하던 시장은 살아나고, 멀리서 기차며 버스를 타고 방문하는 광주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해피엔딩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이곳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해갈 수 없었다. 사람들이 찾는 곳은 그럼에도 오래된 상점보다 새로운 상점이고, 건물주는 더 높은 수익을 위해 오래된 가게를 내보내고 새로운 가게를 받아들인다. 새로운 시장도 그런 시장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장이 처음 생겼을 당시 만든 팸플릿을 보면 이미 몇 곳의 가게가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침구집과 한복집, 몇 곳의 식료품 상점이 그렇게 사라졌다. 시장의 새로운 고민이 생긴 것 같다. 모쪼록 1913 송정역 시장이 ‘오래오래 상인들과 손님들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이야기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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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허윤선
- 포토그래퍼
- Cha Hye K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