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박의 봄날
꽃이 활짝 핀 담벼락 앞에 선 윤박의 낭만적인 순간을 포착했다. 봄의 감성으로 가득 찬 배경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연기와 청춘,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최근 드라마 <내성적인 보스>를 끝낸 윤박은 이미 작년 말 촬영을 마친 <더 패키지>의 편성을 앞두고 있다. JYP픽쳐스에서 제작한 웹드라마 <마술학교>는 곧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고, 작품을 쉬는 동안 서너 개의 예능 프로그램을 찍었다. 이렇듯 윤박은 쉼 없이 TV에 얼굴을 비쳤다. <가족끼리 왜 이래>의 차강재, <여왕의 꽃>의 박재준처럼 그가 맡았던 역할에서 자연스레 유추되는 단어는 날카로움, 댄디함, 부드러움 같은 것들이었는데 실제로 만난 그는 장난기가 넘쳤고 유쾌했다. 낮은 목소리와 발랄한 웃음소리가 오후 내내 골목을 맴돌았다. 촬영을 위해 올라간 어느 담벼락 위에서 쪼그려 앉아 웃고, 바닥에 떨어진 꽃송이를 머리에 꽂고 배시시 웃어 보이는 그를 좋아하지 않기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을 거다. 촬영을 끝내고 조용한 카페로 가서 윤박과 마주 앉았다.
ㅡ얼마 전 드라마 <내성적인 보스>가 끝났어요. 요즘 뭐 하고 지내요?
개들 돌보고,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간간이 예능도 찍었어요. <런닝맨>부터 <편의점을 털어라>, <내 귀에 캔디>, <수요미식회>까지 찍었네요.
ㅡ요즘 화제의 중심에 있는 <내 귀에 캔디> 촬영은 어땠어요?
찍으면서 정말 여러 감정을 느꼈어요. 설레고, 행복하기도 했고 또 슬프기도 했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도 있었고요. 실제 연애할 때의 감정을 되게 많이 느꼈어요.
ㅡ전화 통화만으로 몰입이 되던가요?
되던데요? 그래서 촬영 끝나고 피디님한테 그랬어요, 이런 프로그램을 왜 만들었냐고.(웃음) 이건 실제로 겪어보지 않으면 못 느낄 감정이에요.
ㅡ<아버지와 나>, <집밥백선생> 등 고정으로 참여한 예능도 많고 <라디오스타>, <런닝맨> 등 단발로 출연한 예능도 많아요. 예능 촬영을 즐기는 편인가요?
대체로 편하고 재미있었지만 고정 출연할 때는 좀 힘들었어요. 게스트로 나가면 그 회만 즐기고 오면 되지만 고정을 맡으면 좀 부담이 돼요. 출연자마다 각자의 역할이 있잖아요. ‘이 프로그램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하고 생각하게 되죠. 말을 조리 있게 하거나 재미있는 사람도 아닌 것 같아 위축되기도 하고요.
ㅡ최근 촬영했던 예능 중에서 어떤 프로그램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뭐 하나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다 재미있었어요. 사실 <내 귀에 캔디>는 좀 부담스러웠어요.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에 대해 기대하는 게 있잖아요. 특히 남녀의 로맨틱한 장면들? 저는 막 멋있게 리드하는 성격이 못 되거든요. 그래서 걱정이 많았어요. 작가님과 미팅할 때도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제가 이 프로그램을 잘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죠. 촬영할 때는 그냥 제 평소 모습대로 했어요.
ㅡ사전 제작 드라마 <더 패키지> 촬영차 프랑스에 다녀왔다고 들었어요. 어땠어요?
한국에 오고 싶었어요.(웃음) 여행으로 간 게 아니고 일로 간 거니까요. 그리고 한곳에 오래 머물며 촬영을 해서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죠. 그나마 제가 분량이 많지 않아서 다른 배우들보다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닌 거 같아요. 왜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보라고 하는지는 좀 알겠더라고요. 말도 안 통하고 낯선 곳이지만 막상 부딪히니까 다 하게 되던데요? 그래서 말도 통하고, 아는 사람도 많고, 길도 잘 아는 한국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이 배웠죠.
ㅡ프랑스 어디에 있었어요?
몽셸미셸에서 3주 있었고, 도빌에서 1주일, 마지막에 파리에서 한 열흘 정도 있었어요.
ㅡ프랑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어요?
미술관에 혼자 간 적이 있어요. 보통 전시를 보러 가면 정말 빨리 보는 사람이나 천천히 보는 사람 아니고서야 보는 속도가 거의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외국 여성분이랑 전시를 보는 내내 눈이 마주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운명적인 사랑이 이루어지나?’ 그랬는데 용기가 없어서 말을 못 걸었어요. 타지에서 낯선 사람과 교감을 했다는 게 좋았어요.
ㅡ또래 배우들과 함께여서 친해졌을 거 같은데, 호흡은 잘 맞았어요?
엄청 친해졌어요. 촬영에 지장 없는 선에서 밤마다 술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요. 사실 거기서 만날 사람이 출연자들밖에 없잖아요. 촬영 끝나고 한국 와서도 맨날 보자고는 하는데 각자 스케줄이 있으니까 아직 못 만났어요.
ㅡ여행은 좋아하는 편이에요?
아뇨, 사실 20대에 여행을 많이 못한 게 아쉬운 부분 중 하나예요. 학창 시절에는 여행은 노는 것이라 생각해서 방학 때도 항상 친구들과 모여서 연극 만들고 그랬거든요. 그땐 놀면 내가 뒤처지는 거 같았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여행이 주는 소중함을 몰랐던 거죠.
ㅡ작품을 선택할 때에는 무엇을 중점적으로 봐요?
예전에는 대본만 좋으면 그냥 다 했거든요. 캐릭터가 그냥 그래도 대본이 좋으면 작품을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내가 잘할 수 있고, 재미있게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를 선택하고 싶어요. 용기를 얻고 싶은 거죠. 내가 자연스레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을 맡아서 자신감도 얻고 싶고 좋은 평가도 받고 싶어요. 물론 쉬운 건 없지만요.
ㅡ드라마가 방영된 후에 대중의 반응을 신경 쓰는 편이에요?
네, 다 찾아봐요. 냉혹한 평가도 많거든요. 내가 부족하고 채워야 할 것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돼요. 오히려 저는 칭찬을 잘 못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ㅡ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시작했는데 현장을 처음 갔을 때 뭔가 다르던가요?
처음에는 시스템에 적응하는 게 힘들었어요. 카메라가 있고, TV에서 보던 선배들과 연기를 하는 게 낯설었죠.
ㅡ더 일찍 데뷔할걸 하는 생각이 든 적은 없어요?
제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연기를 처음 시작한 건 유명해지고 싶어서였지만 연기를 하다 보니 스타가 되는 것에 대해선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냥 여든 살까지 쭉 연기하는 게 꿈이에요. 군대나 학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끙끙대는 사람들 많잖아요. 대학도 바로 졸업하고, 군대도 빨리 갔다 왔으니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죠.
ㅡ늦었다고 생각하거나 조바심이 들진 않았나 봐요.
사실 졸업하기 직전에는 무서웠어요. 막상 졸업할 때가 다가오니까 ‘졸업하고 어떻게 해야 하지’ 하며 고민되더라고요. 바로 작품을 하게 돼서 다행이었죠. 감사했어요.
ㅡ연기를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적은 언제예요?
만약 A라는 감정이 있으면, 굳이 A라는 감정을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니어도 연기를 했는데 딱 A가 나왔을 때 희열을 느껴요. ‘내가 진짜 이 캐릭터와 하나가 됐구나’라고 느낄 때가 있거든요. 그건 모니터를 따로 안 해도 연기하고 나서 딱 알아요.
ㅡ그렇게 기억되는 장면이 있어요?
<가족끼리 왜 이래>에서 삼남매가 과거에 아버지에게 영상을 남기는 장면이 있어요. 그걸 찍다가 아버지가 밥 먹으러 들어오라고 해서 형식이와 현주 누나가 들어가고 제가 혼자 남아서 아버지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 장면 찍을 때 내가 정말 차강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어서 연기하는 데 희열을 느꼈어요.
ㅡ다음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나는 역할이나 캐릭터는 어떤 거예요?
망나니, 백수 삼촌 이런 거 하고 싶어요.(웃음) 뭔가 중심 없고, 생각 없는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별로 안 꾸며도 되는 역할 같은 거요. 정장도 그만 입고요.
ㅡ배우로서의 모습과 평소 자신의 모습은 많이 다른가요?
비슷한 거 같아요. 어쨌든 인간 윤박도 사람들과 만나면서 살고, 배우 윤박도 사람들과 부딪히며 일하잖아요. 그래서 크게 다른 건 없어요.
ㅡ인간 윤박은 어떤 사람이에요?
즐겁게 사는 게 좋은 사람.
ㅡ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즐거움인가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뭐예요?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요. 건강해야 밝게 생각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즐거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어릴 때도 아프거나 상처 받은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밝게 보이려고 했어요. 그렇게 살다 보니까 스스로 그렇게 변한 거 같기도 해요.
ㅡ그럼 혼자 있을 때 우울해지지 않아요?
강아지랑 있어서 괜찮아요. 강아지들과 대화를 할 수 있거든요. 제가 일방적으로 말을 거는 거긴 하지만.(웃음)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친구들과 술 마시고 영화 보고 그래요. 혼자 외롭게 있으려고 한 적이 없는 거 같아요. 그런데 이런 성격 때문에 오히려 연기할 때 가끔 힘든 부분이 있더라고요. 너무 밝게 보이려고만 하니까 그 반대의 감정을 감추고 살아서 어두운 감정을 표현하는 데 버거움을 느끼는 거예요. 배우는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ㅡ이제 봄이 왔어요. 봄에 가장 하고 싶은 건 뭐예요?
연애요. 그리고 야구장 가기.
ㅡ야구 좋아해요?
네, 엄청 좋아하죠. 사회인 야구도 해요, 잘은 못하지만. 야구장에 자주 가고 싶은데 막상 그러지는 못해요. 많이 가면 1년에 두세 번? 지난해 프랑스 갔을 때가 아마 플레이오프할 때였을 텐데 거기서도 그 느린 3G로 보겠다고 붙잡고 있었어요.
ㅡLG트윈스의 팬이죠?
네. 지금 1등이에요.
ㅡ그 성적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잡지가 5월에 나오죠? 5월에는 몇 위일까….(웃음) 근데 순위에는 별로 연연하지 않아요. 잘하면 좋죠, 당연히. 하지만 못한다고 해서 뭐 달라지진 않아요. 왜냐하면 성적은 포기했거든요.
ㅡ인생에 봄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저는 지금이 봄인 거 같아요. 사람이 살면서 목표를 세우잖아요. 그런 걸 하나하나 이뤄가고 있거든요.
ㅡ최근에 이룬 목표가 있어요?
최근은 아니고 작년에 아버지께 차를 사드렸어요. 이제 다음 목표는 전셋집을 마련하는 거예요. 집이 비싸더라고요. 그걸 이루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기겠죠? 연기자로서의 목표는 또 다르지만요.
ㅡ연기자로서의 목표는 뭐예요?
크게 보면 연기를 80세까지 하는 거고, 작은 목표는 제 자신과 비슷한 결을 가진 인물을 맡아서 자유롭게 연기해보고 싶어요.
ㅡ올해로 서른하나가 됐어요. 기분이 어땠어요?
아무렇지 않았어요. 장난으로 ‘아, 이제 서른 됐어. 벌써 서른하나야’ 이런 말은 하는데 별 거 없던데요? 그런 건 있어요. 서른 중반까지는 결혼하고 싶은데,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나중에 마흔쯤 되면 기분이 이상할 거 같아요.
ㅡ그 때 결혼하고 싶은 이유가 있어요?
만약에 배우 안 했으면 벌써 결혼했을 수도 있었을 거 같아요.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요새 부쩍 더 들어요.
ㅡ20대 초반에도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자친구 만날 때마다 진짜 이 사람이랑 결혼할 거라 생각했어요, 늘.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제 그런 마음으로 연애를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ㅡ20대를 돌아봤을 때 가장 뿌듯한 게 있어요?
대학에 들어간 거요. 꿈꾸던 데에 들어갔거든요. 내가 가고 싶어 하던 학교와 과에 갔다는 게 의미 있는 일이었어요.
ㅡ대학 생활은 꿈꿔온 대로였나요?
즐거웠어요. 학교 생활이 막 대단한 것도 아니었지만, 왜 이럴까? 그러지도 않았고 그냥 즐겁게 다녔던 거 같아요.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데 ‘좀 더 열심히 해볼걸, 집중을 더 해볼걸’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해요.
ㅡ반대로 좀 후회되는 것도 있어요?
이런 말은 상대에게 미안한 말일 수도 있는데 진짜 미치도록 아픈 사랑을 못해본 거요. 한 사람 때문에 몇 날 며칠을 울고, 앓고 그런 엄청 아픈 사랑을 못한 게 후회돼요.
ㅡ20대에 가장 고민한 건 뭐였어요?
연기자로서 살 수 있을까? 내가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까? 이건 학교 다닐 때도, 데뷔를 하고 나서도 그랬어요. 일을 꾸준히 하면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직업과 관련한 걱정을 많이 했어요.
ㅡ답은 찾은 것 같나요?
아직도 찾고 있어요. 30대의 고민도 여전히 같아요.
ㅡ치열하게 살고 있는 청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합법적인 선에서 하고 싶은 걸 다 해봤으면 좋겠다는 것. 어제도 친구들이랑 그런 얘기를 했는데 20대는 그냥 뭐든 도전할 수 있는 나이인 것 같아요. 옛날에 어른들이 ‘뭐라도 할 수 있는 나이야’라고 말할 때 공감이 안 됐거든요? 지금은 그 말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이제껏 해온 게 아닌 다른 길을 가고 싶어도, 그게 어떤 거라도 다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인 거 같아요.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ㅡ현재의 윤박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은 뭐예요?
사랑이요. 사랑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들, 요새 저한텐 그게 의미가 있어요. 그저께 <내 머릿속의 지우개>를 봤는데 너무 슬픈 거예요. <8월의 크리스마스>도 봤는데 그것도 그랬고. 원래 멜로를 잘 안 봤거든요. 근데 요즘은 일부러 멜로만 찾아 봐요.
ㅡ연애 안 한 지 오래됐어요?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게 어려운 거 같아요. 나도 이 사람이 좋고, 이 사람도 내가 좋은 건 진짜 기적 같은 일이에요. 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ㅡ이 사람이면 연애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있어요?
말이 잘 통하는 사람. 대화가 툭툭 잘 오가면 호감을 더 갖게 되겠죠? 통화를 해도 그렇고 문자를 해도 그렇고.
ㅡ마지막 질문입니다. 미래에 이 인터뷰를 다시 읽을지도 모르는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지금 드는 생각은 그건데, 좋은 인연을 만나고 있니? 좋은 인연을 만났으면 좋겠구나. 그거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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