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럽다고 다 빈혈일까요 <2>
빈혈, 세포가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
어지러운 게 곧 빈혈이 아니라면, 실제로 빈혈은 어떤 질환인 걸까요? 빈혈의 의학적인 정의는 ‘혈액 속 적혈구가 나르는 산소 양이 세포가 요구하는 산소보다 적어진 상태’입니다. 말하자면, 세포가 산소부족으로 숨을 못 쉬고 있는 상태. 사람이 숨을 못 쉬는 상태가 길어지면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지듯이, 세포도 산소가 없으면 에너지를 만들 수가 없어 시름시름 앓게 되지요.
빈혈은 증상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혈액검사와 같은 임상적인 검사로만 진단해야 한다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헤모글로빈’이라는 유명한 혈색소의 수치가 정상치보다 줄었는가 아닌가가 일차적인 진단의 기준인데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정한 기준을 따라 남자의 경우 13, 여자의 경우 12미만으로 감소할 때(임산부는 정상이라도 그보다는 약간 더 낮아지기 때문에 11미만을 빈혈로 봅니다. 단위는 g/dL예요)를 통상적으로 빈혈이라고 진단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예전에 진료한 적이 있었던 20대 후반의 한 여자환자는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혈색소 수치를 검사하게 되었는데 의사들이 깜짝 놀랄 수치인 8과 9 사이가 나옵니다. 환자는 의아합니다. 왜냐면 본인은 빈혈이라는 것을 전혀 모를 정도로 증상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가끔 빈혈이 서서히 진행되어 몸이 적응된 경우도 없지 않지만 분명 이처럼 수치가 매우 낮은 경우라면 분명 증상은 있었을 겁니다. 그녀가 증상을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한 건 빈혈의 정확한 증상을 몰랐기 때문이었지요.
어떤 증상으로 빈혈을 의심할 수 있을까요?
빈혈의 가장 흔한 증상은 의외로 ‘쉽게 피곤하다’입니다. 같은 운동량에도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데 혼자 극심한 피로감에 삶은 파처럼 축 쳐진다면 빈혈을 의심해볼 만합니다. 피곤하기 때문에 의욕이 떨어지고, 의욕도 체력도 없는데 일은 해야만 하기 때문에 짜증이 늘어나죠. 이 경우 세포 속 에너지 공장이 산소부족으로 일제히 가동 중단된 건 아닌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정도는 누구나 피곤한 거 아니야?’라며 스스로를 몰아세우도록 권하는 분위기에서는 아예 병이라 생각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또 다른 흔한 증상은 순환 장애입니다. 몸 구석구석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 상황을 몸은 위기라고 느끼기 때문에 심장은 더 열심히 일해서 혈액을 빨리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 격렬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쉽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찹니다. 혈액을 보내도 보내도, 호흡으로 아무리 산소를 마셔도 몸은 산소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죠.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심장에서 먼 부위부터 순환이 떨어진 증상이 나타납니다. 손발이 저리다, 현기증이 난다, 머리가 아프다, 눈 앞에 무언가 아른거린다…… 월경 양이 줄거나 아예 월경을 거르게 되고 성욕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심장의 부담이 커지면 오후에 다리가 퉁퉁 붓기도 하고요. 붓는 게 모두 신장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저는 혈액순환이 잘 안되나 봐요’ 하는 분들 중 아직 혈관이 튼튼한 젊은 여성들은 한번쯤 빈혈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빈혈의 진단은 또 다른 질환의 실마리입니다
빈혈의 종류와 유형은 간단한 혈액검사만으로도 진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빈혈을 일으켰을지도 모르는 다른 질환의 가능성입니다. 여성들은 자궁근종이나 자궁선근증, 자궁내막증식증 등으로 인해 월경량이 너무 많아지지는 않았는지, 자궁 내의 폴립 등으로 인한 부정출혈(월경기 이외의 시기에 나오는 비정기적인 출혈)이 있지는 않은지 체크해야 합니다. 소화기 내의 염증이나 궤양으로 인한 출혈일 수도 있고, 드물지만 혈액을 저장해두는 기관인 간 세포의 병변이나 유전질환일 수도 있어요.
우리가 괴롭게만 생각하는 증상은 사실 진짜 원인을 찾아내어 빨리 대처하라고 몸이 우리에게 보내는 S.O.S 신호입니다. 탐정이 되어 그 원인을 찾는 것이 의사들의 일이지만 시그널의 의미를 읽어내는 일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할 수가 없겠죠. 몸의 목소리에 늘 귀를 기울여 주세요.
통증을 진통제로 잠재우듯 불편한 이상신호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차단해버리는 것도 삶의 질을 관리하는 하나의 방법이긴 합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불편을 막는 방법은 정확한 진단과 치료, 예방밖에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