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영의 품위

남자들이 주를 이루는 TV 화면이 너무나 익숙한 시대. 여성 방송인을 하나의 장식처럼 활용하려고만 하는 요즘의 방송 문법에 아쉬움을 느낀 지는 오래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럼에도 확고하게 자신만의 색깔로 TV 화면을 가득 채우는 아나운서가 있다. 정은아, 박혜진, 강지영. 20대부터 50대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방송인의 과거와 지금, 그리고 미래를 보았다.

요령 피워서 더 빠른 길로 가는 대신 조금 늦더라도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하며 하나씩 단계를 밟아나가겠다는 JTBC 아나운서 강지영. 그녀는 지금 이 시대에 아나운서의 품위를 지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재킷은 제이백 쿠튀르 (Jay Baek Couture).

재킷은 제이백 쿠튀르(Jay Baek Couture).

셔츠, 스커트 그리고 안경은 아나운서 강지영을 상징하는 드레스 코드가 됐다. 매일 저녁 5시에 방영되는 <정치부회의>에서 그녀가 안경을 쓰고 등장한 것이 인터넷상에서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여성 아나운서가 안경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화제가 될 정도니,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 한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보수적인지 보여주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사 람들은 갖가지 해석을 내놓았고, 강지영은 그들을 보며 아나운서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적인 시선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지난 2 011년 MBC에 서 방영한 아나운서 서바이벌 프로그램 <우리들의 일밤-신입사원>에 출연했다. 인디애나 주립대학을 나왔고, 미국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보유한 스펙과 그녀의 외모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충분했다. 그리고 같은 해 JTBC 1기 특채 아나운서로 뽑혔다. 아나운서 7년 차. 이제야 비로소 제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고 그녀는 말한다.

모두가 예능에서 두각을 드러내 화려한 프리랜서의 삶을 꿈꾸는 듯해 보 이는 아나운서의 세계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싶어한다. 스 물아홉 살 강지영은 아나운서가 갈 수 있는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

MBC <신입사원>에 출연해 먼저 얼굴을 알렸는데, 아나운서를 열망 했던 때와 지금,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점이 있나요?
예전에는 화려한 커리어 우먼을 상상하며 꿈꿨어요. 어릴 때 심야뉴스에 여자 앵커가 나왔는데 똑 부러지는 모습을 보며 막연하게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나운서가 되고 보니 현실은 정글과도 같아요. 특히 요즘처럼 방송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는 예전처럼 아나운서라는 타이틀만으로는 경쟁력이 없어요. 개인의 콘텐츠가 없거나 전문성이 없으면 위기를 겪게 되는 직업이라 생각해요.

현재 방송 환경에서 당신의 장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저는 외국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녔어요. 그래서 아나운서 학원을 다닌 사람들에 비해 자유롭고 솔직하게 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 같 아요. <정치부회의>를 하면서 현장을 많이 나가게 됐는데, 사람들이 저를 두고 “아나운서야, 기자야?”라고 물어요. 스튜디오 밖, 현장에 나가는 아나운서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게 저의 장점인 것 같아요.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한국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적응하 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어땠나요?
특히 언론사가 굉장히 보수적인 편이에요. 아나운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엄격해서 지금도 간혹 무서워요. 제가 한국어 발음이 잘 안 되면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안 된다고 하시는 경우가 있거든요. 물론 사실 일 수 있어요. 연습을 하면서 채워나가려고 하지만, 유학생에 대한 선입견이 아직까지는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포럼에 갔었는데, 유학생이라는 점이 일을 할 때 도움이 되냐고 묻더라고요 . 아나운서라는 직업만으로 봤을 때 단점이 훨씬 많아요. 기본 발성, 발음을 오랜 시간 고쳐야 하고, 바로잡는 게 힘들거든요.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하지만 그 단점을 뛰어넘었을 때 그 사람은 엄청난 임팩트를 주죠. 저는 그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 아나운서에 대한 시선은 언론인과 연예인 두 가지로 나뉘 죠. 당신은 어느 쪽에 가까운가요?
회사에서 저를 뽑을 때 예능용 아나운서로 여겼어요. <신입사원>으로 시작했으니 아마도 그런 관점에서 저를 보신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보기 보다 진지하거든요. 전현무 선배처럼 스스로 망가지는 걸 즐겨야 보는 사람도 재미있는데 저는 그게 너무 어색해요. 제 성향이나 그동안 공부 한 걸 생각하면 저널리스트 쪽에 가까운 것 같아요. 언론인이라고 무조 건 딱딱할 필요가 없으니, 말랑말랑하게 시사나 뉴스를 다루고 싶어요. 지금 하고 있는 <정치부회의>가 딱이죠.

회사에서 뉴스 앵커를 염두에 두고 뽑은 게 아니라는 점이 서운하거나 아쉽지는 않았나요?
입사하기 전에 예능으로 먼저 얼굴을 알렸기 때문에 회사에서 그런 판단 을 한 건 당연한 것 같아요. 입사했을 때 보도, 예능 등 다 해봤지만 딱히 제가 두드러지게 잘하거나 잘 맞는다고 생각한 프로그램이 없었어요. 그러다 <정치부회의>를 하면서 자연스러워졌죠. 시청자와 저, 그리고 회사 에서도 그 모습이 괜찮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 그런 걸 보면 스스로 얼마나 보여줄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활발하게 활동하는 프리랜스 아나운서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해요?
아, 나의 길이 아니구나.(웃음) 요즘 인정받고 두각을 나타내는 프리랜스 아나운서들 대부분은 일찍이 예능에서 스타성을 인정받은 편이잖아요. 프리랜스 아나운서에 대해 예능인 만큼 웃기거나 돈을 좇는다는 시각이 많은 것 같아요. 제 스스로에게 자본주의적 이미지를 덧씌우고 싶지 않아요. 특히나 JTBC 1기 아나운서로 회사에 대한 애착이 크기 때문에 프리랜서는 저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현재 언론사로서 JTBC가 가지고 있는 위상, 환경이 만족스럽기 때문이 아닐까요?
맞아요. 저는 JTBC라는 언론사의 비옥한 토지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싶은 아나운서예요. 요즘 공영방송으로서 MBC의 상황을 보면서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신입사원> 출신이다 보니 그런 상상을 더 구체적으로 하게 되는데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퇴사를 결심했을 때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을 해보는데, 정말 잘 모르겠어요. 지금 저는 업무 때문에 하루 살기가 바쁘기만 하니까요. 우리 회사가 그런 변화에 휩쓸리지 않길 바라지만, 제가 만약 그런 상황에서 방송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아마 다른 쪽으로 진로를 바꿨을 것 같아요.

드레스는 에스카다(Escada). 귀고리는 젬마 알루스 디자인(Gemma Alus Design). 팔찌는 스와로브스키(Swarovski). 뮬은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

드레스는 에스카다(Escada). 귀고리는 젬마 알루스 디자인(Gemma Alus Design). 팔찌는 스와로브스키(Swarovski). 뮬은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

<정치부회의>에서 안경을 쓰고 나온 것, 셔츠와 스커트를 고집하는 것 등이 화제가 됐어요. 정형화된 아나운서를 보는 시각에 대한 반발심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프로그램 성격이 뉴스 쇼라서 재미있는 요소가 많은 편이에요. 안경도 기자 선배를 따라서 쓴 것일 뿐 큰 의미는 없었고, 이렇게 이슈가 될 줄 도 몰랐어요. 안경 쓴 거 하나로 페미니스트의 반란이라고까지 해석한 걸 보면서 아나운서에게 이만큼 고정적인 이미지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마음 한편에 아나운서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에 대한 반감이 있고 그걸 깨고 싶어요. 아마도 제가 그 고정된 틀에 맞는 아나운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호주의 남자 앵커는 한 달 내내 같은 옷을 입었는데 아무도 지적을 하지 않았다는 기사를 보며 여자 앵커라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여자가 현장에 나가면 리포터고, 남자는 기자가 되는 현실도 이상해요. 리포터와 기자가 공존하는 방식도 독특하죠. 현장에 나가면 남녀 구분 없이 누구나 기자가 되는 거 아닌가요? 기자, 리포터, 스포츠 아나운서, 기상 캐스터 모두 다 전문직인데 그 직업마다 뉘앙스가 다르잖아요. 아나운서라면 스튜디오에서 누군가 써주는 원고만 읽어야 한다는 것도 바꾸고 싶어요. 그래서 현장에 나가는 걸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은 어디였나요?
사드 배치 문제를 취재하기 위해 성주에 내려갔어요. 주민들이 달걀을 던지며 정치인들에게 항의하는 모습을 보니 TV에서 보는 것과 다른 분 노의 깊이가 느껴졌어요. 기자들이 말하는 현장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죠.

여자 아나운서로서 불합리한 상황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나요?
당연하죠. 저만이 느끼는 걸 수도 있는데, 유독 여자 아나운서에게는 도덕적인 잣대가 엄격한 것 같아요. 여자 아나운서는 단아하고, 지적이며 평소에도 바르게 살아갈 것 같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요. 저 역시 스스로 진취적으로 주관 있게 살아간다고 말하면서도 은연중에 그렇게 살 아야 한다고 느끼고요.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흠잡힐까봐 의식하며 행동하기도 해요. 하지만 저 역시 시청자들과 똑같은 사람이고, 휴가를 기다리는 직장인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예요. 제가 SNS를 하 는 이유죠.

JTBC가 많이 알려지기 전에는 힘든 점도 많았을 것 같아요.
JTBC에 대한 인지도가 부족하다 보니, 부연 설명을 많이 했죠. 초반에는 이름 없는 소속사의 무명 배우로 일하면 이런 기분이 들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회사에 선배들도 없으니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제가 알아서 배우고 부딪혔죠. 정말 서러운 시간들이었어요.(웃음) 더군다나 저는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서 상하 관계나 미묘한 단어의 뉘앙스를 읽어야 하니까 늘 바빴어요. 입사할 때만 해도 제가 가장 어려서 어디에서나 막내였죠. 막내라면 식당에 가서 휴지를 깔고 수저를 놓는다는 것도 눈치로 알고 배웠어요.(웃음)

한 인터뷰에서 롤모델이 없다고 했는데, 반대로 반면교사로 삼는 인 간상은 있어요?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사람을 수단이나 이용 가치로만 여기는 정치적인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인간미가 없어요. 누군가를 밟고 성공하는 삶은 지양하고 싶어요. 길게 봤을 때 저는 손석희 앵커를 닮고 싶어요. 언론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소신도 분명하시고요. 기본적으로 방송을 하는 사람은 인성이 잘 갖춰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안 그러면 방송에 다 드러나더라고요.

당신에게 방송은 어떤 의미인가요?
처음에는 저와 많이 안 맞는다고 생각해서 그만둬야 하나 고민도 많았어요. 그러다 <정치부회의>를 하면서 선배들과 협업하고, 카메라 감독님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진짜 재미를 느꼈죠. 그 전에는 누군가 일이 즐겁다고 말하면 잘 믿지 않았는데,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서른을 앞두고 있어요. 커리어 면에서 조바심도 나나요?
예전에는 제게 어떤 큰일이 주어졌을 때 ‘망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컸어요. 그런데 지금은 할 수 있겠다, 내가 할 법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 바심은 사라졌어요. 잘하기 위해 준비를 더 많이 할 뿐이죠.

야망도 있고, 승부욕도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정의로운 방법이 반 드시 성공을 보장하지 않잖아요, 그 사이에 양자 택일을 해야 할 상황이 오면 어떤 결정을 내릴 건가요?
너무 어렵네요.(웃음) 기본적으로 덕을 쌓고 착하게 살고, 요령 피우지 않 으면 기회는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이에요. 총선 때 JTBC가 한국에서는 최초로 페이스북 라이브를 진행했어요. 최초라는 점이 흥미로웠고, 누가 볼지 모르는 상황이 재미있을 것 같았죠. 되게 열심히 했는데 회사에서 알아봐줬고, 그 덕에 광화문에서 대선 생방송을 맡았어요. 그 뒤로도 많 은 기회가 왔어요.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일이더라도 열심히 하면, 그걸 좋게 본 사람이 다른 일을 주고, 그러다 보면 역할이 늘어나더라고요.

어떻게 나이 들고 싶어요?
<효리네 민박>을 보며 이효리 씨가 무척 편하게 나이 들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최상의 것을 유지하면서 세월과 같이 가고 싶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얻는 게 당연히 있을 테죠. 20대 초반과 지금을 비교하면 저에게 여유가 생겼어요. 나이를 먹는 것이 기대되기도 해요 . 연륜이 생기면 지혜로워질 거고, 지금보다 더 여유로워질 테니까요. 서 른을 앞두고 있는 나이다 보니 싱숭생숭해지기 마련인데, 저는 최고의 한 해를 보내고 있어요.

“예전에는 제게 큰 일이 주어지면 ‘망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컸어요. 그런데 지금은 할 수 있겠다, 내가 할 법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바심은 사라졌어요. 더 잘하기 위해 준비를 많이 할 뿐이죠.”

    에디터
    전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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