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 사회의 말하기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에서 포착한 흥미로운 장면은 바로‘ 상류층의 여섯 가지 화법’에 대한 것이다. 상류층의 화법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할까? 언어학자가 답한다.

261상류사회얼마 전 종영한 jtbc 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 는 상류층에 안착한 여자 우아진(김희선)과 그녀를 부러워하는 또 다른 여자 박복자 (김선아)의 이야기였다. 박복자는 마침 내 우아진의 시아버지, 안 회장의 재산 을 차지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박 지영으로 이름을 바뀌어도 상류층의 일원이 되었다는 느낌은 얻지 못한다. 박복자는 결국 우아진의 도움을 받아 마 나님 애티튜드를 익히려 하는데, 아진은 갤 러리에서 만난 사모님을 예로 삼아 지영에게 상류층 화법을 보여준다. 아진이 상류층 대화의 특 징으로 요약한 것은 다음 여섯 가지다.

낮은 목소리
사람을 존중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 알 수 없는 표정
동사보다 명사를 사용하고
짧은 대답일 때는 존대 표현을 쓰되
자신의 의견을 피력 해야 하는 순간에는 어미를 축약하는 말버릇
사람을 대할 때는 반드시 눈을 바라본다.

꽤 흥미로운 리스트다. 한 사람이 쓰는 언어가 그의 계급을 드러낸다는 것은 사회언어 학에서는 오래된 이론이다. 하지만 어떤 언어적 특징이 어떤 계급과 연결되느냐는 건 역사적 산물이고 사회와 문화마다 다르며 꽤 임의로 정해지기도 한다. 대놓고 언급하 지는 않지만 은밀하게 계급과 연결되는 언어적 특징을 언어학에서는 ‘사회적 지표’라고 하는데, 우아진이 말하는 저 특질이 상류층의 사회 지표가 될까?

낮은 목소리 결론만 말하자면, 대체로 그렇다. 보편적으로 – 특정 언어를 가리지 않고 – 저런 화법이 높이 평가받는 편이다. 먼저, 낮은 목소리부터 보자. 보편적인 연구에 따르 면, 주파수가 낮고 일정하게 유지되는 목소리는 좀 더 신뢰감을 얻는다. 고음부터 저음 을 음역이라고 하면 낮은 음역에서 큰 변화 없이 움직이는 목소리를 신뢰할 수 있는 것 . 가령, 배우로 치면 한석규 씨의 목소리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심야 방송의 디제이 들이 굳이 멜로디가 느껴지는 억양을 잘 쓰지 않는 것도 저음의 일정한 목소리가 편안 한 느낌을 주기 때문. 대표적으로 시리(Siri) 등의 음성 어시스턴트 프로그램도 기본값 이 낮은 소리로 설정되어 있다. 물론, 사람의 목소리 음역대는 발성기관의 타고난 형태 로 정해지지만 중요하게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억양을 쓰지 않는 것만으로도 신뢰 감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여성의 경우에는 주파수가 낮고 성대의 앞은 닫고 뒤는 여는 목소리는 관능적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마릴린 먼로의 목소리를 연상해보면 이해가 될 것. 하지만 우아진이 말한 상류층의 낮은 목소리는 애초에 고성을 내지 않고도 자기 의견을 관철할 힘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알 수 없는 표정 두 번째, 남을 존중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 알 수 없는 표정은 그야말 로 알 수 없는 말이다. 여기엔 어떤 과학적 묘사가 없기 때문. 하지만 이 표정은 단순히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성취할 수 있다. 남의 기분을 과하게 맞추려는 사람은 머리를 조 아리거나 지나치게 웃는다. 입을 움직이는 가벼운 미소 정도는 괜찮지만, 굳이 눈가에 주름을 잡아가며 웃을 필요는 없는 것. 특히, 자신의 기분을 남에게 굳이 전달할 필요가 없는 것도 상류계급이나 가능한 일. 서비스 직종에서 항상 과하게 웃고 명랑한 척하면 서 감정 노동을 강요당하는 이유는 이와는 반대 상황이다. 메인 MC가 아니라 패널들 이 예능에서 보여야 하는 지나친 리액션도 어떻게 보면 연약한 입장을 나타낸다.

말투의 특징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는 비슷한 스타일의 다른 표현이다. 한국어는 종결어미에 반드시 화자와 청자의 관계가 드 러나야 하는 언어다. 즉, ‘했습니다/했어 요/했어’의 선택을 하는 순간 청자와 화 자의 위계가 정해진다. 동사보다 명사를 쓰라는 것, 짧은 대 답에는 존댓말을 쓰라는 것, 어미를 축약하라는 것은 모두 이 위계 표시 를 교묘하게 이용하라는 책략, 위에서 말한 존중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 알 수 없음과 관련이 있다. 먼저 명사 대신 동 사를 쓰는 전략은 어미를 쓰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을 주는 것. 게다가 “철수가 영희에게 프러 포즈했다”라는 동사형 문장을 “철수의 (영희를 향한) 프 러포즈”라고 명사형을 사용하면 정보가 압축되는데, 애초에 상류 층은 자신이 가진 정보를 남에게 세세하게 전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무시하는 듯 보이면 안 되므로 짧은 대답에 한해서 “ 그래요”처럼 존댓말을 쓰고, 자신 이 더 힘이 있는 위치에 있다는 걸 과시할 필요가 있을 때는 드라마의 사모님처럼그 “ 것도 나쁘진 않은데… 나는 오수연 작가를 초이스했어”처럼 뭔지 알 수 없게 어미를 쓰 지 않거나, 확실하게 반말을 쓴다.

시선을 응시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눈 맞춤. 눈 맞춤은 문화마다 다르게 해석되는 면이 있지만, 일단 눈을 맞추는 사람은 숨기는 게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 향이 있다. 또한, 상황에 따라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 것도 주로 더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원할 때 언제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상류층의 특권이다.

화법을 선택한다는 것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게 과연 상류층의 화법일까? 유명한 언 어학자이자 조지타운의 언어학과 교수였던 데보라 테넌은 1990년대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언어 스타일을 일종의 메이크업과 패션에 비유했다. 이 은유를 빌려 쓰자면, 상류층의 화법을 옷을 입고 메이크업을 하듯이 걸칠 수는 있겠지만 계급적 성 취가 따라오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상류층의 화법은 권력에 대한 것이지 지적이거나 교양 있는, 혹은 다정한 스타일과 반드시 연관된 것은 아니다. 낮은 목소리 에 신뢰감을 얻지만, 높은 목소리는 행복감을 표현할 수도 있고 영리한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 이를 변환할 수 있다. 그리고 힘을 중요시하는 상류층 화법은 정보 공유에 인색 하지만, 지적인 사람은 자신이 주어야 할 정보의 양을 정확히 안다. 가령, 아이돌 그룹 워너원의 황민현을 보면 또래의 청년 중에서도 교양 있는 화법을 쓴 다는 인상을 받는데, 그는 항상 자신의 의견에 관한 근거를 적확한 단어를 사용해서 표 현할 줄 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그가 황‘ 갈량’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것도, 자신에 게 조를 짤 권리가 주어졌을 때 멤버를 선택한 이유를 적절한 문구로 표현하는 능력과 도 관련이 있다. 상대방의 말에 흥미와 관심 있는 표정, 쉬운 표현으로 소통하려고 하 고, 우리의 관계가 동등하다는 뜻으로 문장 끝까지 정확하게 말함으로써 서로 위계를 흐릴 수도 있다. 위계를 드러내는 상류층 화법, 존중을 표현하는 동등한 화법. 지성을 표현하는 정확한 화법. 어떤 메이크업을 할지는 화자의 선택에 달렸다. 무엇이 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릴 지는 본인만이 알 테니까. 그러나 TPO에 맞게 어울리는 것을 고르지 못하면 얼굴만 동 동 뜨는 화장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역시 자신이 감수할 일이기도 하다.

    에디터
    허윤선
    포토그래퍼
    Courtesy of JTBC
    박현주(언어학자,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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