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세포 심폐소생기

연애를 하고 있든, 하지 않고 있든 늘 말랑말랑한 연애세포를 갖고 싶다. 두근대지 않는 심장을 소생시켜주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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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연애하지 않고는 못 살까? 물론 아니다. 하지만 연애를 안 하면 인생이 약간 심심해진다. 연애를 하면 평소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던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이 마구 뿜어져 나온다. 자꾸만 연애를 하고 싶게 만드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평소 결혼에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던 40대 언니가 말했다. “결혼은 모르겠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 꽤 오랫동안 한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는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30대 중반을 앞두고 있는 지금, 이 남자와 헤어지면 새로운 사람과 연애를 할 수 있을까? 가만, 연애는 어떻게 시작했더라?’
친구들 대부분은 유부녀가 됐지만, 일부 친구들은 여전히 싱글이다. 결혼하고, 출산과 육아에 지쳐 있는 친구들을 만나다 보면 대화의 주제가 겹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연애하고 싶다.” 유부녀에게는 위험한 말일 수 있지만 오해 마시라. 내 옆에 있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연애할 때의 그 감정을 느끼고 싶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누구나 연애하고 싶은 욕망,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연애할 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은 욕망은 곁에 누가 있든 상관없다. 그만큼 연애할 때 느끼는 감정은 짧지만 강렬하고, 그립다.
결혼한 지 3년 된 친구 K가 최근에 방영 중인 드라마 <사랑의 온도>를 보며 “결혼하고 나서 왜 사람들이 바람을 피우는지 알 것 같아. 결혼하고 나선 연애했던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니까”라고 말했다. 유난스럽지 않게 연애를 하며 안정적인 관계만 추구했던 친구였기에 의아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연애 때처럼 잔잔하고, 무난하지만 드라마에서 연애하는 장면을 보면 ‘결혼 전에 연애를 더 해볼걸’이라는 후회와 아쉬움이 느껴진다고 했다. 한때 ‘욘사마’에 열광했던 일본 아주머니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도 알 것 같다고 덧붙였다. “결혼하고 나니까 섹스는 더 하지 않게 돼. 회사에서 일하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에 들어오면 씻고 자기에도 바빠. 주말에는 밀린 잠 실컷 자고 나면 어느새 월요일이 코앞이야.” 최근 K가 잠들기 전까지 얼굴을 마주하는 남자는 이미 곯아떨어진 남편이 아닌 <사랑의 온도>의 주인공 온정선(양세종 분)이다.
“정말 신세계였어!” 30대 중반을 향해가고 있는 친구 S가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대학 졸업 후, 몇 년 만에 찾은 이태원 클럽에서 S는 오랜만에 많은 남자의 관심을 받았다. 클럽에 들어서자마자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남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저기요”라며 말을 걸었다. “난 이제 한 물간 것 같아”라며 기죽어 하던 그녀는 그때 비로소 안심했다. 20대라고 거짓말해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아 더 뿌듯했다. 물론 어두운 조명 덕에 입가의 팔자주름, 눈가의 잔주름이 잘 숨겨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이에 제동 걸려 그나마 들어오던 소개팅도 끊겨 의기소침했던 그녀에게 클럽에서 하룻밤은 자존감과 자신감을 되찾는 계기가 됐으니 말이다.
실연했지만 늘 사랑을 하는 친구 L도 있다. 그녀는 한 남자와의 관계를 ‘남사친⇨애인⇨남사친⇨쓰레기’순으로 정리했다. 좀처럼 미련을 떨쳐내지 못했던 그녀의 마음이 깔끔하게 정리된 건 바로 젝스키스가 컴백을 하면서다. 데뷔한지 20년이 됐지만, 세월이 무색할 만큼 그때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오빠’에게 그녀는 마음을 줘버렸다. 10대 때도 하지 않던 ‘덕질’을 시작한 것이다.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이 사랑으로 그는 옛사랑을 지웠다. 이제는 오빠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 전 남친과의 관계를 왜 그토록 오랫동안 질질 끌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녀석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했던 자신의 모습을 모두 모아 소각시켜버리고 싶을 정도다. 오빠와 실제로 연애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가 웃을 때 덩달아 웃고 있는 자신을 본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나! 최근엔 오빠와 강다니엘 사이에서 혼자 줄다리기 중이다.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설레는 감정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비록 그와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긴 어렵겠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연애를 경험해본 사람들에겐 때론 지리멸렬한 연애를 관찰하는 것 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최근 마니아를 형성하며 종영한 리얼 예능 프로그램 <하트 시그널>이 나에겐 그랬다. 일반 출연자들이 한 공간에서 한 달간 함께 살며, 날마다 문자로 서로의 감정을 표현한다. 연애 직전에 나를 향한 상대의 신호를 해석하느라 하루 종일 뇌를 풀 가동하고 유치하지만 나에 대한 애정도를 문자나 통화 횟수로 측정하며 이 남자가 반드시 나의 남자가 됐으면 하는 간절함을 느껴본 적이 언제던가. 어렴풋이 기억은 나지만 그뿐이다. 제삼자의 입장으로 <하트 시그널>의 출연자들을 보고 있으면 답답했다가, 설렜다가도 지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연애할 때처럼 그 감정이 오롯이 이입된다. 연애할 때 남녀의 심리가 얼마나 다른지도 깨닫는다. 남자친구에 대한 애정이 인간애로 바뀌면서 그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면서도 말이다.
80세를 넘긴 한 노년 배우는 지금도 로맨스 작품을 하고 싶다고 말하며, 늙었어도 사랑하고 싶은 감정은 유효하다고 말한다.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는 평생 연애할 때의 감정을 간직하고 싶어 한다.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열정적으로 연애하던 02대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연애할 때의 그 감정만큼은 평생 닳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연애를 한다는 건, 내가 진짜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난 연애를 하면서도, 연애를 하고 싶다.

에디터
전소영
포토그래퍼
Courtesy of Mont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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