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정은지
갑작스러운 기회도, 천부적인 재능도 누구의 손에 쥐여졌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노래와 연기, 그 무엇도 새어나가지 못하게 두 손을 꽉 움켜쥔 정은지에게서 속이 꽉 찬 어른의 얼굴이 스친다.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정은지가 배우가 된 과정은 익히 알려져 있다. 데뷔 후에도 부산 사투리를 써온 그녀에게 연기는 다른 사람의 영역 이었다. 아이돌 그룹 에이핑크의 메인 보컬이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스무 살이 되던 해 tvN <응답하라 1997>로 처음 연기를 했다. 정은지에게 연기는 우연치고는 훌륭한 시작이었고, 재미로 하기엔 욕심 나는 영역이었다. 정은지는 자신이 가수라는 사실이 잊힐 때쯤 에이핑크로 활동하거나 솔로 앨범을 냈고, 연기자였다는 사실이 잊힐 때쯤 드라마나 뮤지컬을 선보였다. 그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에이핑크의 정은지, 가수 정은지, 배우 정은지 무엇 하나 내려놓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순서에 따라, 지금 우리는 배우 정은지를 만날 차례다.
당신을 두고 사람들이 왜 ‘털털하다, ’‘성격 좋다’고 말하는지 오늘 알았어요. 거기에 스스로 갇힌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어요?
데뷔 초에는 늘 웃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제 매력이 그것밖에 없는 줄 알았거든요. 시간이 지나 보니 굳이 웃고 싶지 않은데 웃을 필요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웃지 않는다고 나쁜 사람이 아니고, 또 실제로 제가 그렇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요.
아이돌이 연기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본업을 뒤로하고 배우로 전업하려는 경우가 많잖아요. 당신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욕심이 많은 편이에요. 노래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고, 연기는 <응답하라 1997>을 시작으로 뮤지컬도 해보면서 조금씩 욕심을 내기 시작한 분야죠. 그렇다 보니 촬영 현장 나갈 때 무척 조심스러워요. 연기 분야에서 저는 새내기니까요.
연기자로서 새내기라고 생각해요?
이번에 드라마 <언터처블> 찍으면서 더 그렇게 느껴요. 박건형, 최종원 선생님들과 연기를 하거든요. 주연이긴 하지만 막내는 막내일 뿐이죠. 그래서 너무 좋아요. 마음껏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제가 질문이 많은 편이거든요. 그전까지는 주도적으로 제가 이끌어가야 하는 상황이라 누군가에게 물어보기가 조금 그랬어요.
왜요? 자존심 상해서요?
아뇨! 제가 주인공인데 자꾸 몰라서 물어보면 다른 사람들이 불안해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때는 궁금한 걸 현장에서 못 물어보고 주변에 연기하는 친구들에게 물어봤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걱정 없이 누구에게나 물어볼 수 있어요. 이번에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니터링을 무척 꼼꼼하게 하는 편인 것 같아요.
못할수록 모니터링을 정말 많이 해요. 그래야 발전이 있으니까요. 불편 하더라도 진실을 알고 싶어요. 그래서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어요.
운동도 그런 계기로 시작한 거예요?
어느 날 제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진 게 느껴졌어요. 건강 체질이라 생각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시간을 투자해서 몸을 건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다 싶었죠. 덕분에 몸매도 교정되고 여러모로 좋아졌어요.
어릴 때부터 ‘애늙은이’라는 소리 많이 들었죠?
네!(웃음) 저는 촌스러운 것 같아요. 친구들이“ 이 옷이 유행이야”라고 하면 “그렇구나”라고 말하고 한참 지나고서 예쁘다며 그 옷을 입어요.
그건 촌스러운 게 아니라 느린거 아니에요?
느린 데다가 촌스러워요. 엄마와 대화를 많이 하고 자라서 그런지 친구 들이 짧은 치마 입으면 “너무 짧다!” 이러면서 잔소리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약간 보수적인 편이죠. 그런데 운동하고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은 몸매가 좋으면 그렇게 입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아마 그때는 제 몸매가 별로 안 좋아서 그랬나 봐요.(웃음)
소위 말하는 ‘요즘 애들’답지 않은 성격 때문에 연배가 있는 선배들이 더 예뻐하나 봐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즘 친하게 지내는 분들이 바다, 손여은, 전효성 언니들이에요. 언니들이 저한테 “너는 네 또래 같지 않다”라고 해요.
여자들끼리만 잘 어울려서 그런지 스캔들이 좀처럼 나지 않아요. 남 모르게 연애도 하죠?
틈틈이 했죠. 그런데 제가 어디 돌아다니는 성격이 아니에요. 술을 마시긴 하지만 주로 친구 집에 가서 마시거나 이자카야 같은 데서 오래 앉아 있는 편이죠. 제가 ‘반짝거리는 곳’을 안 좋아해요. 한번쯤 도전해볼까 싶은데, 아직 안 가봤어요. 주변에서 너무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선입견이 생겼어요.
이번 드라마 <언터처블>에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검사 서이라를 연기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어요?
드라마 <비밀의 숲>을 비롯해 검사가 나오는 작품을 많이 찾아봤어요. 그리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법정을 담은 영상이 꽤 많더라고요. 그런데 검사라고 해서 특별한 말투가 있진 않고, 어미가 딱 떨어지게 말하는 정도의 특징이 있더라고요.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인물의 직업 때문에 너무 갇힌 생각을 한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작품을 선택할 때 어떤 점에 끌리면 출연 결정을 해요?
딱히 그런 건 없어요. 평상시에 형사나 검사 같은 역할로 ‘걸 크러시’한 면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마침 이 작품이 들어와서 좋았죠. 대본을 받아 읽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회사에서 독려해주었어요.
걸 크러시 역할을 맡고 싶었던 이유가 있어요?
갑자기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면 연기하면서도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데, 당차고, 능동적인 인물을 연기한다면 제 성격을 적절히 잘 녹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정의로운 역할도 맡고 싶었어요. 용사처럼 정의로운게 아니라 메시지 있는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실제로 또래 배우, 가수 중에서도 당차고, 씩씩한 이미지가 강한 것 같아요. 그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건가요?
일할 때에는 자신감도, 자존감도 높아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혼자 있을때는 걱정이 많아요. 시간이 흐를수록 겁이 나요. 예를 들면 이번 앨범이 잘돼도, 다음 앨범은 조금 주춤할 수 있는데 한물갔다는 반응이 돌아올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한발 내딛는 게 너무 어려워요. 예전보다 잃을 게 더 많아서 무서운 것 같아요.
에이핑크 멤버들과 숙소 생활을 6년째 하고 있죠? 온전히 혼자 있고 싶을 때 어떻게 해요?
그럴 땐 기가 막히게 멤버들이 집에 없어요.(웃음) 요즘에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마침 숙소 계약 기간이 끝나가서 멤버들과 이야기하고 있어요.
에이핑크는 멤버들 간의 끈끈함이 느껴져요. 그 힘은 무엇일까요?
그냥 개인의 사생활, 시간을 모두 인정하고, 매사에 얽매이지 않아요. 그리고 다 같이 예능 출연을 많이 했는데, 함께 있을 때 시너지가 극대화돼요. 멤버 간에 개그 코드가 너무 잘 맞거든요.
예쁘다, 멋있다, 아름답다는 칭찬 중에 무슨 말이 좋아요?
멋있다. 멋있는 사람은 예쁜 사람, 아름다운 사람보다 드문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멋있어요?
사람 냄새 나는 사람, 사람 같은 사람요. 요즘 예쁜 사람이 많은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로 결여된 사람을 볼 때가 종종 있잖아요.
우연한 기회에 연기를 시작했죠?
일단 부산 사투리가 워낙 심했으니 연기는 엄두도 못 냈고, 오디션 대상에서 제외됐거든요. 그러다 <응답하라 1997>에서 연기를 했는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어릴 때 친구들이랑 재미로 상황극하고 연극을 했는데 그걸 써먹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거든요.
성격 자체가 능청스러운 면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제가 의외로 낯을 가려요. 편하게 대하려고 하지만, 제 마음이 진짜 편한게 아니에요. 특히 처음 보는 사람과 말할 때 눈도 잘 못 보고“아 휴~”라며 추임새를 넣거나 괜히 손뼉 쳐요.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대사 한마디 칠 때면 손도 떨리고 입술도 말라요. 그런데 그게 티가 안 나요. 아파도 말을 해야 상대가 알 정도예요. 그렇다고 생색 내는 건 싫고. 그래서 억울 할 때가 많아요.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르니까요.
이제 스물다섯도 막바지를 향해 가죠. 어려도 나이 먹는 걸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던데, 어때요?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좋아하는데 어릴 때 그 나이대가 되면 꼭 그 노래를 담은 앨범을 내고 싶었어요. 워낙 성숙한 노래를 많이 부르니까 어른들이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노래를 부르냐?”라고 하셨거든요. 빨리 나이 먹어서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연기할 때 사투리가 잘 고쳐지지 않아 무척 노력했었는데, 지금은 어 때요? 서울 사람 다 됐다고 느껴질 때 있어요?
없어요. 그냥 누군가 강남 어디에 있다고 하면 “아, 거기?”라면서 잘 찾아 갈 때?
인간 정은지의 이름 앞에 어떤 형용사가 붙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황정민 선배님께서 사람들 가까운 곳에 있어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친근한 배우이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지금 당장 어떤 단어가 떠오르지는 않지만, 친밀하다는 의미의 수식어가 붙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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