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못 마셔도 괜찮아!
억지로 술을 마시느니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택하겠다! 술은 한 잔도 입에 대지 못하는 사람에게 술자리는 이만큼 고통스럽다. 술을 못 마셔도 술자리에서 괜찮을 수 없을까?
내가 처음 술을 마신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3학년 선배 언니들의 졸업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치기 어린 마음에 겁도 없이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일진이었냐고? 천만에, 학교의 대표적인 범생이 집단, 학생회 학생들의 일탈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 전체가 전기장판처럼 뜨거워지고 빨개졌다. 이 맛없는 걸 TV드라마 주인공들은 왜 그렇게 달게 마시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술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건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부모님 두 분은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세상의 모든 술을 다 마신 사람처럼 얼굴이 소화기 색으로 변한다. 특히 엄마는 알코올 냄새만 맡아도 얼굴이 빨개지는 자신을 수치스러워하셨다.
그럼에도 술을 피해 다닐 수는 없었다. 술에 된통 당한 건 첫 직장에서였다. 신문사 연예부 기자로 입사했는데 일주일에 서너 번은 연예인 매니저들과 술을 마셨고,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위의 기수 선배들과 대면식을 했다. 자기 소개 후, ‘쌍끌이(쏘맥 두 잔을 만들어 연달아 마시는 것)’를 하는 것이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나는 매번 동기들의 부축을 받아야 했고, 구석에서 잠을 청하며,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귀가했다. 14기였던 난 이 과정을 열 차례가량 반복했다. 그러나 서로 안면을 트자는 대면식의 의미는 없었다. 다음 날 맨 정신으로 선배들에게 인사를 해도 “어제 너 거기에 있었니?”라는 질문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잦은 회식이었다. 맨 정신일 때보다 취한 날이 더 많은 부장님의 장단을 맞추는 것은 아무래도 못할 짓이었다. 입사 3개월 만에 몸의 이상 변화가 시작됐다. 온몸이 빨개지고, 가려웠다. 피부는 다 뒤집어졌고, 툭하면 배가 아팠다. 개 견(犬)자를 쓸 만큼 이꼴저꼴 다 보는 시기라는 견습기간이 끝났음에도 퇴사를 결정한 이유였다.
잡지사로 옮기면서 나는 비로소 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불거지는 논란(?)은 피할 수 없었다. “소주 병나발 불게 생겼는데 네가 술을 못 마신다고?” 소주 병나발 불게 생긴 얼굴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의심의 눈초리를 가진 사람들을 믿게 하려면,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은 짧고 강렬한 편이다. 소주 한두 잔 받아 마시고, 모두에게 뻘개진 얼굴을 보여주고, 그 자리에서 잠이 든다. 컨디션에 따라 중간에 오바이트를 할 때도 있다. 나이 먹고, 연차가 쌓이면서 술자리에서 술을 거절할 수 있게 됐다. 그때가 돼서야 왜 사람들이 술보다 술자리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는 커피 마시며 나눌 수 있는 이야기, 그 이상의 말들이 오간다. 평소에 쌓인 감정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도 있고, 온갖 비밀스러운 가십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술자리에서도 흥겹게 수다를 떠는 나를 아는 사람들은 취한 자신을 보여주는 걸 민망해하지도 않고, 술자리에 열외시키지도 않는다. 부쩍 술자리가 많아지는 연말, 나는 술 못 마셔도 괜찮은 술자리가 점점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못 마시는 척하고 싶을 때
술을 쭉쭉 들이켜는 주당도 때론 술 못 마시는 척하고 싶다.
1 추행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술자리를 훈훈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고 때문이다. 특히 남자들과 함께 술 마실 때 조심스러워하는 사람이 많다. 행여 사람들이 풀어져 있는 틈을 타 성추행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되기 때문. 그래서 그런 자리에서는 절대 취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2 더 이상 실수하고 싶지 않다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취객에게 관용을 많이 베푼다. 그러나 매번 똑같은 술버릇으로 주변 사람들의 원성을 듣는다면 스스로도 절제하고 싶다. 그건 술 마시고 어쩌다 하는 실수가 아닌 추태다.
3 취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 취해서 속은 부글부글 끓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사람은 괴롭다. 이럴 바엔 처음부터 술을 못 마시는 걸로 포지셔닝하는 게 더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 괜스레 술꾼으로 소문나 술자리 여기저기에 불려 다니는 것은 무척 불편한 일이다.
4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피트니스 클럽 트레이너들도 잊지 않는 질문이 “술 마셔요?”다. 다이어터의 최대 적은 술이다. 모처럼 금주를 선언하고 살 빼려는 사람의 의지를 꺾으려는 이들에게 이해를 요구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주당들이 싫어하는 행동
주당들이 말하는 술자리에서 밉상인 사람들.
1 그때그때 다르다 다른 자리에서 홀짝홀짝 잘 마시더니, 유독 그 자리에서만 못 마신다고 하면, 사람 가리면서 술 마시는 것 같아서 얄밉다.
2 왜 자꾸 먹이죠? 정작 자신은 마시지도 못하면서, 빈 잔을 쉬지 않고 채우고 “짠!”을 외치는 사람이 있다. 상대를 빨리 취하게 해서 그 자리를 끝내려는 심보다.
3 안주, 안주, 또 안주 친목 모임에서 술보다 안주를 엄청 먹는 사람들은 밉상이다. 술값보다 안주값이 훨씬 많이 나와서 1/N 하는 게 억울해진다.
4 없는 것만 찾는다 호프집, 포장마차, 주점 등에서 “와인 아니면 못 마셔요”라고 답하는 사람들과는 같이 술 마시기 싫다.
술 권하는 시대에 대처하는 법
술을 강권하는 사람을 피할 수 없다면 이렇게 대처하자.
1 널리 알린다 술을 마시면 ‘홍익인간’이 된다는 걸 널리 알려라. 우선 회사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소소하게 치맥을 할 때도 혼자 콜라나 사이다를 시키며 “술을 못 마셔요”라며 인식시킨다. 그러다 보면 회식자리에서도 “이 친구는 술을 못 마셔요”라고 대신 말해주는 사람도 나타나고, 대신 마셔주겠다는 사람도 나타난다.
2 선수 친다 다른 사람들이 소주, 맥주를 시키기 전에 “사이다 한 병요!”라고 선수 친다. 이 방법은 5명 이상의 규모 있는 회식을 할 때 효과적이다. 술이 아닌 탄산음료를 시킨다는 것만으로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현한 셈이기 때문이다.
3 종교를 밝힌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도 민감한 주제라고 꼽히는 종교. 신념 때문에 술을 안 마신다고 하는 사람에게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끈질기게 “안 마시는 거야, 못 마시는 거야?” 묻는다면 “종교 때문에 한 번도 안 마셔봐서 모르겠어요”라고 단호하게 말하라.
4 건강 상태를 말한다 내일 급하게 검진받을 일이 있다거나 항생제 같은 약을 먹었다는 식의 핑계를 댄다. 간수치가 안 좋다는 표현도 좋다, 단, 갑자기 잡힌 술자리에서만 써먹을 수 있다. 우연이 반복되면 핑계로 들릴 수 있기 때문.
5 화장실에 자주 간다 술집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선점한 후에 티 나지 않게 자리를 비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친한 친구에게 부탁해 전화를 받으러 나가는 척하거나 화장실을 가는 것도 괜찮다. 자리에 없을수록 술잔을 받는 상황을 면할 수 있기 때문. 전화 받으러 나가서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도 중요하다.
6 취한 척한다 술을 안 마셨음에도 주정을 부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술 마신 사람처럼 상기된 듯 평소보다 목소리를 크게 내며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 술자리 분위기에 완벽히 녹아든 사람처럼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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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전소영
- 포토그래퍼
- Kim Myung Sung